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네? 대환단요?
끼이익.
초막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방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늙고 추레한 작은 몸집의 승려였다.
“손님이라고?”
꾀죄죄한 가사를 걸친 늙은 승려가 말했다.
키도 작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그 승려에게 젊은 원광은 정중하게 합장을 했다.
“원광이 전대 대조사님을 뵙습니다.”
‘엑?’
운현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사라는 호칭은 종파를 열었거나 그 종파의 정통 법맥을 이은 선승을 일컫는 말이다.
즉 그가 그 종파의 정수이자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이 초라하고 늙수그레한 승려가 ‘전대 대조사’라니?
고승 특유의 기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얼굴에 검버섯까지 가득하니 운현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원광? 네가?”
와불이라는 그 노승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기억을 못 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가래가 끓는 듯 목을 울렸다.
“카악, 퉤!”
마당에 침을 뱉은 그 늙은 중은 고개를 들어 운현과 독고랑을 보았다.
“그래. 넌 원광이고, 저건 누구냐?”
그 물음에 원광이 정중하게 답했다.
“무림맹에서 오신 손님입니다.”
“무림맹?”
늙은 승려 와불의 표정은 대번에 일그러졌다.
원광이 정중하게 서찰을 건네자 와불은 대충 받아들고는 바로 펼쳤다.
바스락.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자신의 할 일을 마친 원광이 한 손으로 합장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와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원광 역시 배웅이나 인사는 기대도 하지 않은 듯 조용히 초막을 떠났다.
‘어…….’
운현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건 떠나는 원광의 모습이 어쩐지 급히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흐음.”
바스락.
뒤에서 들린 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와불이 서찰을 아무렇게나 접으며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운현이냐?”
“아, 네.”
운현은 그제야 자신이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제가 운현입니다. 그리고…….”
하지만 운현의 인사는 이어지지 못했다.
“강도놈치고는 아주 멀쩡하게 생겼구나.”
“네?”
와불의 말에 운현이 화들짝 놀랐다.
“강도라니요? 제가 왜…….”
운현의 항변은 당연했다.
하지만 와불은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그럼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대환단을 내놓으라는 놈이 강도가 아니고 뭐냐?”
“대, 대환단요?”
운현은 당황스러웠다.
소림의 대환단이라면 운현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무인에겐 엄청난 내력을 갖게 해 준다는 바로 그 전설의 영약이 아닌가?
하지만 갑자기 대환단이라니, 운현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니, 그걸 제가 왜…….”
“왜라니? 넌 이 서찰에 뭐라 적혀 있는지도 몰랐냐?”
운현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와불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불영이 대환단을 보내라더라. 생전 보지도 못한 네 편에 말이다.”
‘아. 그래서…….’
운현은 그제야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초면인 계율원 원주의 표정이 좋지 못했던 것도, 그리고 와불이 이토록 퉁명스럽게 말하는 이유도 말이다.
갑자기 나타나 대환단을 내놓으라면 어느 누가 좋아하랴?
“저 피 묻은 칼처럼 생긴 놈은 뭐냐?”
독고랑에 대한 신선하고도 창의적인 표현에 운현은 내심 감탄했다.
하지만 독고랑이 또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얼른 대답했다.
“제 지인입니다. 이곳까지 저를…….”
“킁.”
운현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와불은 흥미를 잃었다.
와불은 혀를 차며 서찰을 내려다보았다.
“발칙한 놈 같으니. 제자라고 하나 있는 녀석이 툭하면 이거 내놔라, 저거 내놔라. 누가 보면 맡겨 놓은 줄 알겠어. 쯧쯧.”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깜짝 놀랐던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또 다른 의문이 일어났다.
“제자요?”
“그래. 불영 그 녀석 말이다.”
운현은 놀랐다.
신승 불영의 스승이 눈앞에 있는 이 와불이란 말인가?
비범한 기세라곤 단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이 작고 초라한 늙은 승려가?
하지만 와불은 운현이 놀라는 건 상관도 하지 않았다.
“일단 장문인에게 말은 해 둘 테니 너희는 당분간 저 방에서 머물도록 해라.”
“머물다니요?”
운현으로선 당연한 물음이었다.
대환단을 받아 오라 시킨 것도 당황스러운데 갑자기 왜 방에서 머물라는 말이 나온단 말인가?
그러나 와불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대환단을 그리 쉽게 받아 갈 줄 알았더냐? 다 절차와 과정이 있는 법이니 당연히 기다려야지.”
당황한 운현의 모습에 와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 잘하면 해를 넘기진 않을 테니 너무 걱정 말고.”
“해를 넘겨요?”
운현은 어이가 없었다.
그 말은 잘못하면 해를 넘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아닌가?
“안 넘긴다니까?”
와불이 인상을 썼다.
“어쨌든 그리 알고 오늘은 일찍 쉬도록 해라. 먼 길에 피곤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와불은 몸을 돌렸다.
운현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늙은 와불은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에이, 제자 하나 잘못 둬서 말년에 이게 웬 고생인지.”
그렇게 투덜거리며 와불은 방 안으로 사라졌다.
끼익, 쾅.
허름한 방문이 닫혔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운현은 사뭇 당황했지만 와불의 방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허어.”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설명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저 기울어 가는 햇빛만이 운현의 어깨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
와불이 말해 준 방은, 초막의 모습에서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사실 처음엔 무슨 창고인 줄 착각했을 정도였다.
