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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51화 (151/530)

151화. 그냥 하는데요?

“네놈의 그 수련검이 뭔지는, 사실 나도 모른다.”

평상에 앉은 와불이 탄식하듯 말했다.

운현은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와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마치 하늘 위에 노니는 용과 같아서 그 지나간 자취만 볼 수 있을 뿐 아무도 그 실체를 잡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체 어떻게 이런 검식이 존재하는지조차…….”

와불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 말에 운현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와불마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백호수련검’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불안이 뭉클 생겨났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지만.”

운현의 말을 끊으며 와불이 말했다.

“적어도 네놈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겠다.”

“문제요?”

“그래.”

와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첫째는 네가 심안을 열어 지극한 경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며, 그런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는 남의 내력에 의지하고 있으니 이것이 둘째다.”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 심안을 열었으면 좋은 것 아닌가요?”

심안이라면 곧 마음의 눈이다.

무공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운현이라도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와불은 눈살을 찌푸렸다.

“좋긴 뭐가 좋아?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놈이 황실의 공주를 마음에 품고는 자나 깨나, 하루 종일, 오로지 공주만 바라보고 있으면 그게 좋은 거냐?”

와불의 비유가 너무 세속적이라고 운현은 생각했지만 그 의미만은 명확하게 와 닿았다.

한마디로 능력도 안 되면서 눈만 높다는 뜻 아닌가?

“그것뿐이냐? 바라지 못할 것을 바라고 있으니 그 행동이 위태할 수밖에 없고, 충족되지 못하는 갈망에 스스로 번뇌하는 것은 물론이요 어지간한 미녀를 봐도 눈 아래로 보일 테니 어찌 교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와불의 비판은 신랄했다.

그리고 운현은 가슴이 찔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어찌 이토록 정확하게 자신의 심정을 꿰뚫는지 놀랄 정도였다.

언뜻 연애 이야기로 들릴 정도로 통속적인 비유였지만 말이다.

“그, 그럼 어울리지도 않는 남의 내력이라는 건…….”

운현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와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된 상황인지는 모르겠다만, 왜 그걸 네게 넘겨줬는지는 알겠다.”

와불이 운현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직 걷지도 못하는 자식을 험한 세상에 내보내는 어미의 심정이 그랬을까? 어울리지 않는 건 알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지. 그것마저 없었다면 네놈이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었을 테니까.”

말하던 와불은 눈을 감고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그리고 운현은 가슴이 찡해 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형님.’

이 내력은 의형 일충현의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오히려 운현을 걱정하며, 자신이 떠나고 나면 홀로 세상의 광풍을 맞아야 할 운현을 위해 남겨준 것이다.

운현의 눈이 충혈된 것도,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와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남의 옷도 나쁜 것만은 아니다. 허나 그러면 더욱 정진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하거늘, 너는 그간 수련을 게을리한 모양이구나.”

운현은 뜨끔했다.

황궁을 나온 이후 제대로 수련한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했다.

물론 나름대로 애쓰긴 했다.

하지만 결국 항상 부족하고 아쉬운 상태로 그만두어야 했다.

그러니 게을리했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거, 들어 봐라.”

와불이 턱짓으로 가리킨 것은 운현이 가져온 목검이었다.

슥.

운현은 목검을 들고 와불을 바라보았다.

멀뚱멀뚱 바라보는 운현에게 와불이 인상을 썼다.

“제대로 안 들어?”

‘아.’

그제야 운현은 와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운현은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검을 쥐었다.

오직 운현 자신만의, 마음의 검을.

우우웅.

낮은 울림과 함께 목검에 낯선 기가 서렸다.

와불은 피식 웃었다.

“허, 그놈. 하라고는 했지만 정말 넙죽 잘도 하는구나. 천하에 목검으로 검기를 발현할 수 있는 놈이 얼마나 될는지…….”

혀를 차던 와불은 심각한 표정으로 운현의 목검에 서린 기운을 살폈다.

“허나 말했듯이 이건 빌려 입은 옷에 불과하다. 좋다고 계속 의지하고 있다가는 결국 옷에 몸을 맞춰 가는 꼴이 된다. 네가 아니라 이 내력이 널 규정짓고 제한하게 되는 거야.”

와불은 눈을 들어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스리지 못하면 결국 끌려가기 마련이니까.”

쿵.

순간 운현은 충격을 받았다.

―자네가 힘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힘이 자네를 다스릴 것이네.

비록 의도나 뜻은 조금 다를지라도 지금 와불이 하는 말은 의형의 유언과 똑같았다.

“어찌하면.”

운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목검에 서리던 기운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스리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끙.”

와불이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뭐, 대개는 달마심법을 익히고 십 년 정도 면벽을 하면 어찌어찌 되긴 하겠다만…….”

‘면벽 십 년.’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되뇌었다.

말이 십 년이지, 운현이 황궁에서 검을 쥐고 산 시간이 십 년을 조금 넘는다.

그만큼의 시간을 이곳에서 오직 벽만 보며 수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하지만.’

면벽 십 년을 하지 않는다면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검을 놓거나, 아니면 와불의 말처럼 힘에 끌려가거나.

으득.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절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의형 일충현의 유언을 어찌 저버릴 수 있단 말인가?

검을 놓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와불의 말처럼 이미 보아 버린 것은 어찌할 수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운현은 마음을 정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운현이 말했다.

“부디 제게 달마심법을…….”

“달마심법?”

심각한 와중에 와불의 목소리가 운현의 말을 끊었다.

“네가 그건 왜? 오늘부터 머리 깎고 불문에 들려고?”

