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전대 대조사 와불
이번엔 모용진도 놀랐다.
그러고 보니 독고랑이 보이지 않았다.
운현이 떠난다면 반드시 나왔을 그 독고랑이 말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뛰어서라도 따라갈 기세길래 말을 내줬어요.”
독고랑은 운현에게 허락 같은 건 구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도 운현과 함께 떠나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운현도, 그리고 모용미도 알 수 있었다.
독고랑이 결코 뜻을 돌이키지 않을 것을 말이다.
“그랬었군.”
놀라던 모용진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상황만 이렇지 않았다면 나도…….”
정말로 아쉽다는 듯 모용진은 말했다.
세가의 대제자라는 책임만 아니었다면, 아니 모용세가가 지금처럼 바쁘지만 않았어도 기꺼이 운현을 따라갔을 것이다.
“이해를 못 하겠네요.”
모용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고독객이나 오라버니나 왜 운 학사님 같은 분을 좋아하는 거예요? 오라버니는 협객이나 영웅을 선망하지 않았나요?”
모용진은 빙긋 웃었다.
운현 특유의 그 고고하면서도 따뜻한 성정을 말해 주는 대신, 모용진은 동생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운 대인을 좋아하느냐?”
“그, 그건.”
모용미는 당황했다.
하지만 총명한 그녀는 얼른 감정을 추스리고 답했다.
“가문의 은인이시니까요.”
그건 당연하고도 분명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모용진은 동생의 뺨이 살짝 붉어진 것과 그녀의 시선이 한순간 흔들린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좋아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은 점도.
“……그렇기야 하지.”
모용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모용미가 운현에게 보여 준 호의가 다분히 개인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언급하지는 않았다.
모용진은 여동생을 배려할 줄 아는 관대한 오라버니였기 때문이다.
“큼.”
모용미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모용진의 흥미진진한 눈빛은 그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갑자기 오라버니에 대한 짜증이 솟아오르는 것을 모용미는 애써 참아야 했다.
***
운현과 독고랑 두 사람이 등봉현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천하오악의 하나로 손꼽히는 숭산의 입구이자 소림사로 가는 길목이지만, 운현의 기대와 달리 등봉현은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시골 마을에 불과했다.
등봉현에서 말을 내린 운현과 독고랑은 마을에 말을 맡기고 소림사를 향해 걸었다.
운현이 산길에서 말을 타는 것이 익숙지 않은 데다가, 유서깊은 소림사에 말을 타고 가는 것이 어쩐지 불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비록 운현이 유학을 배우긴 했으나 불가나 도가를 무시할 생각은 없다.
하물며 천하 무공의 본산이라는 말까지 있는 소림임에야.
‘아.’
한참 동안 걷던 운현이 걸음을 멈췄다.
오래된 산문이 그 위용을 자랑하듯 우뚝 서 있었다.
“이곳이 바로 소림사…….”
운현은 흥미로운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독고랑 역시 소림은 처음인 듯했지만 그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한번 살핀 것이 전부였다.
그 모습에 산문을 지키고 있던 승려가 운현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시주?”
승려는 한 손으로 합장을 하며 물었다.
행동은 정중했지만 승려의 눈빛은 사뭇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아마 그것은 다분히 독고랑의 날카로운 인상 탓이리라.
“아, 네.”
운현은 품에서 얄팍한 서찰을 꺼냈다.
매화검 영호준이 주었던 것이다.
“저는 운현이라 합니다. 이것을…….”
서찰을 내밀던 운현은 말을 흐렸다.
생각해 보니 누구에게 이 서찰을 전하라고 했는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문을 지키는 승려는 이런 일이 익숙했다.
그는 운현의 서찰을 받아 산문에 있던 또 다른, 나이 많은 승려에게 전했다.
산문을 책임지는 듯한 그 승려는 곧 서찰을 열었다.
바스락.
안에는 짧은 글과 함께 또 다른 서찰이 있었다.
그곳에 써 있는 글을 본 나이 많은 승려는 서찰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처음 운현에게 말을 걸었던 승려가 정중하게 말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조용한 곳이군. 아직 산문이라 그런가?’
소림사에 오며 운현은 내심 기대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승려들이 기합을 내지르며 무공을 수련하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런 장관을 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와 보니 소림은 문파 이전에 사찰이었다.
거대한 산문이 소림사의 위용을 알려 주고 있기는 했어도 말이다.
‘그런데.’
운현은 슬쩍 독고랑을 쳐다보았다.
‘고독객은 어디까지 따라올 셈일까?’
독고랑은 허락을 구하지도, 설명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운현을 따라왔을 뿐이다.
우연히 목적지가 같을 가능성은 없었다.
운현도 그 정도 눈치는 있으니까.
문제는 딱히 가라고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이도 아닌데 따라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허락을 구한 적도 없으니 거절할 수도 없다.
그냥 이것이 자신의 당연한 길이라는 듯 독고랑은 운현과 동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운현 역시 독고랑의 동행이 싫지 않았다.
‘혼자보다야 백배 낫지.’
독고랑은 말이 없다.
그러나 믿을 만한 사람과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운현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운현도 지금까지 무어라 하지 않은 것이다.
‘뭐, 알아서 하겠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는 고독객 독고랑이니까.
탁, 탁, 탁.
그사이, 안에 들어갔던 늙은 승려가 바쁜 걸음으로 돌아왔다.
그는 운현에게 다가와 한 손으로 합장을 하며 말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아, 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려의 뒤를 산문으로 들어섰다.
독고랑 역시 당연하다는 듯 운현을 따랐다.
짧은 산골의 해가 벌써 기울어지며 그들의 뒤로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
소림사는 운현의 생각보다 크고 번잡했다.
