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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50화 (150/530)

150화. 붉은 눈이 내리면

난데없는 와불의 말에 운현이 고개를 돌렸다.

와불은 운현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찻잔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네?”

“능력도 안 되면서 눈만 높아가지고 헛고생깨나 한다는 뜻이다.”

차를 다 마신 와불은 찻잔을 치며 속에 붙어 있는 찻잎을 떨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백날 해 봐라. 네가 바라보는 그 경지가 네 손에 잡히는지.”

‘그 경지!’

운현은 놀란 눈을 부릅떴다.

지금 와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언젠가 운명처럼 스쳐 지나간, 그리고 다시는 보지 못했던 그 광경을 어찌 운현이 잊으랴?

한순간 자신의 눈 앞에 펼쳐졌던 그 새로운 세상, 천지에 가득한 그 놀라운 세계를 말이다.

영원과도 같은 거대한 흐름.

그리고 그 흐름을 따라 펼쳐졌던 꿈결같은 검무.

비록 찰나와 같은 경험이었지만 운현은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아니, 잊기는커녕 그때의 기억은 불로 지진 낙인처럼 운현의 가슴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말이다.

“지금껏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요령으로 버텼는지는 모르겠다만.”

와불이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찻잔의 찻잎을 긁어 냈다.

“그렇게 해서는 백날이 가도 안 된다. 예전에는 그게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아니야.”

와불은 찻잎을 입 안에 쏙 집어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애지중지 마음에 품고 있으면 뭐 하냐? 진짜는 다른 곳에 있는데. 지금 넌 연애 감정 그 자체에 빠져서 정작 연인은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풋내기와 같다.”

승려치고는 매우 세속적인 비유였지만 운현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 와불은 운현이 진짜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못 믿겠다면 뭐, 그렇게 평생 해 보든가.”

운현을 쳐다보는 와불의 눈빛은 사뭇 도발적이었다.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던 운현이 물었다.

“그러면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와불이 피식 웃었다.

“왜? 그리도 그 경지가 보고 싶더냐?”

“네.”

운현은 즉시 대답했다.

와불은 다시 웃었다.

“못 보면 죽을 것 같고?”

“네. 그렇습니다.”

운현의 말은 진심이었다.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처럼, 그 광경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을 걸어도 좋을 것 같았다.

와불은 씨익 웃었다.

“걱정 마라. 못 봐도 안 죽으니까.”

“선사님!”

운현은 마음이 달았다.

와불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건 분명한데, 그걸 말해 주지 않으니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제발 알려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와불은 혀를 찼다.

운현을 놀리던 짓궃은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짙은 회한만이 주름진 얼굴에 가득했다.

“후우.”

한참 만에 와불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차가 떨어졌다.”

“네?”

운현의 반문에 와불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이 수련인가 뭔가를 하도 오래 하는 바람에 차를 다 마셔 버렸단 말이다. 어떡할 거냐? 내일 새벽에도 마셔야 하는데.”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운현은 벌떡 일어났다.

급한 마음에 독고랑이 따라오지 않는 것도 미처 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독고랑이 복잡한 표정으로 와불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타닥.

운현은 작은 숲 길을 따라 뛰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졌지만 독고랑의 시선은 여전히 와불을 향하고 있었다.

“뭘 보냐?”

와불이 독고랑을 향해 툭 던지듯 말했다.

“아까는 놀라서 입도 못 다물더니 왜 구박이냐고? 그야 당연하지. 저놈의 눈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와불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저놈은 이미 봐 버렸다. 이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해. 그러니 앞으로 나가라고 채찍질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죽든 살든 말이다. 클클클.”

킬킬거리며 찻잔을 들어올리던 와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찻잔은 텅 비어 있었고 찻잎마저 긁어 먹은 후였다.

“뭐하냐? 네 주인님 가시는데 얼른 따라가지 않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와불이 말했다.

무언가 말할 듯하던 독고랑은 결국 조용히 몸을 돌렸다.

탓.

독고랑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홀로 남은 와불은 다 마셔버린 차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쯧.”

쏴아아.

바람이 불었다.

초막 앞 공터에 남아 있던 수련의 흔적이 천천히 사라져 가고 있었지만, 운현이 펼쳐 낸 검의 모습은 와불의 마음에 더욱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

“선사님!”

“아, 글쎄 일 없다니까.”

와불은 완강했다.

몸이 달은 운현이 가르침을 청했지만 와불은 거부하고 있었다.

운현이 보기엔 와불도 분명 흥미가 있는 듯한데 도통 가르쳐주질 않는다.

“이러시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무슨 생각?”

“내일부터 용정차를 못 드시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와불은 운현을 빤히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든가.”

먹힐 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놈의 ‘대환단’ 때문에 목줄이 잡혀 있는 상태였으니 서툰 협박 따위가 통할 리 만무하다.

생각해 보면 와불은 대단히 용의주도했다.

이미 운현은 ‘진심으로 하고 싶습니다. 안 하면 죽을 것 같습니다’라고까지 말한 상태다.

마치 상대의 속내는 듣지도 못한 채 혼자 고백을 해 버린 바보같은 사춘기 소년 같아서, 주도권을 와불에게 완전히 내준 셈이 된 것이다.

“선사님!”

결국 운현은 무릎을 꿇었다.

비장한 운현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와불은 심드렁했다.

“왜?”

“본디 승려란 중생의 번뇌를 덜어 주어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제 마음을 이토록 어지럽게 하십니까?”

“허.”

와불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젠 네가 나한테 설법까지 하려는 거냐?”

그가 뭐라 하건 운현은 무릎을 꿇은 채 기다렸다.

이제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운현의 진심을 보이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문득 와불이 말했다.

“오냐, 말해 주마.”

운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와불은 말했다.

