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자신의 감정
모용세가의 회의는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다.
가주는 아직 총관과 논의할 것이 남아 있었기에 모용미는 예를 표하고 조용히 집무실을 물러났다.
탁.
집무실 문을 닫고 돌아선 모용미는 오라버니 모용진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오라버니.”
“음, 저기 그게…….”
모용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용미에게 모용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네게 먼저 말해 주지 못해서.”
“뭐가요?”
“운 대인께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 말이다.”
그 말에 모용미는 희미하게 웃었다.
양자로 들어온 모용진은 모용미나 가주 모용단천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자신감을 회복한 후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예전 버릇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런 건…….”
상관 안 한다고 모용미가 말하려던 때였다.
“네가 표정이 변하는 걸 보니 아차 싶더구나. 그 뒤로도 계속 얼굴이 굳어 있었고.”
모용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요?”
“그래.”
오라버니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만, 만일 운 대인께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때를 놓치지 않도록 해라.”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모용진은 말했다.
“이제 이곳을 떠나시면 언제 또 뵐지 모르니까.”
그건 동생을 향한 오라버니의 마음이었다.
모용미는 오라버니가 자신의 눈치를 본다는 생각이 착각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모용진의 충고가, ‘언제 또 볼지 모른다’는 말이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사실이 그녀를 당황하게 했다.
‘……내가 어째서?’
별다른 감정이나 생각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자신이 동요하는지 모용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모용미에게 오라버니 모용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운 대인께선 지금 연무장에 계실 거다. 잘되길 바란다, 미야.”
모용진은 가볍게 손을 들어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저벅, 저벅.
멀어져 가는 모용진의 뒷모습을 모용미는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모용진이 그녀를 이름으로만 부른 것도 처음이었지만 모용미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라버니의 말이 아니라 스스로의 반응이 그녀를 당황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용미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모용미는 여전히 발길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았지만 연무장의 긴장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사방에 불을 밝힌 연무장에는 오히려 열기가 더해 갔다.
“타아!”
쿵.
힘차게 발을 구르는 것과 동시에 수십 자루의 검이 일제히 호를 그렸다.
날카로운 칼끝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 모두의 검은 일시에 그 움직임을 멈췄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그 정적은 운현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좋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안도의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진철은 동료들의 자세가 흐트러지기 전에 크게 소리쳤다.
“패검!”
스릉.
젊은 제자들은 검을 갈무리했다.
그 자세마저 절도가 살아 있었고, 일부러 한 것이 아님에도 거의 동시에 움직임이 끝났다.
연무장에 팽팽하던 긴장은 사라졌다.
하지만 자리를 뜨거나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가볍게 옆 사람과 몇 마디 나누는 것이 전부일 뿐, 모두들 수련이 곧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 대협.”
“네!”
타닥.
운현의 목소리에 고진철은 지체 없이 달려갔다.
처음 대협이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들은 그나마 예의상 소협이라고 불릴 만한 그런 위치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운현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마치 고진철이 대협이 될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대협이라는 과분한 호칭이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고진철 자신도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나 태도는 어느새 대협에 걸맞은 무인이 되고자 하는 열의로 가득했다.
한달음에 달려온 고진철에게 운현이 말했다.
“오늘 수련은 이제 마치도록 하지요.”
“벌써 말입니까?”
의아한 고진철의 표정에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날이 꽤 어두워졌습니다.”
고진철은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운현의 말대로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언제 이렇게 어두워졌을까?
“그리고 고 대협.”
“네.”
운현의 말에 고진철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하지만 한 분씩 제게 오라고 해 주시겠습니까?”
“한 명씩 말입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조언을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고진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절정고수의 조언은 절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자신들의 수련을 하루 종일 지켜본 운현의 조언임에야 말해 무엇하랴?
“알겠습니다.”
고진철은 즉시 동료들에게로 뛰어갔다.
***
모용미가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는 완연히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
혹시 헛걸음이 될까 걱정했지만 예상과 달리 연무장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자박.
‘응?’
연무장으로 들어서던 모용미는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예상과 달리 제자들은 수련을 하고 있지 않았다.
젊은 제자들은 연무장 이곳저곳에 삼삼오오 흩어져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혹은 간단한 검식을 펼쳐보고 있었다.
그리고 절반 정도의 제자들은 한군데 모여서서 초조하게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지?’
모용미는 자연스레 그들이 쳐다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운현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문사 차림을 한 운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제자 한 명과 무언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운현이 무엇인가를 적으면서 말을 하면 젊은 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표정으로 들었다.
모용미는 의아했다.
어쨌든 수련을 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운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
모용미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고진철이었다.
그는 모용미의 모습을 발견하자 즉시 고개를 굽히며 예를 올렸다.