참배객으로 붐비는 경내를 지나 운현이 도착한 곳은 사람이 뜸한, 크고 고색창연한 사찰 건물이었다.
그 안에 들어서자 사뭇 화려한 가사를 입은 노년의 승려가 상좌에 앉아 운현을 맞이했다.
노승려는 이미 운현이 전한 서찰을 들고 있었다.
바스락.
한참 서찰을 쳐다보던 노승려가 운현에게 물었다.
“무림맹에서 오셨다 하셨소?”
“네. 그렇습니다.”
운현은 정중하게 답했다.
그가 제법 높은 지위의 승려라는 건 운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건 그가 노승이라거나 화려한 가사를 입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의 전신에서 풍겨나는 기세 때문이었다.
노련하게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노승려의 기세는 무림맹에서도 보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노승려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으음.”
노승려는 운현의 서찰을 들고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혹시 이 서찰의 내용을 알고 계시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모릅니다.”
그건 운현도 궁금했다.
대체 저 얄팍한 서찰에 무엇이 써 있기에 이렇듯 노골적으로 불편한 표정을 하는 것일까?
“같이 온 저 시주는 누구시오?”
노승려가 운현 뒤에 서 있는 독고랑을 보며 물었다.
“아, 그는…….”
운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명호를 말하는 것이야 어려울 게 없지만 무슨 관계라고 말해야 하나 싶었던 것이다.
그냥 멋대로 따라왔다고 매정하게 말하기엔 이미 독고랑이 남 같지 않은 운현이 주저하던 때였다.
독고랑이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이분의 종복이다.”
‘헉!’
운현은 깜짝 놀랐다.
종복이라니,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선언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없거니와, 고독객 독고랑 같은 고수더러 종복이라고 하는 건 엄청난 모욕이다.
“그게 아니라 제 지인입니다. 지인요.”
운현은 얼른 말했다.
“저를 걱정해서 함께 와 주었습니다. 세, 세상이 하도 험하다 보니……. 하하하.”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운현은 독고랑을 돌아보았다.
독고랑은 늘 그렇듯 냉막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 더 이상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노승려도 다시 묻지 않았다.
독고랑의 기세가 호위에 걸맞았을뿐더러, 지금은 독고랑의 정체보다 서찰에 적힌 내용이 더 중대했기 때문이다.
바스락.
“……끄응.”
서찰을 노려보는 노승려의 신음은 더욱 노골적이 되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치고 한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고민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쯤 되니 운현의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이런 고위 승려조차 갈등하게 만드는 내용이 대체 무엇일까?
하지만 물어볼 만한 분위기도 아니다.
“후우.”
결국 노승려는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 원광 있느냐?”
“네.”
달칵.
문이 열리며 한 젊은 승려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분들을…….”
노승려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선사께 안내해 드리도록 해라.”
“선사라 하시면…….”
선사는 일반적인 승려의 호칭이기도 하다.
원광이라는 승려가 반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노승려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대 대조사님 말이다.”
“네?”
이번에는 원광이라는 승려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하지만 잔뜩 일그러진 노승려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
운현은 원광이라는 젊은 승려를 따라갔다.
예상과 달리 원광이 향한 길은 좁은 산길이었다.
소림이 처음인 운현이라도 소림사 경내와 멀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벅, 저벅.
뒤에서 독고랑이 말없이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운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종복이라니.’
아마도 그건 그가 말했던 ‘은혜를 갚는다’는 선언 때문이리라.
하지만 운현에겐 곤란한 일이다.
검기발현의 고수더러 종복이라니, 남이 오해하는 건 둘째치고 스스로 과분한 일이라 얼굴이 뜨듯해질 정도다.
‘나중에 조용히 이야기를 해야겠군.’
운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앞서 걷는 승려에게 물었다.
“전대 대조사께서는 경내에 계시지 않는 모양이지요?”
“그렇습니다.”
원광이라는 승려는 순순히 대답했다.
아직 젊어서 그런지 그의 눈에는 운현이나 독고랑에 대한 흥미가 완연했다.
“저, 실례지만 시주께서는.”
운현을 힐끔힐끔 돌아보던 원광이 결국 입을 열었다.
“무림맹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계십니까?”
‘아.’
운현은 원광의 흥미가 무림맹 때문임을 알았다.
아마도 아까 운현과 고위 승려의 대화를 들었으리라.
“저는 무림맹 서기입니다.”
“서기요?”
“네.”
“아……, 그러시군요.”
원광은 실망을 숨기지 않았다.
무림맹에서 온 손님이니 무언가 대단한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독고랑 같은, 물론 원광은 그의 정체를 모르겠지만, 강렬한 인상을 가진 호위를 두고 있으니 말이다.
“전대 대조사께서 계신 곳은 아직 멀었습니까?”
“거의 다 왔습니다.”
원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름한 초막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소림의 고색창연한 건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지만 운현은 어쩐지 친근감을 느꼈다.
‘아, 그러고 보니.’
운현은 친근감의 이유를 금방 알아차렸다.
외양은 전혀 다르지만 어쩐지 무림맹의 와룡헌, 신승 불영이 거처하던 그곳과 비슷했던 것이다.
“와불께서는 이곳에 계십니다.”
‘와불?’
그가 바로 고위 승려가 말하던 전대 대조사인 듯했다.
그때 문득 초막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원광은 한 손으로 합장을 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계율원 원주의 명으로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운현은 그제야 아까 그 고위 승려가 계율원 원주라는 것을 알았다.
‘아, 그래서.’
계율원이라면 승려의 행실에 대해 감독하는 곳이다.
말하자면 소림의 사법기관 같은 곳이니, 원주가 그런 기세를 가지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좀 잘 봐 둘걸.’
어쩌면 그 노승려는 운현의 생각보다 더 고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것이 새삼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운현의 생각은 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