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취미냐?
따랑.
난향 다루의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소리를 내며 울렸다.
“어서 오게.”
탁자를 닦고 있던 주인은 운현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이미 여러 번 찾아왔던 손님인지라 목소리마저 심드렁했다.
함께 들어온 독고랑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작은 다루 안을 살폈다.
이제껏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지금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고랑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운현은 다루 주인에게 예를 표하고는 말했다.
“저, 죄송합니다만 지난번에 사 간…….”
다루 주인은 운현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는 탁자를 닦던 천을 내려놓고 손을 슥슥 문지르고는 품 안에서 작은 차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여기 있네.”
주인은 태연한 표정으로 운현에게 차 주머니를 내밀었다.
“용정차일세. 이걸 찾는 거지?”
“그, 그렇긴 합니다만.”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난번에는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몰랐네. 그런데 마침 어제 들어왔네.”
운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의구심이 들었지만 어쨌든 차를 구할 수 있는 건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읍내나 성읍까지 가야 할 판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운현은 작은 차 주머니를 받아들고 은자를 건넸다.
“고맙네.”
돈을 주머니에 넣은 다루 주인은 다시 천을 들어 탁자를 닦기 시작했다.
“저…….”
“왜?”
다루 주인이 돌아보자 운현이 물었다.
“이 용정차를 미리 들여 놓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가능하면 많이……”
운현의 손에 든 차 주머니는 작았다.
몇 번 우려내면 끝날 분량이다.
“그건 안 되네.”
주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용정차는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아무래도 비싸니까. 만일 자네가 안 사면 그 재고를 내가 전부 떠안아야 하는데, 나더러 망하란 말인가?”
난향 다루는 작다.
사실 등봉현 같은 작은 마을에 다루가 있는 것도 의외일 정도다.
그러니 주인의 말은 틀린 데가 없었다.
“그러면 제가 다 살 테니 우선 한 근 정도만…….”
“예끼, 이 사람.”
다루 주인은 손을 멈추고 운현을 돌아보았다.
“한 근이라니? 용정이 어디 그리 흔한 줄 아나? 그나마 구한 것도 다행이니 그리 알고 어서 가 보게.”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운현은 별로 미덥지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은 운현이 올 때마다 용정차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조금씩만 말이다.
하지만 다루 주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탁자를 닦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운현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조심해서 가게.”
따랑.
운현과 독고랑이 나가자 작은 종이 다시 소리를 내었다.
작은 다루에 울려 퍼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주인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자네는 다행인 줄 알게.”
탁자를 문지르며 주인이 중얼거렸다.
“예전 그 녀석은 괜히 경공술을 쓰는 바람에 저 먼 도시까지 뛰어다녀야 했으니까.”
다루 주인은 천은 놓고 허리를 폈다.
“아구구. 아침부터 용정차 이야기를 했더니 갑자기 차가 마시고 싶군. 용정 남은 게 어딨더라?”
다루 주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작은 다루에 용정차의 향기가 가득 퍼졌지만 이미 등봉현을 벗어난 운현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
운현은 심심했다.
와불의 초막은 불편했지만 그것도 처음 뿐이었다.
본래 호사스러운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 운현은 와불의 초막에 빠르게 적응했다.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야 했지만 본래 운현에겐 익숙한 일이고, 매일 하는 청소라고 해 봐야 작은 초막 주변 정도다.
늙은 와불은 청소나 차 심부름 정도만 시켰을 뿐, 공양을 받아 오는 것이나 빨래 같은 것은 스스로 했다.
그러니 이 작은 초막에서 운현이 할 일은 그저 ‘대환단’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라, 자연히 심심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읽을 만한 책도 없고……. 수련이라도 해 볼까?’
운현이 그런 생각이 든 건 당연했다.
사실은 진작부터 수련이 하고 싶었지만 집 주인인 와불의 눈치가 보였다.
슥.
운현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늙은 와불은 마당에 내놓은 평상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독고랑은 언제나처럼 저만치 서서 주위를 살핀다.
아무것도 없는 초막 주변에 대체 무슨 위험이 있다고 저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뭐 할 줄 아는 거 없냐?”
문득 들린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차를 홀짝이던 와불이 운현을 향해 묻고 있었다.
“네?”
“먹고살려면 재주 한두 가지쯤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 너는 무슨 재주로 먹고사는가 이 말이다.”
“저는 그냥 서기입니다만.”
“그건 네 일이지 네 재주는 아니잖아. 재주가 뭐냐고.”
‘어…….’
운현은 잠시 당황했다.
“글을 좀 압니다.”
“글은 나도 안다. 그리고?”
“시가나 서화도 조금은 할 줄 압니다만…….”
와불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나더러 시커먼 사내 놈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라고?”
시가를 한다는 건 노래를 짓는다는 뜻이지 반드시 부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운현은 시커멓지 않다. 따지자면 오히려 와불이 더 검을 것이다.
하지만 운현은 말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의 시가는 별로 재미 없을 테니까.
“그럼 역사적인 사건이나 학문적인 주제에 대한 토론이라든가…….”
와불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운현은 얼른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검도 좀 압니다.”
“검?”
와불이 흥미를 보였다.
“네.”
“흠, 검이라…….”
운현은 와불이 사뭇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이곳은 다름 아닌 천하 무공의 본산 소림사 아닌가?
와불 역시, 겉으로는 도저히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신승 불영의 스승이고 말이다.
“취미냐?”
“네?”
이번엔 운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가끔 선비란 것들도 검을 익히잖느냐? 내심 무(武)를 업신여기면서도 자신이 뭐라도 된 듯 칼을 들고…….”
