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바라보는 것이 다르다
운현은 연무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요 며칠간 늘 그랬듯이, 연무장에 있던 세가의 젊은 제자들과 동시에 시선이 마주쳤다.
‘아.’
운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어제는 좀 심했다는 생각도 들었고, 어차피 이전처럼 저들이 시선을 피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운현의 예상과 달랐다.
벌떡.
쉬고 있던 제자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서 있던 다른 제자들은 자세를 바로했다.
척.
고진철은 운현을 향해 손을 모았다.
그리고 지체없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대인.”
“안녕하십니까! 대인!”
젊은 제자들이 일시에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 인사에 넒은 연무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운현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젊은 제자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
운현은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슥.
정중하게 손을 모으고 운현은 그들의 예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그제야 고진철과 젊은 제자들이 고개를 들었다.
부드러운 미소가 운현과 젊은 제자들 사이로 번졌다.
저벅, 저벅.
운현은 세가의 젊은 제자들을 향해 걸어갔다.
저벅.
“패기 있는 모습이 보기 좋군요. 다들 몸은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고진철이 대표로 운현에게 말했다.
“그 정도로 비실거릴 사람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오늘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운현은 웃었다.
“그렇습니까?”
젊은 제자들은 눈을 빛내며 운현을 보았다.
오늘도 할 생각은 본래 없던 운현이지만, 그 눈빛 앞에서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렇군요. 그럼 오늘은 제대로 해 볼까요?”
그 말에 젊의 제자들의 표정이 살짝 어색해졌다.
제대로라니, 그럼 어제는 대충 했단 말인가?
“우선 기본 검식부터 다시 짚고 넘어가지요. 어제는 시간이 없어서 그냥 지나간 것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당황한 고진철을 보며 운현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누가 가서 붓과 종이를 가져다주시겠습니까?”
“네?”
운현이 지필묵을 찾는 건 진지하게 임하겠다는 의미다.
그걸 모르는 고진철이라도 운현의 열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 저…….”
고진철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운현이 젊은 제자들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뭐 하고 있습니까? 정렬하세요.”
올바로 정렬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황궁에서 신입 금의위들의 절도 있는 모습을 늘 보아 온 운현에겐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젊은 제자들에게 운현의 단호한 그 말은 이제부터 주도권을 쥐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정렬!”
고진철의 호령에 젊은 제자들이 급히 정렬하고, 다른 한 사람이 지필묵을 가지러 뛰어갔다.
“좋습니다.”
어느새 운현은 사범이 서는 단 위에 올라가 있었다.
젊은 제자들을 죽 훑어보며 운현은 씩 웃었다.
“그럼 오늘도 즐겁게 해 봅시다.”
지금 운현의 말은 금위위 교두들이 하는 버릇 그대로였다.
본 것이 그것이라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레 튀어나온 것이다.
하지만 신입 금의위들이 그 말에 얼마나 이를 가는지 운현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모용세가의 젊은 제자들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긴 하루가 될 것 같다는 것을 말이다.
구겨지는 젊은 제자들의 얼굴과 달리 운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아니, 심지어 개운하게 보일 정도였다.
***
늦은 오후, 모용세가의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 여남현 지부가 자리를 잡았으니 하남성 남부는 정비된 셈이구나. 수고했다.”
모용단천의 말에 외당 당주 모용미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모용세가는 하남성 북부에서 대대로 이름을 떨쳐 온 세가다.
이제 하남성 남부마저 손에 쥐었으니 명실공히 하남성의 패자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래, 하남성의 패자라…….”
모용단천은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리 감격한 표정은 아니었다.
총관이 나지막이 물었다.
“지부를 하남성 바깥으로 확장하시겠습니까?”
“아니.”
모용단천은 담담하게 답했다.
“아직은 세가의 역량이 그에 미치지 못하니,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겠지.”
총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가의 살림을 맡고 있는 그가 보기에도 가주의 판단은 정확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명분이 없어.”
가주 모용단천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큰일은 사람의 뜻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네. 지금은 기다릴 때야.”
모용세가의 영향력이 하남성을 넘어가면 당장 이곳저곳에서 견제가 들어올 것이다.
무엇보다 무림맹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 쓸데없는 분란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뭐,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지만.”
의미심장한 가주의 말에 모용미가 고개를 들었다.
“그건 장강의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장강에서 남궁세가가 충격의 패배를 당한 일은 이미 강호 무림을 뒤흔들고 있었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물길에서 사건이 터졌으니 한동안은 혼란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모용단천은 희미하게 웃으며 모용미에게 반문했다.
“너는 이 일을 어찌 보느냐?”
“무림맹이 당장 행동에 나서지는 않을 거예요.”
모용미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남궁세가의 패배는 충격적인 일이지만, 수로채 연합의 배후가 불분명한 데다가 그 의도도 모호해요. 자파의 이익을 우선하는 거대 문파들이 힘을 합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옳다.”
모용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코 그냥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큰 혼란이 일어날 테지.”
모용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를 꺾은 힘이 이대로 잦아들 리 없다.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폭풍전야의 정적에 가깝다.
“혼란은 때로 기회가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그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지.”
말하던 모용단천이 고개를 돌려 총관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심 총관.”
세가의 살림살이를 주관하는 심 총관은 깊이 고개를 숙여 가주의 뜻에 동의했다.
