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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45화 (145/530)

145화. 떠나는 사람들

운현은 순간 말을 잊었다.

‘어…….’

그건 분명 호의의 말이리라.

불빛에 비치는 모용미의 뺨이 살짝 붉어진 것을 보면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한창때의 아가씨가, 그것도 모용미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이런 말을 하는 걸 운현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 저기…….”

“그, 그러면 무림맹으로 돌아가시나요?”

어색한 침묵을 깨려는 듯 모용미가 말했다.

그녀 역시 이런 일엔 서툴렀기 때문이다.

“아, 네.”

운현은 얼른 웃으며 답했다.

“신세가 이러한지라 돌아갈 곳이 거기밖엔 없군요. 하하하.”

과장되이 웃은 건 당황한 심정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모용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길지 않았다.

슥.

“혹시.”

고개를 들고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모용미가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였다.

“갈 곳이 없으시면 모용세가로 오세요.”

모용미는 빙긋 웃었다.

“운 학사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요.”

그녀의 웃음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말에 담긴 정은 그보다 더 따뜻해서, 운현은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았다.

“……네.”

살짝 목이 메인 음성으로 운현은 답했다.

조금 전 모용미가 ‘운 학사’라고 부른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슥.

운현은 두 손을 모으고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진심을 담아 운현은 말했다.

정중한 예는 운현이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는 최대한의 방법이었다.

사락.

모용미 역시 고개를 숙여 운현의 예에 답했다.

차가운 밤기운이 사방에 내려앉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따뜻하기만 했다.

***

깊은 밤, 운현을 기다리던 사람은 모용미 외에도 또 있었다.

“네? 뭐라고요?”

운현은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하지만 영호준은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쯧쯧, 그런 반응은 좋지 않소. 운 서기.”

영호준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못 들은 척하는 건 일종의 반칙이라오. 잘못 썼다가는 무시했다고 오히려 여자에게 미움이나 사기 마련이지.”

“아니, 그게 아니라…….”

엉뚱한 대답에 운현이 다시 묻자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얼굴만큼은 서호 최고의 미남인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운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물론 운 서기께서 소림에 가는 건 당설련 소저에겐 비밀이오.”

슬쩍 좌우를 살피고 나서 영호준은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는 속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거든. 이 일이 들통나면 운 서기께서도 차를 마실 때마다 은수저가 필요하게 될 거요. 나처럼 말이오.”

당문의 눈꽃 당설련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한다는 끔찍한 일을 영호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좋게 생각하시오. 이 기회에 소림을 구경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소? 아, 혹시 가 본 적 있소?”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잘됐군. 아무튼 이것도 운 서기의 업보려니 생각하고 수고해 주시오. 소림에 보여 줄 서찰은 여기 있소.”

‘업보라니?’

그사이 영호준은 서찰을 내밀었다.

운현은 무심결에 그 서찰을 받아 들었다.

바스락.

무슨 영문인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조사단이 모두 무림맹으로 귀환하는데 왜 운현만 홀로 소림에 가야 하는지, 그것이 어째서 당설련을 속이는 것이 되는지도 말이다.

이해한 것은 이 일을 당설련에게 들키면 은수저가 필요하게 된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조사단의 책임자인 영호준의 업무명령이라는 것도.

“오늘 밤이라도 얼른 떠나는 것이 좋을 거요. 자, 그럼 살아서 봅시다.”

어쩐지 무시무시한 인사를 자연스럽게 건네며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그러곤 운현이 무어라 할 사이도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여, 영호준 대협!”

운현이 불렀지만 영호준은 그저 한 손을 휘휘 저어 보일 뿐이었다.

순식간에 홀로 남은 운현은 손에 든 서찰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소림사에 다녀오라고? 그것도 혼자서?”

바스락.

얄팍한 서찰이 운현의 손안에서 가볍게 소리를 냈다.

***

다음 날 아침, 매화검 영호준은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단천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그간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관일검 모용단천은 넉넉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모용세가 역시 무림맹의 일원이니 조사단에 협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마시게.”

그것은 말처럼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무림맹 조사단이 버티고 있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관일검 모용단천의 얼굴에 그런 감정은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매화검 영호준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모용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영호준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관일검 모용단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맹에서 뵐지도 모르겠군요. 그때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알 듯 말 듯 한 말이었지만 관일검 모용단천은 그의 말에 그저 웃음으로만 답할 뿐이었다.

가주와 인사를 마친 매화검 영호준은 밖으로 나왔다.

떠날 준비를 마친 조사단 일행을 돌아보며 영호준이 물었다.

“자, 그럼 떠날 준비는 다 됐나?”

“준비가 안 된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당설련의 날 선 음성에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저 물어본 것뿐인데 뭘 그리 화를 내시오?”

그러나 당설련의 목소리는 전혀 누그러들지 않았다.

“벌써 해가 중천이니까요. 대체 왜 이렇게 늦장을 부리는 거지요? 조금만 서둘렀어도 벌써 출발했을 거예요.”

그녀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당연했다.

장강에서 큰일이 벌어졌으니 하루라도 빨리 무림맹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도 무림맹에서 어떤 논의가, 혹은 밀담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리 서둘지 마시오.”

