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그가 나를 모른다 할지라도
캉.
“윽!”
고진철이 신음을 흘렸다.
운현이 검을 내치자 고진철의 검이 크게 튕겨 나간 것이다.
다행히 검을 떨구지는 않았지만 고진철은 손에 큰 충격을 느꼈다.
스릉.
운현이 검을 거뒀다.
그는 자신을 향한 젊은 제자들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러분이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실력이 그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운현은 의연한 태도로 말했다.
“또한 여러분의 검이 도(道)가 아니라 술(術)에 불과한 탓이지요.”
말하는 운현의 태도는 단호했다.
“검이 단지 기술에 머무른다면 그 검은 무인의 긍지도 그리고 길[道]도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검이 스스로의 도(道)이며 삶의 방식이라면, 자신의 검이 어떠한 길을 가는지 어찌 상관치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검도라는 말은 쉽게 한다.
검법이라는 말도, 무예라는 단어도 어렵지 않게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그 뜻을 생각해 본 적은, 젊은 제자들 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운현의 말은 그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남기고 있었다.
‘삶의 방식.’
고진철은 운현의 말을 되뇌었다.
모용세가의 제자로 들어왔다는 것은 사실상 평생 검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자신은 운현처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고진철은 입을 열 수 없었다.
그것은 다른 젊은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 그러면…….”
운현이 빙긋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계속해 볼까요?”
고진철은 순간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러나 곧, 중간에 멈춘 수련을 계속하라는 뜻임을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
고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모용세가의 젊은 제자들은 해가 지도록 모용세가의 기본 검식을 펼쳐야 했다.
한 초식이 끝날 때마다 운현의 날카로운 지적이 여지없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좋은 버릇은 일찍 들수록 좋습니다.”
운현은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나쁜 버릇은 초보 때 잡아야 하는 법입니다.”
모용세가에 정식 제자로 들어올 정도면 절대 초보가 아니다.
하지만 절정고수가 초보라고 하는데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결국 모용세가의 젊은 제자들은 그들 평생에서 제일 긴 기본 검식을 경험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모용상아도 결국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했다.
그렇게 하루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
“헉, 헉, 헉.”
연무장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가득했다.
벌써 해가 졌지만 달아오른 열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제, 젠장.”
털퍽.
누군가 바닥에 주저앉자 그 뒤를 이어 몇 명이 더 바닥에 엉덩이를 깔았다.
고진철은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무릎을 짚은 채 서 있었다.
“이걸, 매일 하라고?”
고진철은 운현이 떠나가며 해 준 말을 중얼거렸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운현은 대단히 집요했다.
그의 성격인지, 아니면 고수가 다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운현은 도무지 수련을 끝낼 줄을 몰랐다.
해가 지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수련을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다.
‘먼저 사과하길 다행이었어.’
생뚱맞게도 고진철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집요한 사람에게 원한이라도 산다면 아마도 편히 죽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상대는 엄청난 고수니까 말이다.
“후우.”
운현이 들었다면 대단히 억울해 할 생각을 하며 고진철은 숨을 몰아쉬었다.
“씨펄, 난 못 해.”
누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매일 하라니, 작정하고 우릴 골탕먹이려는 거잖아.”
고진철은 인상을 썼다.
운현의 그 진지한 눈빛을 보고도 저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건 아니지.”
고진철이 한마디 하려는데 다른 제자가 불쑥 말했다.
“고생한 건 우리만이 아니야. 저 정도의 고수가 기껏 우릴 골탕먹이려고 하루를 허비한단 말이야?”
그건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저 골탕을 먹이기 위해서라면 직접 나서서 자신들의 수련을 지도해 줄 이유가 없다.
심지어 운현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세까지 전부 고쳐 줬었다.
“그리고 생각해 봐. 아까 진철이의 검이 전부 막혀 버렸잖아.”
그 제자는 사뭇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세가의 제자인 이상 우리도 누군가와 칼부림을 하게 될 텐데, 막상 나갔다가 그런 상대를 만나게 되면 어쩔 건데?”
“어쩌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어야지.”
누군가 중얼거리듯 한 대답에 제자들이 웃었다.
“그래, 그것도 괜찮지.”
말을 꺼낸 그 제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선택지는 둘이야. 우리 실력에 맞게 찌그러져 있든가, 아니면 내일도 이걸 하든가.”
웃던 제자들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강호는 무정하다.
실력에 맞게 찌그러져 있어야 한다는 말은, 비록 우스꽝스러운 표현이기는 하지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나는 하겠어.”
고진철이 말했다.
젊은 제자들의 시선이 고진철에게 향했다.
“후우우.”
고진철은 긴 숨을 내쉬며 허리를 폈다.
동료들을 돌아보며 고진철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정고수가 직접 가르쳐 준 거다. 내 평생에 이럴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어. 그러니 나는 내일도 이걸 하겠다.”
고진철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는 결의로 가득했다.
