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백척간두 진일보
운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무공을 배울 때는 자신의 자세에 대해 생각했다.
가능한 올바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동작의 의도를 충실히 나타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그런 경지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으니까.
“뭐랄까, 느끼는 것 같습니다. 마치 거대한 강이 흐르는 듯한 그런 흐름을…….”
“그래.”
와불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 그러니 네 마음이 움직일 때도 역시 그래야 한다.”
‘말하자면 완전히 몰입한다는 건가?’
운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와불이 문득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있으란 말은 아니다.”
눈을 부라리며 와불은 말을 이었다.
“그랬다간 내 손에 경을 칠 테니 그런 줄 알아. 네 마음속 정도는 손바닥 보듯 훤하니까.”
손바닥 보듯 훤하다니, 그런데 꽃눈을 준비하는 건 몰랐느냐고 속으로 생각하는데 와불이 피식 웃었다.
“그건 알고도 넘어가 준 거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심하게 감동하시던데.’
운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속내를 알아차린 듯 와불이 한숨을 쉬었다.
“이놈아, 너도 늙어 봐라. 나이 들면 별거 아닌 거에도 마음이 찡하고 그러느니라. 허니 노인들한테 잘해. 작은 거에도 금방 삐지니까.”
운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 정도면 충분히 잘하는 것 아닐까?
“뭐, 나쁘진 않지. 그보다 뭐하냐? 빨리 가르쳐 준 대로 수련 안 하고?”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심드렁했지만 운현도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심상 수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와불의 손가락이 다시 운현의 이마를 때렸다.
딱.
“으악!”
“이놈이 어디서 정신을 놓고 딴생각이야!”
허름한 초막에 늙은 와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운현은 억울한 듯 항변했다.
“그, 그게 아니라…….”
늘 그렇듯 주변을 지키고 서 있던 독고랑은 힐끔 운현과 와불을 쳐다보았다.
수련이 아니라 놀고 있는 것 같은 두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은 독고랑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건 조금 전 운현이 아무 말도 안 했어도 대화가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마음속이 훤히 보인다는 건 정말인가 보군.’
늙은 중과 늙은 요괴는 어쩌면 비슷한 것이 아닌가, 독고랑은 생각했다.
그 순간, 때마침 자신을 쳐다보는 와불의 시선에 독고랑은 그만 움찔하고 말았다.
“크흠.”
대단히 드물게도 독고랑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와불 역시 독고랑에게서 관심을 끊고 다시 운현을 보며 말했다.
“자, 어서 해! 제대로 된 심상 수련을 하라고!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말이다. 크헐헐헐.”
어딘가 즐거운 듯한 와불의 목소리가 초막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독고랑은 절대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게 초막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딱.
“윽.”
경쾌한 소리와 함께 운현이 이마를 감싸쥐었다.
운현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불평을 말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제는 별로 아프지도 않은 데다가, 자신의 심상 수련이 다른 곳으로 흘러간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와불도 찻잔을 쥔 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마를 문지르던 운현은 다시 평상 위에 앉아 정좌를 했다.
그러다 문득 물었다.
“그거,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응?”
눈살을 찌푸리는 와불에게 운현이 다시 물었다.
“제 이마를 때리시는 거요. 분명 뻔히 보이는데 피하거나 막을 수가 없던데요.”
“클클.”
와불은 찻잔을 든 채 웃었다.
“그래,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건 안 될 거다. 이건 내 모든 걸 주고 얻은 거니까.”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건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모든 걸 주었다고요?”
“그래.”
후룩.
차를 마시고 와불이 말했다.
“이래 보여도 내가 예전엔 천하에 적수가 없는 고수였느니라.”
‘에이.’
운현이 비록 노인들을 공경하긴 하지만 그 말은 믿기 힘들었다.
게다가 본래 어르신들의 옛이야기란 왕왕 과장되기 마련이 아닌가?
그런 운현의 생각을 읽은 듯 와불이 피식 웃었다.
“이놈아, 내가 누구냐?”
“그야 와불 선사님이지요.”
운현의 너무도 당연한 대답에 오히려 놀란 사람은 와불이었다.
그는 눈을 껌뻑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나는 와불이지. 하지만 그 앞에 붙는 것이 있지 않느냐?”
‘성격 고약하고 종잡을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던 운현은 문득 와불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신승 불영 대사님의 스승이십니다.”
딱.
“악!”
이마를 감싸쥐는 운현에게 와불이 화를 냈다.
“대사는 무슨 얼어죽을 대사! 스승도 절도 버리고 나간 땡중 놈이 무슨 대사냐!”
씩씩거리던 와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그놈의 스승이다. 헌데 내가 그보다 못 하겠느냐? 그놈 불영이 백보신권으로 이름을 날릴 때에도 내 앞에선 숨도 제대로 못 쉬었느니라.”
숨도 못 쉬었다는 말은 운현도 납득할 수 있었다.
다만 와불이 불영보다 고수여서기보다는 그냥 와불의 심술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와불에게서 아무런 기세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했다거나, 혹은 너무 경지가 높아서 측량할 수 없는 것과는 달랐다.
운현이 보기에 와불은 보통 노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클클.”
와불이 웃었다.
“그야 단전이 부서졌으니까 그렇지.”
“네?”
운현은 놀라서 반문했다.
‘생명력을 일구는 밭’이라는 뜻의 단전(丹田)은 사실상 모든 내공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단전이 부서진다는 것은 무인에게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숨에 모든 내력을 잃고 생명마저 위험해지며, 살아남는다 해도 폐인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아니, 어쩌시다가…….”
