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단 한 치의 차이
“운 오빠.”
옆에서 모용상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이 고개를 돌리자 작은 모용상아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작은 짐승이 뛰어오는 것 같아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다가온 모용상아는 운현의 팔에 서슴없이 매달렸다.
“아가씨.”
고진철은 모용상아에게 예를 표했다.
세가의 제자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이제껏 깍듯이 챙기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모용상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운현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운현이 미소를 지으며 고진철에게 말했다.
“어제는 제가 보여 드렸으니, 오늘은 여러분의 검을 제게 보여 주시지요.”
“네?”
고진철은 잠시 당황했다.
대체 그걸 봐서 뭘 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이미 운현을 극진히 대하라는 대제자 모용진의 엄명이 있었던 데다가, 세가의 작은 아가씨 모용상아도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속으로 한숨을 쉬며 고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진철이 연무장으로 돌아가는 사이, 운현은 모용상아에게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했다.
“알았어, 오빠. 내가 물어볼게.”
모용상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어디론가 달려갔다.
작은 동물이 뛰어가는 것 같은 그 뒷모습을 운현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모용세가의 젊은 제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고진철처럼 그들도 운현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지금 칼자루를 쥔 사람은 운현이다.
모용세가의 젊은 제자들은 수련 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고진철은 내심 불안했다.
혹시나 싶지만 이걸 빌미로 뭔가 트집을 잡으려는 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사과까지 받아 놓고 그럴까 싶지만, 고수들의 속을 어찌 짐작할 수가 있을까?
그건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나지막이 웅성거리는 소리들은 멈추질 않았다.
“크흠.”
고진철은 헛기침을 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동료들의 불안한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고진철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부터 모용검식을 시작한다. 발검!”
촤창.
젊은 제자들은 검을 뽑았다.
웅성거리던 말소리가 사라지고 연무장에 긴장이 번져 갔다.
검을 빼어 들고도 머뭇거리는 사람은 그들 중엔 없었다.
자세를 취한 젊은 제자들의 눈동자가 진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일 식, 정검앙천(正劍仰天)!”
고진철이 크게 외쳤다.
쿵.
“하아!”
발 구름 소리와 함께 연무장을 뒤흔들 듯한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수십 자루의 검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햇빛에 번뜩이는 칼날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운현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황궁에서 금의위들의 수련을 늘 보아 온 운현에게 이런 모습은 그저 일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
젊은 제자들의 검식이 끝났다.
“후우우.”
고진철은 숨을 가다듬었다.
자신과 동료들이 내뿜은 열기가 연무장에 가득했다.
슥.
검을 갈무리한 고진철은 고개를 돌렸다.
그들로 하여금 이 검식을 펼치게 한 운현의 반응을 살피기 위한 것이다.
‘윽.’
고진철은 불안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이쪽을 바라보는 운현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다른 제자들 역시 그 모습을 보았는지 불안한 기색들이 역력했다.
나지막이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일어나는데 마침 모용상아가 돌아왔다.
탁탁탁.
“가, 갔다 왔어.”
모용상아가 가쁜 숨을 내쉬며 운현에게 말했다.
“그래, 뭐라고 그러셨니?”
“완전 괜찮대.”
활짝 웃으며 모용상아가 말했다.
“그리고 오빠가 자기도 꼭 해 달래. 일만 아니었으면 당장 뛰어올 기세던걸?”
“그래?”
운현은 빙긋 웃으며 모용상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상아야.”
“헤헤.”
웃는 모용상아에게 미소를 지어 준 후, 운현은 젊은 제자들을 향해 걸었다.
저벅, 저벅.
천천히 걸어오는 운현의 모습을 보며 고진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제자들도 긴장된 모습으로 운현을 쳐다보았다.
저벅.
운현이 멈춰 섰다.
제자들을 한번 쳐다본 운현은 고진철에게 말했다.
“다시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네?”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했지만 운현의 표정은 진지했다.
고진철은 슬쩍 동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의 표정이 좋을 리 없었다.
운현이 심술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랴?
아까 대화를 듣건대 이미 대제자 모용진의 허락도 받은 듯하니 그대로 따를 수밖에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고진철은 자세를 잡았다.
“모용검식을 시작한다!”
감정이 실린 고진천의 목소리는 크고 신경질적이었다.
동료들 역시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발검!”
차차창.
“일 식, 정검앙천!”
“하아!”
쿵, 쉬익.
기합 소리가 연무장을 울리고 수십자루의 칼날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고진철은 곧 다음 구령을 외치려 했다.
운현의 방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잠깐, 그대로 멈추십시오.”
다음 초식을 이어 가려던 고진철이 움찔했다.
저벅, 저벅.
운현이 걸어왔다.
이건 대체 뭔가 싶어 고진철이나 다른 제자들이 쳐다보는데, 다가온 운현은 가장 가까운 젊은 제자의 검을 손으로 슥 밀었다.
“조금 전엔 여기였습니다.”
“네?”
반문하는 젊은 제자의 말엔 아랑곳 없이, 운현은 다음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여기였지요.”
슥.
운현이 슬쩍 밀자 그의 검이 아래로 조금 내려갔다.
저벅.
발을 옮기며 운현은 계속 지적해 나갔다.