“젠장.”
옆에 있던 동료가 머리를 긁었다.
그는 인상을 구기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철이가 하면 나도 해야 하잖아.”
고진철은 피식 웃었다.
그건 조소가 아니라 동료를 향한 신뢰의 표현이었다.
“너는?”
고진철이 묻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제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해야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니.”
고진철이 웃었다.
“나도.”
“나도 하겠어.”
“젠장, 다 하는데 나만 빠질 순 없잖아.”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고진철은 미소를 머금었다.
“후우.”
문득 옆에서 다른 동료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고생을 사서 한다더니, 이게 바로 그 꼴이군.”
“그러게.”
고진철은 그 말에 공감했다.
“정말 그래.”
어쩔 수 없다는 듯 고진철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
다음 날 오후, 이제는 습관처럼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운현은 자신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날카로운 인상에 강렬한 눈빛을 가진 그는 길을 막듯이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운현을 주시하고 있었다.
운현은 다시 발걸음을 뒤로 돌리지도 못하고 그저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독고랑 대협.”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대협이라 불리기엔 젊지만, 운현이 아는 무인을 존중하는 호칭은 그것뿐이었다.
고독객 독고랑은 노려보듯 운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반갑습니다, 운 대인.”
운현은 조금 놀랐다.
독고랑과는 아직 정식으로 통성명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를…….”
“모용진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운현은 철정산 사건 이후 독고랑이 모용진과 스스럼없이 지낸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독고랑은 손을 모으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독고랑입니다.”
“운현입니다.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나누었다.
‘듣기로는 꽤 무례한 사람이라고 하더니, 의외인걸.’
운현은 독고랑에 대해 당연히 알고 있었다.
문파도 사문도 없이 홀로 돌아다니며 비무를 청하는 낭인 무사.
고독객이라 불리는 그에 대한 소문은 대부분 무례하고 도발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운현은 그의 검에서 더 높은 경지를 향한 열망을 보았다.
일체의 변명도 타협도 없는, 그야말로 올곧기 그지없는 서슬 퍼런 열망을.
독고랑의 검에는 바로 그것이 있었다.
“대인께서 검주(劍主)님과 무관치 않다 들었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운현은 갑자기 튀어나온 독고랑의 말에 깜짝 놀랐다.
운현은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그건 길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운현은 순순히 시인했다.
이미 모용진으로부터 들었다면 모른 척해 봐야 헛일이다.
무엇보다 독고랑의 그 강렬한 눈동자 앞에서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역시 그렇군요.”
독고랑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 깊은 눈동자에 한순간 강렬한 기색이 스친 것처럼 보인 것은 운현의 착각이었을까?
그리고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독고랑은 말없이 운현을 바라보았고, 운현은 할 말이 없었다.
어색한 눈싸움을 하던 운현이 결국 먼저 고개를 숙였다.
“저, 그럼 저는 이만…….”
저벅.
“예전에는.”
지나치려는 운현의 발길을 독고랑의 목소리가 붙들었다.
“세상에 오직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운현은 발을 멈추고 독고랑을 돌아보았다.
독고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 검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으며, 세상의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슥.
독고랑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그 깊은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며 독고랑이 말했다.
“내 검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며 그 누구보다 더 나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내가 모르던 나 자신마저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독고랑의 눈빛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 앞에서 서투른 변명 같은 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나를 아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진실하게 이해하는 친우를 일컬어 지기(知己)라 한다.
평생을 살아도 단 한 명 만나기 힘든, 그렇기에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 바로 지기(知己)다.
“또한 그는 내게 아무 대가 없이 가르침을 베풀어 준, 천하에서 단 한 명뿐인 사람이기도 합니다.”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독고랑이 말했다.
“그러므로 그가 나를 모른다 할지라도 나는 그를 스승으로 여길 것이며, 그가 나와 무관하다 말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에게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호한 선언이었다.
운현은 당황했다.
고독객 독고랑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스륵.
독고랑은 운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저 그뿐이었지만, 독고랑의 예는 어떤 대례보다도 무거웠다.
저벅.
그리고 독고랑은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멀어져 가는 독고랑의 뒷모습을 보며 운현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독고랑의 진심은 가슴 벅찰 정도였다.
의형 일충현 외에 그 누가 운현에게 이토록 뜨거운 진심을 전한 적이 있던가?
운현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운현은 자신이 서찰을 보낸 창룡검주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건 그저 당황해서가 아니었다.
이미 자신을 숨기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독고랑의 진심 앞에서도 밝히지 못한 것이다.
“후우.”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숨겨야 하나라는 회의도 들고,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서찰에 이름을 밝힐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한번 운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자신이 보낸 서찰이 독고랑에게 그렇듯 큰 의미가 되었다니, 마음 한편으론 뿌듯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독고랑이 사라진 곳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나서 운현은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마음은 복잡했다.
하지만 어쩐지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