당황한 운현이 물었다.
그러나 와불은 오히려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르기를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라 하지 않았느냐? 그리하면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리라고 말이다.”
백척의 장대 끝에서 한 발을 내디디라. 그리하면 세계가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리라.
이것은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구도의 일면을 표현한 경구다.
하지만 그것이 단전을 부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나는 한 발 내딛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모든 내력을 잃었다.”
피식 웃으며 와불이 말을 이었다.
“단전이 완전히 부서져 버렸거든.”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비록 무슨 상황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평생 쌓아 온 내력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시면…….”
운현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와불은 이미 운현이 무엇을 물으려는지 알고 있었다.
“깨달음 말이냐? 물론 얻었지.”
‘아.’
운현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한 발을 내디딘 와불이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와불은 반쯤 눈을 감고 담담하게 말했다.
“남의 말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깨달았다.”
운현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곧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 말은 결국 아무 깨달음도 얻지 못했다는 뜻이 아닌가?
꾹.
운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와불이 잃은 것이 너무 크다.
게다가 와불의 목소리는 어째서 그토록 담담하기만 한지, 운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후룩.
와불이 차를 홀짝였다.
그러곤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그놈 참.”
운현을 보며 와불이 말했다.
“단전이 부서진 건 난데 왜 네가 울려고 그러냐?”
와불의 말처럼 운현의 표정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바쳐 수련한 내공을 잃었을 때 와불이 느낀 상실감이 어떠했으랴?
그것을 생각하니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그 일을 담담히 이야기하는 와불의 모습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의연했던 의형 일충현과 너무도 흡사했다.
그래서 그만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목이 메고 말았던 것이다.
“괜찮다.”
와불이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공이야 무인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나 같은 중에게 무어 그리 대단하겠느냐? 부처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내가 그깟 단전이나 내력에 연연할 것 같으냐?”
오히려 와불이 운현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얻은 게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한 수를 얻었고…….”
주름지고 앙상한 손을 내려다보며 와불이 피식 웃었다.
“세상의 이면을 엿볼 수 있었으니까.”
“네?”
전혀 들어 보지 못한 단어에 운현이 고개를 들었다.
“네가 알 것 없다. 아니, 너는 모르는 편이 좋다.”
와불은 단호하게 말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지만 운현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못했다.
딱.
“아이쿠.”
와불이 다시 운현의 이마를 때렸다.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아픈 일격이었다.
“그보다 뭐하냐? 어서 다시 시작하지 않고.”
“아, 알았습니다.”
운현은 얼른 정좌를 하고 앉았다.
그간 익숙해졌다고 운현은 금방 심상 수련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늙은 와불은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비록 그 표정을 본 사람은 말 없는 독고랑뿐이었지만 말이다.
***
이른 아침, 새벽 수련을 마친 운현은 초막 앞을 쓸고 있었다.
쓰윽, 쓰윽.
긴 빗자루를 움직일 때마다 수련의 흔적이 사라지고 가지런한 무늬가 마당을 메웠다.
그것이 마치 자신의 마음을 정돈하는 것 같아서, 운현은 사뭇 경건하기까지 한 태도로 빗자루질을 이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새벽 수련과 청소가 끝나면 운현은 아랫마을로 내려가 용정차를 받아 온다.
그때쯤이면 와불도 일어나 차를 홀짝이며 운현에게 심상 수련이나, 아니면 백호수련검을 시킬 것이다.
심상 수련도 제법 익숙해져서 와불에게 이마를 맞는 일도 줄어들었다.
아니, 때로는 직접 수련검을 펼치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울 때도 있었다.
마음이 다스리기 힘들다지만, 동시에 마음은 그 어떤 제약도 없는 곳이니까 말이다.
쓰윽, 쓱.
그렇게 운현이 빗자루질을 이어 가고 있을 때였다.
“……대인.”
독고랑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독고랑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아차렸다.
저벅.
숲길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곧 화려한 가사를 입은 노년의 승려가 모습을 나타냈다.
숨길 수 없는 강한 기세를 풍기는 그 노승은, 바로 운현이 예전에 만났던 소림사의 계율원 원주였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시주.”
노승은 빗자루를 든 운현에게 합장을 했다.
그러면서도 한번 독고랑을 힐끗 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아닙니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운현 역시 그에게 답례했다.
“오히려 제가 소림에 큰 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아서…….”
끼익.
초막의 문이 열리며 운현의 말이 끊겼다.
계율원 원주 역시 눈을 들어 초막을 향했다.
“왔냐?”
와불이 구부정한 자세로 신을 끌고 나왔다.
계율원 원주는 정중하게 와불에게 합장을 했다.
“네, 대조사님.”
그의 목소리나 태도는 지극히 공손했다.
그러나 와불은 사뭇 퉁명스럽게 원주에게 물었다.
“지금 제자들 중에 무학에 남다른 자질을 가진 아이가 있느냐?”
그 말에 원주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 말씀은…….”
“이제 입적할 날만 남은 줄 알았더니 늘그막에 이런 깨달음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내 이로써 소림에 진 짐을 조금이나마 덜려 하니, 너는 가서 쓸만한 아이를 하나 보내도록 해라.”
“허어!”
정말로 감격한 듯, 원주는 환한 표정으로 합장을 하며 불호를 외웠다.
와불은 신승 불영의 스승이다.
깨달음을 전해 준다는 말에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