매화검 영호준은 고개를 돌려 모용세가를 둘러보았다.

“모용세가에서 이런 과분한 대접을 받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르니까.”

당설련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혹시 모르잖소? 모용세가에서 무림맹에 대표자를 보내게 될지도. 그리되면 이런 대접은 바랄 수 없겠지.”

“말도 안 돼요.”

당설련은 코웃음을 쳤다.

“무림맹이 창설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새로 대표를 보낸 문파는 없었어요. 대표자를 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십팔대 문파뿐이에요.”

무림맹에 대표자를 파견하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한 성의 패자를 넘어 강호 무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파로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지난 수십 년간 무림맹에 새로 대표자를 파견할 수 있었던 문파는 없었다.

아마 백 년이 지나도 그런 문파는 없으리라는 것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이니, 당설련의 확신은 결코 도가 넘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무림맹이 이리도 재미가 없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영호준은 말에 올라탔다.

휙, 턱.

“자, 그만 갑시다. 불청객은 빨리 없어져 주는 것이 예의니까.”

영호준이 고삐를 틀어쥐며 막 움직이려는 때였다.

“잠깐.”

당설련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운 서기는 어디 있지요?”

“응? 없소?”

“아침부터 전혀 보이지 않아요.”

영호준을 똑바로 쳐다보며 당설련이 말했다.

그건 추궁의 의미였지만 영호준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렇소? 하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는데…….”

어깨를 으쓱하며 영호준이 말을 이었다.

“그냥 놔두고 갑시다.”

“네?”

이번엔 당설련이라도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영호준은 언제나 그렇듯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우리가 그의 행동을 강제할 수는 없는 일 아니오?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고, 서기를 하고 싶으면 하고.”

영호준은 혀를 찼다.

“……정말 부러운 사람이라니까.”

당설련은 영호준의 말을 귓가로 흘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아침부터 보이지 않던 운현의 모습이 지금이라고 나타날 리는 없다.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녀가 본 운현은 영호준의 말처럼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영호준이 모른다고 시침을 떼니 더 이상 알아낼 방법이 없다.

‘할아버님의 말씀도 도무지 알 수가 없고…….’

그날 철정산에서 독선은 당설련의 부탁대로 운현을 만났다.

그러나 그 후에 독선이 그녀에게 한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그가 책임을 지는 것을 보아야겠다.

그리고 독선은 입을 다물었다.

당설련조차 그 이상 다른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예 운현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자, 얼른 갑시다.”

매화검 영호준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당문설화 당설련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성의 후계다.

그의 행방을 놓치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계속 지체할 수도 없다.

‘어차피.’

당설련은 나지막이 혀를 찼다.

매화검 영호준이 무언가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능글맞은 표정을 할 리 없다는 걸, 당설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당설련이 말했다.

그렇게 무림맹 조사단은 모용세가를 떠났다.

***

떠나는 무림맹 조사단을 배웅한 사람은 대제자 모용진과 외당 당주 모용미였다.

멀어져 가는 조사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모용미는 조용히 말했다.

“오라버니, 그만 두리번거리세요.”

“어, 하지만.”

대제자 모용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운 대인께선 안 보이시지 않느냐?”

“운 학사님은.”

살짝 한숨을 쉬고 모용미는 말했다.

“어젯밤에 먼저 떠나셨어요.”

“뭐?”

모용진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모용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무림맹의 일로 소림에 가신다 하더군요.”

“소림?”

모용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난데없이 소림에, 그것도 혼자 떠났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방금 생겨난 궁금증이 모용진에겐 더 중요했다.

“헌데 너는 그걸 어떻게…….”

오라버니의 의혹이 쓸데없는 추측으로 번지기 전에 모용미는 얼른 답했다.

아무 일도 아닌 듯 최대한 담담하게.

“어젯밤에 찾아오셨더군요. 무림맹의 일로 소림에 가야 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하시면서요.”

운현은 말 한 필과 소림까지 가는 길을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모용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즉시 운현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주었다.

가주 모용단천에게 알려 허락을 얻은 것도 물론이었다.

“급히 떠나시느라 오라버니께 알리진 못했어요. 미안하다고, 꼭 다시 들르겠다고 전해 달라 하시더군요.”

“그, 그래?”

일목요연한 모용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모용진은 여전히 궁금한 것이 남아 있었다.

왜 운현은 모용진 자신이 아니라 모용미에게 부탁했을까?

그것도 그 늦은 밤에 말이다.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세요.”

모용미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연무장에서 잠깐 뵈었었기에 제가 깨어 있는 걸 알고 계셨기 때문이니까요. 마침 상아도 함께 있었고요.”

운현을 배웅한 사람은 모용미만이 아니었다.

때마침 언니를 찾아온, 잠이 안 온다며 어리광을 부리던 모용상아도 운현을 배웅할 수 있었다.

“아, 그렇구나.”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그렇게 허물없이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가까워졌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짐이 무거운 동생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아, 그리고.”

모용미는 나지막이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독고랑 대협도 함께 떠났어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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