운현은 독고랑과 함께 방을 정리하고 잡동사니에 묻혀 있던 침상을 찾아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침상이 두 개였던 점이다.
독고랑은 처마 아래에서 지내겠다고 했지만 운현으로선 그렇게 둘 수 없었다.
“다시는 제 종복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독고랑에게 말했다.
냉막한 독고랑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그가 불만스러워 한다는 걸 운현은 눈치챌 수 있었다.
“대협께서 어찌 저의 종복이 된다는 말입니까? 그런 말을 하신다면 저는 대협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대협이 아닙니다.”
“어쨌든요.”
운현의 태도는 단호했다.
잠시 말이 없던 독고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주군.”
‘윽.’
상상도 못한 새로운 호칭에 운현은 순간 휘청했다.
주군이라니, 이건 자신을 종복이라 하던 것에 맞먹는 파괴력이었다.
“주군도 안 됩니다.”
운현의 말에 독고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에 표정 변화가 없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반응이었다.
“허나…….”
“차라리 그냥 예전처럼 대인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저도 대협을 독고 제(弟)라고 부를테니까요.”
독고 제라면 독고 동생이라는 뜻이다.
어엿한 성인을 동생이라 부르기 민망하니 나름 격식을 차린 호칭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독고랑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합니다. 제가 어찌 대인께 형제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
“저를 예의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드실 셈입니까?”
비록 나이는 운현이 많다지만 독고랑은 검기발현의 고수다.
강호 무림에 알려진 명성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니 운현이 그를 존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독고랑에겐 그렇지 않았다.
“군신 관계에 어찌 일반적인 예의를 논하겠습니까?”
‘윽.’
운현은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운현은 마지막 배수의 진을 쳤다.
“어쨌든 제가 양보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만일 대협께서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저는.”
운현의 말을 독고랑의 목소리가 끊었다.
“언제든 대인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그 말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언제든 자신의 뜻을 따른다니, 방금 전만 해도 고집을 세우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고랑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가 운현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건 진심일 테니까.
“……나중에 자세한 이야기를 하겠지만.”
한숨을 쉬고 나서 운현은 빙긋 웃었다.
“이렇게 직접 만나니 기쁩니다. 독고 제.”
그건 사실상 자백이나 마찬가지였다.
운현 자신이 서찰을 보낸 창룡검주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독고랑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저도 그렇습니다. 운 대인.”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독고랑은 말했다.
그러나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독고랑의 눈동자는 그의 진심을 그 무엇보다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운현은 웃었다.
비록 당황스러운 하루였지만 지금 운현의 가슴엔 따뜻한 기운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
다음 날 새벽, 운현은 와불의 걸걸한 목소리에 잠을 깼다.
“아직 자고 있냐?”
운현은 얼른 눈을 떴다.
아직 날이 어두운 것을 보니 해도 뜨기 전이다.
무엇보다 운현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편이니, 지금은 새벽도 되기 전이라는 뜻이다.
“아닙니다. 일어났습니다.”
운현은 급히 일어나며 그렇게 말했다.
대환단을 무사히 받아 가려면 와불의 심사를 거스르면 안 된다.
“일어났으면 얼른 나와라. 아직 안 일어난 건 너뿐이니까.”
와불의 목소리에 운현은 옆 침상을 돌아보았다.
자는 줄 알았던 독고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침상이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면 벌써 나간 듯했다.
아니면 아예 자지도 않았거나.
“네, 알겠습니다.”
운현은 대답하며 급히 침구를 정돈하고 옷을 입었다.
끼익.
방문을 나서니 아니나 다를까, 아직 새벽이 밝지도 않았다.
독고랑은 늘 그렇듯 냉막한 표정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아마도 주변을 경계하는 듯했다.
운현은 우선 와불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래.”
작은 체구의 와불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침 공양을 받아 올까요?”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혹시나 해서 운현이 물었다.
“킁. 내 밥은 내가 챙길 테니 네가 신경 쓸 것 없고, 우선 청소나 좀 해라.”
초막 주변은 별로 지저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청소 끝나면 내려가서 차(茶) 좀 사 오고.”
“차요?”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찻값은 나중에 그 괘씸한 제자 놈에게 받을 수 있을게다.”
“아닙니다. 제가 사지요.”
“그래? 그럼 그러든가.”
와불은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덜컹.
방문이 닫히고 운현은 그제야 숨을 돌렸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대인.”
독고랑의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아, 잘 잤소? 독고 제.”
웃는 낯으로 말하던 운현은 문득 자신이 얼굴도 씻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찍 일어났나 보오? 난 아직 씻지도 못해서…….”
머쓱하게 머리카락을 만지며 운현이 말했다.
하지만 독고랑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제가 다녀올까요?”
무슨 말인가 싶던 운현은 그 말이 ‘차(茶)’에 대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아니, 괜찮소. 그 정도는 내가 해야지. 선사께서 내게 시킨 일이고…….”
씩 웃으며 운현은 말했다.
“그 정도로 대환단을 받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 아니겠소? 하하하.”
운현은 웃었지만 독고랑의 표정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크흠, 그럼 난…….”
헛기침을 한 운현은 얼른 얼굴을 씻기 위해 몸을 돌렸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바람은 제법 찼지만 운현에겐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서생 시절에도, 황궁 시절에도, 그리고 무림맹 서기인 지금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건 운현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