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저도요
마지막은 고진철의 차례였다.
동료들에게 양보하고 가장 나중에 찾아온 고진철에게 운현은 성실하게 조언을 건넸다.
“여기까지입니다.”
운현은 문장을 마무리하며 말했다.
젊은 제자들에게 적어 준 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각 사람의 장점과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어떤 방향으로 수련을 할 것인지 요약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젊은 제자들에겐 천금보다 소중한 충고가 아닐 수 없었다.
바로 그 ‘방향’을 찾지 못해 헤매는 무인들이 천하에 허다하니 말이다.
“오늘처럼 하신다면 제가 없더라도 큰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네?”
고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운현의 말을 끊은 셈이 되었지만 그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세가를 떠나십니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르면 내일이라도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아.”
고진철은 탄식을 흘렸다.
“아쉽습니다. 이제 겨우 사흘, 아니 이틀이 되었을 뿐인데.”
운현의 검을 본 날까지 합해야 겨우 사흘이다.
고진철이 아쉬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뜻을 품은 선비는 삼 일이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한다[刮目相對]고 합니다.”
운현은 위로하듯 말했다.
“뜻을 품은 무인으로서 사흘이 지났는데 어찌 겨우라고 하십니까? 이미 여러분은 충분히 괄목상대(刮目相對)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여러분을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고진철은 운현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떠나신다고요?”
뒤에서 다른 제자가 말했다.
고진철의 놀란 목소리가 그들에게도 들린 모양이었다.
어느새 모여든 젊은 제자들은 다들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쉽군요.”
“허나 어쩔 수 없지. 대인께선 한가한 분이 아니시니까.”
“그래. 며칠간 봐주신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사실 한가한 운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다 문득 한 제자가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주루에서 송별연이라도 열어야 하는 것 아닌가?”
몇몇 사람들의 표정이 환해지는데 운현이 얼른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현재 공무 중이라 술은 불가합니다.”
그건 운현으로선 당연한 말이었다.
조사단의 일원으로서 무림맹에 복귀하기 전까지는 엄연히 공무 중인 것이다.
“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제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는데 운현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수련을 보여 주시는 건 어떨까요? 아,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아닙니다.”
고진철은 단호하게 말했다.
“대인께서 보고자 하시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슥.
몸을 일으킨 고진철이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정렬하자! 대인께 보여 드리는 마지막 수련이다!”
그 우렁찬 목소리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모용미의 귓가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모용미는 고개를 들어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응?’
고진철이 ‘마지막 수련’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용미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또 하려고?’
이미 늦은 시간이었지만 젊은 제자들은 질서 정연하게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금방 끝날 것이라던 운현의 말과는 다른 그 모습에 모용미는 의아해했다.
하지만 모용미는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마침 잘됐네.’
겨우 며칠로 제자들이 얼마나 변했을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가주인 모용단천은 천운이라며 기뻐했지만 과연 그럴까?
연무장에 정렬한 젊은 제자들을 모용미는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제일 검, 정검!”
그것은 이미 모용미에게도 익숙한 기본 검식이었다.
조금 기대하고 있던 모용미는 살짝 실망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겨우 며칠이다.
미숙한 젊은 제자들이 놀라운 검식이라도 펼쳐 낸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
“발검(拔劍)!”
창.
고진철의 외침에 연무장을 메운 제자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그 소리가 모용미의 귀에 유난히 청명하게 들렸다.
“정검 제일식!”
연무장 가득 긴장이 넘쳐흘렀다.
팽팽한 그 긴장은 떨어져 있는 모용미에게까지 넘실거리며 흘러왔다.
“정검앙천!”
쉬익.
그것은 그저 검을 위로 휘두르는 더없이 단순한 검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모용미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은 결코 단순한 검식이라 말할 수 없었다.
수십 개의 칼날이 마치 단 한 자루의 검처럼 동시에 하늘을 향해 호를 그렸기 때문이다.
단 한 치의 오차조차도 없는, 그야말로 예리한 칼날처럼 단호한 검로.
수 십 개의 칼날이 일제히 솟아오르며 흩뿌리는 그 검광에 모용미는 오싹 한기를 느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쿠웅.
젊은 제자들이 발을 구르자 연무장이 육중하게 울렸다.
그리고 뒤이어 엄청난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아아!”
‘윽.’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감싸 안았다.
팔에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이, 이건…….’
모용미 역시 무가의 딸이다.
대제자 모용진에는 미치지 못했어도 그녀 역시 가문의 검법을 오랫동안 수련해 왔다.
무공에 대한 안목도 있고 실전 또한 두렵지 않다.
그런데 지금 그런 모용미를, 미숙하다 여겼던 젊은 제자들의 검식이 경악케 하고 있었다.
쉬익.
