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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48화 (148/530)

148화. 무림 대회

청소를 마친 운현은 독고랑과 함께 등봉현으로 걸어 내려갔다.

새벽 산길은 나름 정취가 있어서 운현은 오랜만에 느긋한 산책을 만끽할 수 있었다.

물론 무뚝뚝한 독고랑은 그리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니었지만 그저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운현에겐 충분했다.

‘대환단이라.’

운현은 어제 일어났던 일을 천천히 되새겼다.

소림의 대환단이라니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영 대사님도 그렇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다른 것도 아닌 소림의 영약인 대환단이다.

그런 엄청난 물건을 어째서 자신에게, 그것도 말도 없이 떠맡긴단 말인가?

‘그래서 영호준 대협이 업보라고 한 건가?’

생각하던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자신의 항변 같은 건 신승 불영에게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대환단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지? 소림사에서 호위라도 더 붙여 주려나?’

독고랑이 고수긴 하지만 소림의 대환단을 홀로 지키라 할 수는 없다.

소림사의 무승들이라도 호위로 함께 가야 하는 것 아닐까 하고 운현은 생각했다.

그런 운현의 눈앞에 새벽 어스름에 잠긴 등봉현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등봉현 객잔에 도착한 운현은 제법 괜찮은 차를 사서 다시 초막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운현을 맞이한 것은 잔뜩 찌푸린 와불의 주름진 얼굴이었다.

“이게 뭐냐?”

“네?”

차 주머니를 들고 와불을 찾아간 운현은 난데없는 소리를 들었다.

“뭐냐니요? 이건…….”

“킁.”

와불은 코를 울렸다.

“이건 용정차가 아니잖아? 차 하면 당연히 용정이지, 너는 배운 사람이 그런 것도 모르냐?”

“네?”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차에 대한 편견은 둘째치고 그런 건 미리 말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원하시는 게 있으시면 진즉…….”

“허어.”

와불은 갑자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 늙은 중이 천 일 단식을 하느라 기가 허해 차를 조금 맛보겠다는데 그것마저 타박을 하는구나. 곧 열반에 들 늙은 중의 사소한 취향 하나 맞춰 주는 게 그리 어렵단 말인가? 허어.”

서글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와불은 눈까지 지긋이 감고 불호를 외웠다.

“이런 자에게 대환단을 내주겠다고 했으니, 나야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우자(愚者)로다.”

“아닙니다.”

스스로 어리석은 자라 통탄하는 와불에게 운현은 얼른 말했다.

“지금 당장 사 오겠습니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이러다 와불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황급히 돌아서는 운현의 등 뒤로 와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향 다루로 가야 할 게야.”

“네?”

운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지긋이 감은 와불은 시침을 뚝 떼고 말했다.

“등봉현 난향 다루로 가야 용정차를 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거기 말고는 파는 데가 없어.”

“아, 네. 감사합니다.”

운현은 급히 발길을 재촉했다.

그 와중에도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천 일 단식을 하신 분치고는 너무 정정하신 거 아닌가? 아니, 사람이 천 일을 단식할 수는 있나?’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운현은 급히 발길을 옮겼다.

독고랑이 경공을 할 줄 알 테니 좀 부탁할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자신이 하겠다고 한 말이 이미 있는지라 곧 포기했다.

독고랑에게 안겨 가는 건 더더욱 입 밖에도 내지 못할 일이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운현은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느긋한 산책 기분 같은 건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

무림맹 대의사청, 소림의 대표자 진허는 사뭇 분노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적에게 대화와 타협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소림의 승려인 진허가 목소리를 높이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 전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을 들었다.

“대사, 진정하시지요. 혁련세가의 뜻은…….”

제갈세가의 제갈연이 침착한 목소리로 중재를 시도했다.

하지만 진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저들은 수적이오! 저들을 벌하지 않고 어찌 강호의 도리가 살아 있다 하겠으며, 무림맹이 강호 무림을 지킨다 말할 수 있겠소이까?”

“무림맹이 강호를 지킨다는 건 둘째치고라도.”

사뭇 낭랑한 목소리가 대의사청 안에 울려 퍼졌다.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제부터 소림이 강호 도리의 기준을 정했는지 모르겠군요. 그런 게 정해지면 다음부터는 제게도 알려 주시겠어요?”