“외당 당주님을 뵙습니다!”
고진철의 우렁찬 인사는 다른 제자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젊은 제자들은 즉시 모용미에게 예를 올렸다.
“당주님을 뵙습니다!”
모용미는 조금 당황했다.
젊은 제자들이 이렇게 절도 있게 예를 표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용미는 곧 고개를 숙이며 그들에게 답례했다.
“괜찮습니다. 계속하세요.”
모용미의 말에 제자들은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그들을 잠깐 보던 모용미는 발걸음을 옮겨 운현에게 다가갔다.
“바빠 보이시는군요.”
예를 표하는 모용미에게 운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답례했다.
“아, 네…….”
운현은 말을 얼버무렸다.
대답을 해 준 사람은 운현과 함께 있던 젊은 제자였다.
“운 대인께서 저희에게 잠깐……, 조언을 해 주시던 중입니다.”
모용미는 슬쩍 시선을 내렸다.
운현의 손에 가는 붓과 글이 적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아마도 젊은 제자에게 하는 조언을 정리한 듯 한데, ‘잠깐 하는 조언’이라기엔 적힌 글이 제법 빽빽하다.
“그렇군요.”
모용미는 미소를 지었다.
이전 용봉지회에서도 운현은 남해검문의 파진한에게 조언을 한 적이 있었다.
비록 처음에는 단칼에 거부당했지만 말이다.
슥.
모용미는 고개를 돌려 모여 있는 젊은 제자들을 보았다.
그들이 기다리는 건 아마도 운현에게 조언을 받기 위함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모용미는 다른 제자들이 다들 손에 글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 내용을 보며 제자들이 검식을 펼쳐 보거나 의견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운현의 목소리에 모용미는 고개를 돌렸다.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운현이 말했다.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모용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운현은 정중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인의 검은 그의 자존심입니다. 비록 소저께서 외당 당주시라 하나, 이 자리는 잠시 비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금방 끝날 테니까요.”
그 말에 모용미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운현의 말은 옳다.
단점과 고칠 것을 지적받는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당사자에게 그것은 순수한 조언이 아니라 비난이 될 수도 있다.
“그렇군요.”
모용미는 운현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딱딱해지는 건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저는…….”
이대로 돌아가겠다고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오라버니의 충고가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때를 놓치지 않도록 해라. 언제 또 뵐지 모르니까.
잠시 생각하던 모용미는 나지막이 말했다.
“……기다릴게요.”
짧게 말한 모용미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자박, 자박.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모용미의 뒷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너무 단호하게 말한 것은 아닐까 염려하는데, 문득 젊은 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젊은 제자의 감사는 진심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외당 당주라지만, 세가의 아름다운 아가씨 앞에서 수치를 당하고 싶은 남자가 누가 있으랴?
“그런데 혹시 화가 나신 건 아닐까요?”
운현은 빙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외당 당주님도 충분히 이해하실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한 운현은 다시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말했듯이 대협의 검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젊은 제자는 곧 운현의 말에 집중했다.
타인의 가르침에 대한 거부감도, 알량한 자존심도 내세우지 않았다.
운현의 조언이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것임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젊은 제자는 운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
모용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연무장을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기다리고 선 제자들이 운현과 거리를 두고 있음을 말이다.
‘흐음.’
운현이 물러서게 한 건 자신만이 아니다.
별것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모용미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열심이네.’
운현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무엇인가를 적으며 빠르게 말했고, 젊은 제자는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눈을 빛내며 듣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운현은 글이 빽빽한 종이를 들어 한번 후 하고 분 후에 젊은 제자에게 넘겨주었다.
젊은 제자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 종이를 받아 들었다.
마치 절세 비급이라도 손에 넣은 듯 그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가 돌아가고 또 다른 제자가 운현에게 달려왔다.
‘그때도 저랬었지.’
모용미는 운현을 바라보며 예전 용봉지회를 떠올렸다.
처음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운현은 조금 어리숙하면서도 순수한 문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모용미에겐 좋게 보였다.
명문 무가 젊은이들의 허황되고 계산적인 모습에 질려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비무에서 모욕당한 파진한을 위해 분노하던 운현의 모습 역시 모용미에겐 신선하고 호감이 갔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사실 엄청난 고수이며 검성의 후계자로 알려진 데다가, 창룡검주와 연관이 있는 신비인이라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던 것은 말이다.
‘조금은.’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운하기도 했고.’
그 순간 생각을 이어 가던 모용미는 깜짝 놀랐다.
‘서운했다고? 내가?’
모용미는 갑자기 혼란에 빠졌다.
그것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스스로의 감정을 직면한 아가씨의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