“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니 방금 달마심법으로 면벽 십 년이라고…….”

“그거야 불영 같은 발칙한 땡중 놈을 끌어다가 시킬 일이지, 널 왜? 네가 중이냐?”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운현은 무언가 대화가 겉돌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럼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뭘로 들은 게냐?”

와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놈아, 너는 이미 수련검인지 뭔지를 익히고 있지 않느냐? 남의 옷을 네것으로 만들기 위해 네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아하!”

운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의형 일충현도 백호수련검에 기를 다스리는 진기도인(眞氣導引)의 효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기쁨도 잠시, 운현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어, 그럼 그냥 하던 대로 수련을 했어도…….”

어차피 백호수련검이 답이라면 굳이 와불의 조언이 필요 없었던 것 아닌가?

운현의 표정이 이상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순간, 저 능청스러운 와불에게 속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이놈!”

운현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와불이 대뜸 손을 들어 운현의 이마를 향해 손가락을 퉁겼다.

‘웃.’

하지만 그 정도 빠르기엔 이미 익숙해진 운현이다.

운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와불의 딱밤을 피했다.

아니, 피하려 했다.

하지만 순간 와불의 손이 기이한 움직임을 보였다.

스륵.

‘앗!’

예상치 않은 와불의 손짓에 운현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잠깐의 틈을 와불은 놓치지 않았다.

딱.

“아얏!”

의외로 매운 와불의 딱밤에 운현은 인상을 쓰며 이마를 감싸쥐었다.

어찌나 손이 매운지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감히 누굴 사기꾼 취급하고 그래? 내가 비록 땡중일지언정 남을 속여 본 일은 없느니라. 극히 일부의 예외를 빼고는 말이다!”

엄한 표정으로 와불이 일갈했다.

하지만 운현은 이마를 문지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극히 일부의 예외라니,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세상에 사기꾼이 어디 있을까?

“크흠, 그러니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은 두 가지다.”

눈물이 글썽한 운현의 모습에 약간 찔린 와불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첫째는 그 수련검을 하는 것이다. 밤이든 낮이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네가 하고 싶은 만큼 말이다.”

눈물이 글썽한 중에도 운현은 반색했다.

수련을 하라면 그것만큼 반가운 말은 없다.

“두 번째는 심상 수련이다.”

“심상 수련요?”

처음 듣는 단어에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심상 수련이라면 아마도 마음으로 하는 수련인 듯했다.

“그래.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는 놈이 어찌 힘을 다스릴 수 있을까? 너처럼 검밖에 모르는 놈에겐 그만한 것이 없다.”

‘검밖에 모르진 않는데.’

운현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와불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잘 익히면 제법 도움이 될 게다. 심상 수련을 익히면 방에 뒹굴면서도 수련을 할 수 있거든.”

운현의 눈이 반짝 빛났다.

방에 뒹굴면서도 수련을 할 수 있다니, 수련할 곳이 늘 마땅찮은 운현으로선 더없이 반가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선사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와불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운현은 얼른 말했다.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운현은 꾸벅 절까지 올렸다.

“흐음.”

와불은 볼품없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짐짓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너의 진실됨을 보아 내 특별히 가르침을 베풀어 주마.”

씨익 웃고 있는 와불의 눈가엔 심술이 덕지덕지 배어 있었다.

그러나 운현은 절을 하느라 미처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무표정한 독고랑이 묵묵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

운현의 생활은 완전히 바뀌었다.

새벽에 청소를 하고 차 심부름을 하는 건 변하지 않았지만 그 외의 시간엔 온통 수련에 빠져 살았다.

그리고 운현은 와불이 말한 ‘심상 수련’을 배우기 시작했다.

“앉아 있건 누워 있건 뒤집어져 있건 상관없다.”

와불은 심상 수련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처음엔 정좌가 도움이 될 게다. 그 상태에서 네 수련검식을 마음에 떠올려라. 네가 있지도 않은 검을 손에 쥐듯이 말이다.”

운현은 정좌한 상태로 심상을 떠올렸다.

어렵지는 않았다.

와불의 말처럼 마음의 검을 쥐는 것은 운현에게 이미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심상 수련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리고 움직여라. 오직 마음으로만 말이다.”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수련을 떠올리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기억을 되새기던 운현은 대번에 와불의 손가락에 이마를 맞았다.

딱.

“으악.”

이마를 감싸 쥔 운현에게 와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가 생각하라고 했냐? 수련을 하라고 했지.”

“아니, 지금 그래서 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억을 되새기라는 것이 아니다.”

와불은 가차없었다.

“보이는 현상보다 더욱 진실 된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마음이다. 손발을 움직이는 수련이 오히려 네 마음의 되새김이 되어야 하느니라.”

선문답 같은 와불의 말은 운현에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와불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느낄 수 있었다.

손으로 잡는 목검보다 마음으로 쥐는 검이 더 진짜처럼 여겨지듯 말이다.

“그러면 우선 자세부터 정확히 떠올리도록…….”

따악.

“윽!”

“그걸 네가 왜 정해? 네가 가르치는 사람이냐?”

맞는 말이긴 했지만 운현은 억울했다.

자세부터 하지 않으면 대체 무엇부터 한단 말인가?

“허면 무엇을 생각하란 말입니까?”

“넌 수련할 때 뭘 생각하냐?”

와불의 반문에 운현은 멀뚱멀뚱하게 답했다.

“생각요? 그냥 하는데요?”

피식 와불이 웃었다.

“그래. 그렇지. 그래도 딴생각을 하는 건 아닐 테니 뭔가 있을 거 아냐?”

“음.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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