“무림맹의 조사단은 어찌한다더냐?”
가주 모용단천이 모용미에게 물었다.
“모든 예정을 취소하고 무림맹으로 돌아간다고 하더군요.”
장강의 소식을 들은 당문설화 당설련과 매화검 영호준은 즉시 무림맹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운 대인께서는?”
가주는 젊은 운현을 늘 대인이라 칭했다.
창룡검주의 지인에게 예의를 갖추고자 하는 모용단천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같이 돌아갈 것 같아요.”
“그래?”
모용단천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창룡검주를 만나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가주 모용단천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내가 곧 때가 올 것이라 말한 것은 다만 장강의 일 때문만은 아니다.”
굳은 표정으로 모용단천이 말했다.
“큰 나무는 큰 그늘을 드리우기 마련이다. 우리가 올바른 역량을 갖추고 있다면 세가의 영향력은 자연히 커질 수밖에 없어.”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모용단천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검주님과의 인연은 우리에게 천운이라 아니할 수 없지.”
모용미가 흠칫했다.
“할아버지, 그건…….”
“혹시 검주님을 끌어들일 생각이십니까?”
모용미보다 모용진의 목소리가 빨랐다.
사뭇 긴장된 그 목소리에 모용단천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있느냐?”
모용단천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은인께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어찌 곤란에 끌어들일까? 그분을 위해 모용세가가 어려움을 감수할지언정, 우리의 이득을 위해 그분을 이용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가주 모용단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모용미도, 모용진도, 그리고 총관도 고개를 숙여 가주의 뜻을 받들었다.
“운 대인은 요즘 어찌 지내고 계시느냐?”
모용진이 가주의 물음에 답했다.
“젊은 제자들의 수련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뭐?”
모용단천은 사뭇 놀란 표정이었다.
모용미도 놀란 눈빛으로 모용진을 바라보았다.
“제자들을 지도한다고요?”
“그래.”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주 모용단천에게 말했다.
“어제 상아가 와서 제게 묻더군요. 운 대인께서 제자들을 조금 지도해 주고 싶은데, 괜찮느냐고요. 당연히 괜찮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 역시…….”
가주 모용단천은 순순히 납득했다.
운현의 경지가 사뭇 비범함은 그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비록 운현은 부인했지만 어쩌면 창룡검주의 제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천운(天運)이로군.”
모용단천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운 대인께서 떠나시고 나면 그 제자들은 진이 네가 따로 지도하도록 해라. 아마도 큰 진전이 있었을 테니까.”
“네.”
대제자 모용진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하지만 모용미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겨우 며칠뿐인데 그렇게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을까요?”
모용단천은 미소를 머금었다.
“소위 명문가라 일컫는 문파의 제자와 군소 문파 제자들은 그 실력이 질적으로 달라서, 비유컨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지.”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말이었다.
“어째서 그런지, 그 이유를 알고 있느냐?”
“그야 명문 세가 대대로 쌓아 온 전통과 저력 때문이겠지요.”
“물론 그렇지.”
모용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개인으로 보면 그 자질이 본래 큰 차이가 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명문가의 제자 중에서도 자질이 떨어지는 자는 많지. 그런데도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된다.”
모용미를 바라보며 모용단천이 물었다.
“왜 그럴까? 명문 세가가 더 좋은 비급과 연공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네가 말한 세가의 전통과 저력이, 과연 무엇이겠느냐?”
“그건…….”
모용미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비급과 연공법, 혹은 영약은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명문 무가의 제자라도 특별한 비급과 영약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자는 극히 적다.
세가들의 무공이 판이하다고는 하지만,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국 얼마나 성취했느냐의 싸움이다.
그렇다면 명문 무가의 제자들이 다른 문파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바라보는 것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모용단천이 나지막이 말했다.
“명문가의 제자들은 그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경지를 스승과 사형들이 성취해 내는 것을 늘 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낮은 경지에서 안주하지 않는다.”
눈을 빛내며 모용단천이 말을 이었다.
“또한 그들은 작은 어려움은 시련으로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사형제들이 그보다 더한 어려움을 이기고 성취해 내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모용미는 어느새 가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자신도 할 수 있으리란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수련하던 사형제들이 성공해 내고 있으니까.”
단호한 목소리로 모용단천은 말했다.
“직접 보여 주는 것보다 더 큰 가르침은 없으니, 그것이 전통이며 저력이다. 바로 그 환경이야말로 저들의 잠재력을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모용단천은 빙긋 웃으며 대제자 모용진을 향해 말했다.
“네가 책임이 막중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운 대인의 검을 본 다음이니 말이다.”
모용진 역시 웃었다.
“네, 알겠습니다.”
모용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주의 말은 분명 옳다.
운현의 검을 본 제자들은 분명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안목까지는 아니더라도 목표는 높아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겨우 며칠 만으로 얼마나 변화할 수 있을까?
모용미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운 대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과 다른 제자들의 대련 같은 것도 생각해 보도록 해라. 아마도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
가주 모용단천이 말했다.
제법 기대가 큰 듯 가주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연히 그리하겠습니다.”
대제자 모용진도 웃으며 답했다.
모용미는 어쩐지 자신만 모르고 있는 것 같은, 난데없는 소외감을 느꼈다.
하지만 가주 모용단천과 대제자 모용진의 얼굴에 떠오른 흐뭇한 미소는 한동안 떠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