153화. 또 한 번의 이별
“대조사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이는 실로 소림의 홍복(洪福)입니다. 부족하나마 대조사님의 의발(衣鉢)을 이을 아이를 반드시…….”
“할!”
원주는 물론 운현도 깜짝 놀랐다.
비록 내공은 실려 있지 않았지만 와불의 일갈에 담겨 있는 기세는 감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누가 의발을 잇게 한다더냐! 네놈이 정녕 이것마저 내치고 싶은가 보구나!”
와불은 진심으로 노한 듯 크게 소리쳤다.
의발을 전한다는 것은 후계자가 스승의 뜻과 깨달음을 전수받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와불의 의발을 잇는다는 건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았다.
전대 대조사 와불.
소림 최고의 권위이자 강호 무림의 배분으로는 그보다 높은 이가 없는 와불의 권위와 이름을 이어받는 것이다.
설령 신승 불영이라 할지라도 와불의 의발을 이은 자는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소림을 떠나 은거하던 와불이 공식적으로 돌아오는 셈이 되는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계율원 원주의 목이 쏙 들어갔다.
그 당당해 보이던 원주가 와불의 일갈에 불쌍할 정도로 위축되고 있었다.
“마, 말씀하신 대로 곧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원주는 급히 발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와불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잠깐 멈춰라.”
원주가 엉거주춤 돌아보자 와불은 사나운 눈초리로 말했다.
“언제부터 소림이 은인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 곳이 되었느냐?”
와불의 말에 원주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은인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은인이라 하시면…….”
와불은 대답 대신 운현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 눈짓에 운현이 더 놀랐다.
“네?”
운현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계율원주도 운현과 와불을 번갈아 쳐다보며 당황스러워했다.
“이놈이 자신의 검을 내게 보여 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허니 그가 소림의 은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아, 저는…….”
운현이 만류하고 계율원주가 엉거주춤 서 있는데 와불의 일갈이 떨어졌다.
“아니면 네가 이 일에 조금도 감사할 뜻이 없다는 말이더냐!”
원주는 급히 운현에게 고개를 숙이며 합장을 했다.
“소림의 은인께 소승 전각이 감사드립니다.”
운현은 엉겁결에 고개를 숙이며 전각이라는 계율원 원주의 예를 받았다.
‘법명이 전각이었구나.’
운현은 그의 법명을 처음 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와는 제대로 통성명도 하지 못했다.
“되었다. 이제 가 보거라.”
와불의 말이 떨어졌지만 계율원주 전각은 한동안 운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대 대조사인 와불에게 깨달음을 줄 정도라면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 아무리 쳐다봐도 운현은 처음 보았던 무림맹 서기의 모습 그대로다.
“안 가?”
와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면 너도 여기서 살려고?”
“아, 아닙니다.”
계율원주 전각은 급히 발을 옮겼다.
허둥지둥 그가 사라지자 와불은 혀를 찼다.
“저놈은 전각이다. 하지만 전각은커녕 반각도 못하고 있는 녀석이지. 현 장문인과 같은 계파라는 이유로 계율원 원주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와불은 탐탁찮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장문인 녀석은 아예 이 근처로는 오지도 않는다. 와 봤자 좋은 소리 못 들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슥.
운현을 돌아보며 와불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소림사 계율원 원주의 정식 사례를 받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자랑해도 될 게다.”
“저, 제가 은인이라는 말씀은…….”
“응? 얘기 안 했나?”
와불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네 수련검은 내게도 제법 인상적이었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수법도 몇 가지 떠올랐고. 그냥 혼자 만족할 수도 있겠다만, 소림에 진 빚도 있고 해서 대신 돌려 막았다.”
백호수련검에 대한 와불의 평가는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깨달음이 있었다는 말은 처음이다.
그러다 문득 운현은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제가 그 붉은 눈인지 뭔지를 안 했더라도…….”
따지자면 와불은 운현에게 빚을 진 셈이다.
운현이 계속 가르침을 요청했다면 거부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어허. 그거하곤 다른 문제다.”
와불이 짐짓 정색을 하지만 이미 운현의 입은 튀어나와 있었다.
“뭐가 다릅니까? 어차피 그냥 알려 주셨을 거면서.”
“허어. 그런 게 아니래도.”
“꽃비인지 꽃눈인지 만드느라 제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십니까?”
운현이 툴툴거렸지만 와불은 똑같은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입으로 ‘은인’이라고 말한 다음이 아닌가?
덕분에 운현과 그만 처지가 뒤바뀐 것이다.
이때가 기회라는 듯, 운현의 툴툴거리는 소리는 그 뒤로도 한동안 끊이지 않았다.
***
운현은 백호수련검을 펼쳐 내고 있었다.
쏴아아.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흘렀다.
손에 쥔 운현의 검은 그 존재를 더욱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바로 운현의 마음이며, 그곳에는 오직 자신의 검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람도 구름도 그리고 스치는 추억들도 그저 남은 파편에 불과할 뿐, 운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언제나 한 자루의 도도한 검뿐이었다.
우웅.
나지막한 울음과 함께 백호수련검 제일식이 펼쳐졌다.
부끄러운 듯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미녀의 발걸음은 이윽고 속삭이는 밀어가 되어 제삼식으로 이어졌다.
후우욱.
제오식이 미소처럼 반짝이고 제칠식이 시냇물처럼 청명하게 재잘거린다.