“아닙니다.”
운현의 목소리가 와불의 말을 끊었다.
“저는 결코 취미로 검을 익히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는 운현의 눈빛은 단호했다.
어찌 운현에게 취미일 수가 있으랴?
그로 인해 의형 일충현과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고, 언젠가 스쳐 지나듯 맛보았던 꿈결 같은 경지, 그 한 자락이 이토록 가슴속에 선명히 살아 있는데 말이다.
“그래?”
와불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헌데 여기 와선 한 번도 안 했잖냐?”
그건 당연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운현에겐 흡사 질책이나 추궁처럼 들렸다.
취미가 아니라면 어째서 한 번도 수련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게, 이곳은 제 거처도 아니고…….”
허름한 초막일지라도 이곳은 소림사다.
손님으로서 주인의 눈치가 보일 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아닌 ‘소림사’에서 수련을 하는 건 아무래도 주저될 수밖에 없었다.
“해도 된다.”
문득 들려온 말에 운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달칵.
와불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하고 싶다는데 누가 그걸 말리겠느냐? 취미 같은 게 아니라 진심으로 원한다면 말이다.”
“네. 원합니다.”
운현은 얼른 대답했다.
“진심으로, 정말로 하고 싶습니다.”
혹여 와불의 마음이 바뀔까 두려운 운현의 표정에 와불이 다시 웃었다.
“그렇다면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 어차피 여긴 아무도 오지 않는 데다가.”
문득 독고랑을 보며 와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놈 눈초리가 무서워서 훔쳐보는 것들도 없을 테니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운현은 의아했다.
하지만 어쨌든 확실한 건 수련해도 된다는 점이다.
초막의 주인이자 소림 전대 대조사인 와불로부터 직접 허락을 얻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선사님.”
운현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하다는 말은 한 점 거짓없는 진심이었다.
와불도 기분이 좋은지 주름진 얼굴로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 그럼 말이 나온 김에 한번 해 봐라.”
“네? 지금요?”
“그럼 언제 하려고? 나 죽고 나서?”
와불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죄 지은 것도 아닌데 뭘 숨기고 그래? 어차피 보여 줄 거 지금 보여 준다고 어디 닳기라도 하냐? 괜히 쓸데없는 자존심은……, 쯧쯧.”
어차피 보여 줄 거라는 와불의 지적은 옳았다.
이 좁은 초막에서 수련을 한다면 결국 와불의 눈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도 운현은 주저했다.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와불 앞에서 수련을 해도 되는 걸까?
“뭐, 싫으면 말고.”
운현이 주저하자 와불은 휙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이 운현에겐 꼭 ‘대환단을 받기 싫으면’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아닙니다.”
운현은 즉시 말했다.
“지금 하겠습니다.”
와불은 씨익 웃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눈을 빛내며 와불은 다시 운현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와불의 눈동자는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긴 어린아이의 눈빛, 바로 그것이었다.
자박.
운현은 초막 앞 공터에 섰다.
손에 검은 없었다.
목검은 방에 있었지만 운현의 수련은 검이 필요없다.
후루룩.
와불이 차를 마시는 소리가 울렸다.
운현은 문득 실소를 머금었다.
‘소리 내시는 건 똑같네.’
와룡헌에 있던 신승 불영도 차를 마실 때면 꼭 소리를 냈다.
어쩌면 그 버릇은 와불에게서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운현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쏴아아.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함께 여러가지 생각도, 온갖 감정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자신이 소림의 외진 초막 앞에 서 있다는 것도 잊었다.
와불의 차 마시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웅.
오직 세상에 가득한 것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한 자루의 검과, 그 앞에 선 운현 자신뿐이었다.
드디어 만난 오랜 지기와 같은 자신의 검을 향해 운현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사락.
누구도 볼 수 없는 검.
그렇기에 오직 운현만 아는, 자신만의 검.
그 검을 손에 쥐었을 때 운현의 입가엔 자신도 모르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후웅.
바람이 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바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운현은 알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가득한 것은 하늘과 땅을 메운 자신의 검, 그 한 자루뿐이었으니까.
후우우웅.
소림사의 외진 초막.
그곳에서 백호수련검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후룩.
문득 들린 와불의 차 마시는 소리에 운현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이제 끝난 거냐?”
“아, 네.”
운현은 와불에게 대답하며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눈앞에 가득하던 검은 이미 사라지고 남은 것은 잔잔한 여운과 가벼운 떨림뿐이었다.
‘오랜만이군. 이렇게 마음껏 수련을 한 건.’
자신의 텅 빈 손을 내려다보며 운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깊이 수련에 전념해 본 것은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운현은 이곳에 와불과 자신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슥.
숨을 고르며 운현은 고개를 슬쩍 돌려 독고랑을 보았다.
독고랑은 여전히 그곳에 서 있었다.
하지만 주위를 경계하던 독고랑의 시선은 운현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덕분에 운현은 독고랑과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독고랑 같은 고수 앞에서 수련하는 모습을 보였다 생각하니 뒤늦게 쑥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어떻게 보였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큼.”
운현은 다시 헛기침을 하며 슬쩍 독고랑을 쳐다보았다.
독고랑의 표정은 늘 그렇듯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빛나는 눈동자가 은은한 열기를 담고 있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실망이나 아쉬움 같은 건 아니었다.
‘다행이군.’
운현은 안도했다.
적어도 실망을 시키진 않은 듯했다.
그렇게 운현이 내심 안도하고 있던 때였다.
“늑대가 달을 보고 우는 꼴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