그건 분명한 빈정거림이었다.

당설련은 진허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무림맹이에요.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다른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진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당설련의 지적은 옳았다.

지금 대의사청에 있는 대표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진허의 뜻에 동의하는 자가 없다는 의미다.

속으로 나지막이 불호를 외고, 진허는 말을 이었다.

“소저의 말이 옳소. 허나 세상에는 타협해도 좋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소. 당문은 명문 정파이거늘 어찌 저런 수적들과 한 하늘을 이고 살겠다 하시오?”

진허의 말은 단호했다.

그러나 당설련은 조소를 흘렸다.

“놀랍군요. 언제부터 소림이 우리 당문을 명문 정파로 여기셨나요?”

당문은 독문(毒門)이다.

때문에 정파에서는 그들을 은근히 경원시하여 정사 중간의 위치에 놓고 있었다.

그 행태를 노골적으로 꼬집는 당설련의 지적에 진허는 말문을 열지 못했다.

“우리도 묻고 싶군.”

흑도회의 대표자 열혈도 묵혈엽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림은 명문 정파 외에는 한 하늘을 이고 살지 않겠다는 뜻인가?”

흑도회는 명문 정파가 아니다.

과거 정사대전 당시 사파라 매도된, 신흥 문파의 대표자격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흑도회처럼 스스로 명문 정파라 칭하지 않는 문파가 이 자리에는 적지 않았다.

“그, 그것은…….”

진허 대사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무당파의 대표자 청진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는 장강수로채 연합을 이대로 놔둘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그 대답이라면 이미 나와 있을 텐데요?”

“물론 그대로 놔둘 수는 없소.”

혁련세가의 혁련필이 청진 도사의 말을 받았다.

“다만 문제는 그 수위와 대응방법이오. 적어도 나는, 소림에서 주장하는 전면 토벌에는 동의할 수 없소.”

소림의 진허가 무언가 말하려는데 무당의 청진이 먼저 물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오?”

혁련필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첫째, 명분이 없소. 이번 일은 문파와 문파의 분쟁일 뿐이오. 수로채 연합은 무림맹과 적대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지 않소?”

“그건 수적들의 수작이오!”

소림의 진허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러나 혁련필은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둘째, 때가 좋지 않소. 수로채 연합은 그 수가 많으며 장강 전역에 산재하고 있소. 지금 그들과 전면전을 벌인다면 오랜 기간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게요.”

“그리고? 또 있소?”

무당의 청진이 인내심을 발휘하며 물었다.

“셋째로 배후가 너무 불분명하오.”

혁련필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강수로채 연합은 겉으로 드러난 일부분일 뿐이오. 우리가 보았듯이 암천무제의 무위는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소. 이런 상황에서 전면적인 토벌에 나서는 건 경솔한 결정이오.”

“흥. 그사이 혁련세가가 장강에서 큰 이득을 볼 수 있음은 어찌 말씀하지 않으시오?”

소림사의 대표자 진허의 말에 혁련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러나 진허는 멈추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몰락으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곳이 바로 혁련세가 아니오? 장강수로채 연합은 이제 막 결성된 데다 무림맹과 적대하지 않겠다 했으니, 이 기회에 혁련세가가 장강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 아니오?”

“진허 대사!”

“그것만이 아니오!”

혁련필의 말을 막으며 진허 대사는 외치듯 말했다.

“이런저런 이유들을 들고 있으나 결국은 상황과 형편을 보아 처신하겠다는 뜻이 아니오? 강호의 도리를 저버리고 이득만을 좇는다면 어찌…….”

진허 대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목까지 치밀어 오른 ‘명문 정파’란 단어를 간신히 다른 말로 바꾸었다.

“무림맹의 십팔대 문파라 할 수 있겠소!”

허나 본래 그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림맹 대의사청의 분위기는 다시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제갈세가의 제갈연은 이럴 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제갈연이 말했다.

“잠시 휴회하겠습니다.”

휴회는 회의를 잠깐 쉰다는 의미다.

그러나 진짜로 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 문파들 간의 막후 교섭이 치열하게 전개될 테니까.

***

“여기서 뭐 하는 건가요?”