동시에 움직이는 수십의 칼날.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한꺼번에 서고, 일시에 베어 가는 칼날들이 모용미의 시선을 온통 사로잡았다.
대단한 내력도, 엄청난 초식도 아니다.
그러나 통일된 집단만이 뿜어낼 수 있는 위력이, 지금 모용미를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건.’
그 어느 무가에서도, 심지어 무림맹에서도 이런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것은 모용미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던, 제대로 훈련된 집단이 가진 진짜 힘이었다.
쿵.
“하아!”
또 한 번의 둔중한 충격과 함께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용미는 팔을 감싸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에 닿는 그녀의 팔에는 소름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
젊은 제자들의 검식이 끝났다.
그러나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뻗어 나간 수십 개의 칼끝은 여전히 힘을 담은 채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운현이 말했다.
그제야 젊은 제자들의 표정에서 긴장이 사라졌다.
“패검!”
고진철의 고함에 제자들은 검을 갈무리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들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한 반짝이는 눈빛들.
그 모습을 마주하며 운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운현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여러분은 모용세가의 제자입니다. 아마도 곧 모용세가의 절기도 배우게 되겠지요.”
말하던 운현이 빙긋 웃었다.
“단언하건대 여러분은 모용세가의 검로에 반하게 될 겁니다. 바로 제가 그랬으니까요.”
젊은 제자들 사이로 미소가 번져 갔다.
절정고수가 모용세가의 검을 칭찬하는 것이 어찌 그들에게 기쁘지 않을까?
동시에 그것은 젊은 제자들에게 명확한 목표와 인식을 제시해 주었다.
세가의 지위나 재물을 얻는 것보다 모용세가의 검을 익히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값진 일이라는 인식을 말이다.
웃는 젊은 제자들을 운현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말했다.
“친구를, 그리고 동료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건 난데없는 말이었지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서로 웃고 있는 젊은 제자들의 모습이 그리운 그때를, 지금은 잃어버린 그날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깨닫지 못할지라도 그들은 여러분의 생각보다 훨씬 소중한 존재니까 말입니다.”
말하는 운현의 목소리에는 회한이 서려 있었다.
그 바람에 젊은 제자들도 사뭇 숙연해졌다.
그런 그들에게 운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또 봅시다.”
그것이 운현의 인사였다.
단에서 내려가려는 운현의 모습에 고진철이 즉시 두 손을 모았다.
“감사합니다! 대인!”
“감사합니다! 대인!”
젊은 제자들의 목소리는 연무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운현도 발을 멈추고 그들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무어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했다.
그랬다간 그만 눈물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예를 표한 운현은 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짧은 인연은 끝났지만, 젊은 제자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연무장을 벗어난 운현은 기다리고 있는 모용미에게 다가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운현은 모용미에게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마음에 두지 마세요.”
모용미는 담담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사이, 연무장에 있던 제자들이 무리를 지어 지나갔다.
운현과 모용미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듯, 제자들은 말없이 고개만 숙여 예를 표하고 지나갔다.
덕분에 운현과 모용미는 잠시 침묵하며 그들을 배웅해야 했다.
“대단하더군요.”
문득 모용미가 말했다.
“네? 무엇이…….”
운현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앞에 가까이 보이는 모용미의 아름다운 옆모습에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신입 제자들의 검식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어요. 겨우 며칠로 무엇이 변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모용미가 운현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운 대인께서는 참으로 대단하시네요.”
“크흠. 아닙니다.”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모용미의 시선을 피했다.
아름다운 아가씨와 이렇듯 가까이에서 대화하는 건 운현에겐 아직도 낯설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저는 그저 제가 배운 대로 알려 주었을 뿐입니다.”
“그래요?”
모용미는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그분 역시 대단한 분이군요.”
그건 어쩌면 그저 예의상 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현은 순간 의형 일충현의 추억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네.”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정말, 대단한 분이셨지요.”
돌이켜보면 그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죽음으로써 충절과 신의를 지키는 일이 어찌 쉬우랴?
그러니 일충현은 무인으로서, 신하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도 참으로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용미는 운현의 대답이 사뭇 의미심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응?’
운현의 어조는 그 ‘가르쳐 준 사람’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듯 느껴졌다.
‘어쩌면…….’
이것은 창룡검주에 대한 커다란 단서일지도 모른다.
모용미는 더 자세히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모용미는 보았다.
운현의 눈동자가 깊은 슬픔과 회한에 젖어 있는 것을.
모용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슥.
모용미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용히 운현의 감정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찌릭, 찌릭.
풀벌레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동안 폐를 끼쳤습니다.”
문득 운현이 말했다.
모용미가 돌아보자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운현이 보였다.
“내일 떠나시나요?”
“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아가 쓸쓸해 하겠네요.”
모용미의 말에 운현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운현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모용미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