화려한 제구식으로 이어진 미녀의 체취는 이윽고 제십이식이 되어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었다.
‘아.’
초식도 잊었다.
검도 잊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그 광경에 운현은 모든 것을 잊었다.
자기 자신조차 존재하지 않는 그곳.
우우우우.
거대한 흐름이 세계를 품에 안고 흘러가고 있었다.
그 무엇도, 어떤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 거대한 흐름.
압도적인 그 흐름 앞에 운현은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또륵.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운현은 눈을 떴다.
깜빡.
운현은 여전히 와불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 놀라운 광경의 여운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아직도 자신이 어디 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향기가 남은 추억인 양 허공을 떠돌았다.
그리고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이 그제야 뺨에 느껴졌다.
“……잘했다.”
와불이 조용히 운현에게 말했다.
“잘했다.”
나지막한 그 읊조림은 오히려 와불의 감격을 더욱 강하게 전해 주었다.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흐르면서도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놈아, 그리 좋아할 것 없다.”
와불이 짐짓 퉁명스레 말했다.
“이제 겨우 마음 하나 다스리는 법 깨우쳐 놓고 무슨……. 네 고생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와불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운현도 웃었다.
묵묵히 지켜보던 독고랑 역시 그제야 나지막이 숨을 쉴 수 있었다.
‘겨우 마음 다스리는 법이라고…….’
조금 전 자신이 본 운현의 모습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치 도인의 득도와도 같은 광경.
무인이 그런 경지에 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독고랑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 알지 못할 향은, 그리고 은은한 빛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독고랑은 나직이 어깨를 떨었다.
온몸을 흐르던 전율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희미하게 떠도는 ‘잔향’ 역시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
다음 날 새벽.
조용히 좌선을 마친 운현은 일어나서 빗자루를 들었다.
사락
빗자루가 유난히 부드러운 울림을 냈다.
새벽 공기는 상쾌하고 몸은 날아갈 듯했다.
그만큼 심상 수련의 효과는 놀라웠다.
사락, 사락.
아무도 운현을 방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운현의 검을 가로막지 못한다.
운현의 뜻이 가는 대로 검이 흐르고, 운현의 마음이 가는 대로 검이 뻗는다.
와불은 수련에 힘쓰라고 했지만 오히려 운현이 매달리고 싶을 정도였다.
청소를 마친 운현은 빗자루를 초막 뒤에 세워 놓고 차를 준비했다.
덜컹.
초막 문이 열린 것은 차향이 은은히 퍼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운현은 공손히 예를 표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선사님.”
와불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든 운현이 의아한 눈빛을 했다.
여느 때와 달리 와불이 단정하게 승복을 차려입고 있었던 것이다.
“차를 다오.”
평상 위에 앉은 와불이 조용히 말했다.
운현은 조심스럽게 차를 따라 와불에게 올렸다.
달칵.
와불은 운현이 올리는 차를 받아 조용하게 향을 음미했다.
그 모습이 마치 엄숙한 고승의 모습과 같아서 운현은 절로 미소를 피워 올렸다.
‘……어쩐지 잘 어울리시는 것 같기도 하고.’
평소의 와불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 고승인 척하는 태도가 또 대단히 자연스러워서 운현은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비록 대놓고 웃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시지? 어디 나가시나?’
탁.
와불은 운현의 차를 세 번 마시고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평상에 내려놓았다.
슥.
그것은 거친 천으로 된 작은 주머니였다.
운현이 눈을 깜빡이는데 와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성질 괴팍한 늙은이, 그동안 비위 맞춰 주느라 고생했다.”
사박.
한 통의 서찰이 마찬가지로 평상에 놓였다.
“그리고 이건 불영 그놈에게 보내는 서찰이니 전해 주도록 해라.”
운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와불은 운현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평상에서 일어났다.
“선…….”
“앞으로의 일은 네게 달렸다.”
초막 문 앞에 선 와불이 말했다.
“다스리게 되든가, 혹은 잡아먹혀 끌려다닐 것인가는 결국 네가 하기 나름이다.”
언뜻 매정하기까지 한 그 목소리에 담긴 뜨거운 정을 운현은 모르지 않았다.
의형 일충현이 그랬듯 와불도 지금 운현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끼이익.
“가거라.”
문소리와 함께 와불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운현이 무어라 할 사이도 없이 문이 닫혔다.
탁.
금방이라도 다시 열릴 것 같은 낡은 문 앞에서 운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늘 흘러나오던 와불의 마른 헛기침 소리조차 지금은 들리지 않았다.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평상에서 일어나 와불의 초막 문 앞에 섰다.
슥.
운현은 천천히 큰절을 올렸다.
흙바닥에 옷이 더러워질 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선사님.”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코가 시큰하고 눈이 뜨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 역시, 숨길 수가 없었다.
“부디 오래, 오래 사십시오.”
운현은 무릎을 꿇은 채 한참이나 일어서지 않았다.
그래도 초막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조심스레 일어난 운현은 평상 위의 주머니와 서찰을 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는 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락.
운현은 초막 문을 다시 돌아보았다.
초막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운현은 초막을 떠났다.
독고랑 역시 묵묵히 운현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초막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것을 독고랑은 잊지 않았다.
저벅, 저벅.
그렇게 두 사람은 와불의 초막을 떠났다.
외진 와불의 초막에 다시 쓸쓸한 적막이 찾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