누각 이 층에서 차를 마시던 매화검 영호준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당문의 눈꽃, 당설련이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호준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당문설화라는 명호가 말해 주듯 그런 모습조차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영호준은 찬사 대신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항상 내가 곤란할 때만 나타나는군.”

당설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곤란하다고요?”

영호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지금은 은수저가 없거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당설련은 금방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재미없는 농담에 답하는 대신, 당설련은 영호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락.

“으음.”

영호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이 이렇게 가까이 앉으면 내가 좀 곤란해지는데?”

어쩐지 능글맞은 듯한 영호준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당설련은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뭔지는 몰라도 내가 쉽게 답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군.”

“대신 나도 하나를 대답하지요.”

“좋소.”

영호준은 바로 받아들였다.

당설련에게 대답을 듣는 건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니까.

“소림은 결국 어떻게든 문파 소집령을 내릴 작정인가요?”

문파 소집령은 무림맹이 가진 가장 강력한, 그리고 마지막 수단이다.

동시에 그것은 장강수로채 연합을 무림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을 의미했다.

“소림이 그렇게 막 나가는 곳은 아니오. 진허 대사도 무모한 사람이 아니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건 그도 충분히 알고 있소.”

화산의 대표자 영호준은 소림, 무당, 아미와 대단히 친밀하다.

영호준이 그렇게 말한다면 틀림없는 일일 터이다.

“그렇군요.”

당설련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 불의를 참지 못하는 명문 정파들께선 어쩌시기로 했죠? 이대로 참고 있진 않을 텐데요?”

자존심 강하고 명분에 집착하는 그들이 이대로 물러날 리는 없다.

“아, 그게.”

영호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무당의 청진 도사가 제법 괜찮은 계책을 내놔서…….”

“계책요?”

당설련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영호준은 짐짓 못 본 척하며 말을 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강호는 아주 평화로웠소. 심심해서 죽을 정도로 말이오. 그렇지 않소?”

그 말에 당설련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호준은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어떻게든 이름을 떨치고 싶은 피 끓는 젊은이들이 답답해 죽을 지경이 되었지. 별것 아닌 용봉지회가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 뻔하지 않소? 이름을 날릴 수 있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것이 무림인들이니까.”

“그래서 뭘 하려는 거죠?”

당설련이 영호준의 대답을 재촉했다.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림 대회를 열자더군.”

“무림 대회라고요?”

당설련의 눈빛이 흔들렸다.

총명한 그녀는 그 단어가 강호 무림에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단숨에 알아낸 것이다.

“이런!”

한 방 맞은 듯한 표정으로 당설련이 입술을 깨물었다.

영호준은 웃으며 말했다.

“맞소. 아마 단번에 전 무림의 화제가 될 거요. 다른 곳도 아닌 무림맹에서 여는 천하무림대회이니,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소?”

이것은 분명 기회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싶은 무인이라면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

“그리고 장강수로채 연합은 당연히 긴장하게 될 테고 말이오.”

이런 시기에 무림 대회를 연다면 누구라도 그 의도를 짐작할 것이다.

무림맹과 수로채 연합 사이의 긴장은 단숨에 높아질 게 분명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림대회 우승자가 수로채 토벌의 선봉에 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소림의 진허 대사가 아주 감동적인 표정을 짓더군. 문파 소집령 따위보다는 훨씬 더 자연스러운 방법 아니오? 내가 생각해 봐도…….”

달칵.

당설련은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 나도 묻고 싶은 것이…….”

“다음에요.”

당설련은 짧게 말했다.

영호준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맺은 다른 문파들 간의 밀약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했으니까.

사박, 사박.

당설련은 옷깃을 휘날리며 사라져 버렸다.

“이거 참, 제멋대로인 건 예전부터 전혀 변하질 않는다니까?”

영호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찻잔을 어루만졌지만 차를 마시지는 않았다.

아까 말한 대로 자신에겐 지금 은수저가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누각에서 내려다보이는 무림맹 대의사청을 바라보며 영호준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운 서기는 잘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군.”

어깨를 으쓱하며 영호준은 중얼거렸다.

“힘내시게. 뭐, 얻는 것도 그만큼 클 테니까.’

영호준은 멀리서나마 위로를 전했다.

물론 그런다고 운현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은 영호준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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