“붉은 눈이 내리면 말이다.”

‘아!’

운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마치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붉은 눈이라니.’

소림 권법을 창시했다는 달마 선사에게는 여러 일화가 있다.

그중 하나가 그 유명한 구 년간의 면벽좌선이다.

달마 선사가 소림사에서 면벽좌선을 하던 어느 겨울날, 한 젊은이가 달마를 찾아왔다.

그 젊은이는 눈 속에 서서 사흘이나 달마를 기다렸다.

달마가 그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자 그는 마음의 평화를 구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달마는 그 젊은이를 외면하며 ‘붉은 눈이 내리면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사실상의 거절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젊은이는 서슴없이 자신의 왼팔을 잘랐고, 쌓인 눈은 온통 붉은빛으로 변했다.

이에 달마가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으니 그가 바로 혜가다.

그 혜가를 기리며 지금도 소림사의 승려들은 한 손으로 합장을 하는 것이다.

‘어…….’

그 이야기는 운현 역시 알고 있었다.

운현은 와불을 쳐다보고, 그리고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팔을 자르라고?’

자른다고 될 리가 없다.

와불은 달마가 아니고 자신도 혜가가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도 아니라서 눈 한 송이 떨어질 리가 없다.

후룩.

와불이 소리를 내며 차를 들이켰다.

주름진 와불의 입가에는 심술궂은 미소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

운현은 거절당했다.

붉은 눈이 내려야 말해 주겠다는 건 결국 절대 가르쳐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낙심도 처음뿐이었다.

‘팔을 자르라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들은 셈이니 운현도 나름 오기가 생겼다.

무엇보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좋아.’

운현은 결심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운현의 일상은 매우 바빠졌다.

와불의 차 심부름도 청소도 다 때려치우고 운현은 매일같이 들로 산으로 그리고 등봉현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저녁때가 되면 운현은 그날의 수확물을 등에 지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운현은 실과 바늘을 구해서 밤새도록 무엇인가를 만들었다.

서툰 바느질에 손가락 가득 상처가 가득했지만 운현은 멈추지 않았다.

독고랑 역시 묵묵히 운현과 동행할 뿐,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저벅.

나흘째 새벽, 운현은 날이 밝기도 전에 와불의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마치 황실의 조회에 참석한 문관처럼, 운현은 의관을 정제하고 새벽 어스름 속에서 엄숙하게 기다렸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부스럭.

와불의 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하지만 와불은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새벽 좌선을 하는지도, 혹은 차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차가 벌써 떨어졌을 텐데.’

운현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사다 주지 않았으니 차는 이미 없을 것이다.

차 없이는 한시도 못 살 것 같은 와불이 그동안 어떻게 참고 있었을까?

운현은 문득 ‘차 정도는 가져다 드릴걸’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운현은 조용히 와불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짹짹.

새벽 하늘이 점차 밝아오고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크흠.”

초막 안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와불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덜컥.

화악.

와불은 문득 밀려오는 꽃향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운현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음은 와불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 꽃잎이 가득할 줄은 미처 몰랐다.

슥.

와불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초막 사방에는 각양 각색의 꽃잎이 가득했다.

마치 꽃비, 아니 꽃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말이다.

“훗.”

와불은 웃었다

꽃잎으로 덮힌 뜰 한 가운데 운현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영락없이 가르침을 구하는 혜가의 자세다.

“크흠.”

이른 새벽의 은은한 향기가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아서, 와불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이 새벽부터 무슨 일이냐?”

“가르침을 구하고자 합니다.”

정중하고 엄숙한 자세로 운현이 말했다.

십여 년을 넘게 학사요 선비로 살아온 꼿꼿한 모습이 운현의 자세에 배어 있었다.

“붉은 눈이 왔더냐?”

와불은 짐짓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사방에 붉은 꽃잎을 깔아 놨지만 그 정도로 와불을 움직이기엔 어림도 없다.

“네놈이 제법 머리는 굴린 것 같다만…….”

와불이 말하는 순간이었다.

슥.

운현이 살짝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와불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사락.

한 조각 붉은색이 와불의 시야를 가리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꽃잎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눈이 오고 있었다.

바람도 없는 고요한 산중에 붉은 꽃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떨어져 내렸다.

나무에 높이 매어 놓은 보따리가 활짝 열리고 온갖 꽃잎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화아아.

사방에 흩날리는 꽃잎들 속에서 운현이 말했다.

“만천홍설(滿天紅雪)입니다. 선사님.”

운현은 웃고 있었다.

말하는 운현의 어깨에도, 머리에도, 그리고 사방에도 붉은 꽃눈이 내리고 있었다.

“허허허.”

와불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사방에 꽃잎이 흩날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실은 운현이 백호수련검을 펼쳐 내던 그 순간부터 참고 있던 웃음이 결국은 그의 주름진 입가로 새어 나온 것이다.

화아아악.

꽃잎의 눈은 하늘을 가득 가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초라하고 작은 초막이 지금만큼은 황실의 궁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했다.

“이놈아.”

와불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이건 꽃비라고 하는 거다. 만천홍설이라는 말이 어디 있느냐? 만천홍우(滿天紅雨)라 해야지.”

그러나 와불의 표정은 이미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운현 역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그때그때 다른 거니까요.”

“그래.”

와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그때 다르지.”

와불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주름잡힌 작은 손에 붉은 꽃잎 하나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어차피 눈이고 비고, 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까.”

와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방에서 쏟아져 내리던 붉은 꽃잎은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지만 그 향기는 아침 햇살 속에 짙게 초막 주변을 감싸 안고 있었다.

“……다 마음속에 있는 게야.”

와불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주름진 눈가에 살짝 눈물이 어리는 것을 운현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와불의 초막에는 그렇게 꽃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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