“당신은 검 끝이 완전 다른 방향이군요.”
저벅, 저벅.
운현은 한사람 한사람 지적하며 빠르게 지나쳤다.
슥.
몸을 돌린 운현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아까와 지금, 어느 쪽이 진짜 정검앙천입니까?”
젊은 제자들은 어리둥절했다.
운현이 말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지금 운현은 제자들의 자세가 아까와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대인, 그것이…….”
고진철이 무어라 말하려 할 때였다.
“상아야.”
“응, 오빠!”
모용상아가 병기 거치대에서 검 한 자루를 들고 달려왔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움직인 것을 보면 이미 이야기를 해 둔 모양이었다.
“여기.”
“고마워.”
운현은 검을 받아들었다.
모용상아는 빙긋 웃고는 다시 뒤로 물러섰다.
스릉.
운현은 검을 뽑았다.
손질이 잘된 칼날이 운현의 손에서 햇빛 아래 번쩍였다.
저벅.
연무장 앞에 있는 조금 높은 단을 향해 운현이 걸어갔다.
평소라면 사범이 서서 수련을 지도했을 그 돌단 앞에서, 운현은 멈춰 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디며 주저없이 검을 휘둘렀다.
쉭.
일렁이는 낯선 기운은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지도 않았다.
운현의 검은 돌담을 향해 수평으로 그어졌고, 쇠와 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무장에 작게 울려 퍼졌다.
치잉.
운현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검을 거뒀다.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었다.
쉭.
운현이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검을 뽑아 휘둘렀다.
치잉.
검이 돌단을 긁는 소리가 또다시 울려나왔다.
운현은 계속 검을 거두고, 그리고 다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치잉, 치잉, 치잉.
그렇게 몇번이나 했을까?
운현이 검을 멈췄다.
그리고 뒤를 돌아 젊은 제자들을 보며 말했다.
“제가 몇 번이나 검을 휘둘렀습니까?”
“여, 열두 번…….”
무심결에 횟수를 세고 있던 누군가가 대답했다.
운현은 다시 물었다.
“이곳에 몇 개의 흔적이 있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돌단에 남은 선은 단 하나 뿐이었다.
가늘고 긴 단 하나의 흔적만이, 마치 딱 한 번 그은 듯한 모습으로 그곳에 남아 있었다.
꿀꺽.
고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곳에 남은 흔적이 하나뿐인 것은 제가 한 열두 번의 동작이 같은 초식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검에 여러 궤적이 남는다면…….”
운현은 젊은 제자들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것이 같은 초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젊은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운현의 말은 옳다.
하지만 여전히 의아함은 남아 있었다.
“저, 대인.”
고진철이 용기를 냈다.
운현의 진지한 모습은, 적어도 자신들을 무작정 괴롭히려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하시는 바는 알겠으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정확한 것은 좋다.
하지만 이 정도로 정확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
고진철의 물음은 제자들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었다.
“음.”
운현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답은 금방 나왔다.
저벅, 저벅.
운현은 고진철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곳에서 저를 향해 검을 휘둘러 보십시오.”
“네?”
난데없는 소리에 고진철은 머뭇거렸다.
운현을 상하게 할까봐 머뭇거린 것은 아니었다.
자신과 운현의 거리는 검을 휘둘러도 닿지 않을 거리였다.
“알겠습니다.”
고진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들었다.
괴롭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염려는 이미 염두에 없었다.
이 대단한 고수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관심이, 고진철과 제자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럼.”
고진철은 운현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검을 휘둘렀다.
쉭, 쨍.
깨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웃.’
고진철은 깜짝 놀랐다.
운현을 향해 휘두른 검은 중간에 막혀 멈춰 서 있었다.
그 검을 막은 것은 다름 아닌 운현의 검 끝이었다.
두 자루의 검 끝이 허공에서 붙어 버린 듯 멈춰 있었던 것이다.
슥.
운현이 검을 거뒀다.
“다시 해 보시지요.”
“아, 네.”
고진철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번엔 좀 더 신중하게, 그리고 좀 더 강하게 고진철은 검을 휘둘렀다.
조금 전보다 높은, 운현의 눈 높이였다.
쨍.
날카로운 소리가 다시 한번 연무장에 울렸다.
‘윽.’
고진철의 검은 또다시 막혀 있었다.
운현의 검 끝은 마치 노린 듯 고진철의 검 끝을 막고 있었다.
‘세상에.’
고진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검신의 중간을 막아선 것도 아니다.
날카로운 검 끝으로 자신의 검 끝을 막는다니, 고진철로서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이다.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는 힘도 그렇지만, 대체 어떻게 허공을 가르는 검 끝을 정확히 막아낸단 말인가?
“한 번 더.”
운현이 검을 거두며 말했다.
고진철은 이를 악물었다.
자세를 가다듬은 고진철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운현을 살폈다.
하지만 운현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고진철은 이를 악물었다.
“타하!”
기합까지 내지르며 고진철은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또다시 이변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었다.
캉.
두 자루의 검 끝이 허공에서 만났다.
그리고 고진철은 그 상태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단 한 치.”
운현이 그 상태로 말했다.
“무인의 대결에서는 단 한 치만 검이 어긋나도 생사가 갈립니다. 그런데도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