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뒤늦은 사과
아쉬운 마음에 터벅터벅 병기 거치대로 걸어간 운현은 목검을 제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모용상아를 바라보았다.
모용상아는 뭐가 좋은지 마냥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괜찮았니?”
웃으며 운현이 물었다.
모용상아는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활짝 웃었다.
“최고야!”
“그래?”
어린 모용상아가 검술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을 거라고 운현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운현은 모용상아의 칭찬이 기뻤다.
“고마워.”
“헤헤.”
모용상아는 후다닥 달려오더니 운현의 팔에 매달렸다.
“오빠 멋있더라. 예전에도 이렇게 하지 그랬어?”
예전이라는 건 젊은 제자들과 시비가 붙었던 그때이리라.
운현은 웃으며 짐짓 거만하게, 반은 농담조로 말했다.
“본래 검은 아무 때나 뽑는 게 아니란다.”
모용상아가 웃었다.
“그런데 날 위해서 특별히 해 준 거구나? 고마워, 오빠.”
“후후후.”
운현은 웃었다.
그러다 문득 모용상아가 힐끔 뒤를 돌아보는 것을 깨달았다.
운현도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또 한번, 자신을 쳐다보는 젊은 제자들의 무수한 시선들과 마주쳤다.
“크흠.”
이번에도 제자들이 즉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다.
연무장에 있는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니 그것 또한 나름 장관이다.
‘왜 그러지?’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딱히 생각나는 일은 여전히 없다.
‘……뭐, 상관없겠지.’
저번처럼 시비가 붙은 것도 아니다.
젊은 제자들의 눈빛에서도 적의나 반발심 같은 건 없었다.
“후후훗.”
운현의 팔에 붙어 있던 모용상아가 웃었다.
뭐가 그리 좋은가 싶어 운현이 내려다보자 모용상아가 운현을 쳐다보며 빙긋 웃는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가자. 당과라도 사 줄게.”
“와, 정말? 오빠 최고야!”
운현은 기분이 좋았다.
아마도 잠깐이나마 수련을 한 덕분이겠지만, 최근 이렇게 홀가분한 적이 또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자박, 자박.
작고 귀여운 모용상아와 함께 운현은 연무장을 떠났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모용세가의 젊은 제자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침묵이 연무장에 내려앉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게, 뭐였지?”
누군가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튀어나왔다.
“검기 아냐?”
“검기? 그게 말로만 듣던 그 검기야?”
“어, 나도 실제로 본 적은 없어서…….”
모용세가의 제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위험이 지나갔다고 생각되자 자연히 운현의 ‘검기’에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그런데 목검에도 검기가 서리나?”
목검에 검기라는 건 들어 보지도 못한 일이다.
다들 의아해하는데 문득 누군가가 말했다.
“절정고수들은 나뭇가지 하나 들고도 검기를 뿜어낸다고 하지 않아?”
“그럼 아까 그 사람, 아니 그분이 절정고수라고?”
일반적으로 검기를 발현하면 고수라 일컫는다.
그리고 그 끝에 다다르면 절정의 경지가 있다고 한다.
검기를 뿜어내는 고수조차 꺾어 버리는 절정의 고수들이 말이다.
“몰라.”
다른 제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검기발현도 모르는데 그 너머를 어떻게 알아?”
절정의 경지는커녕 검기발현도 직접 본 일이 없다.
그러니 자신들이 본 광경이 어느 정도의 경지인지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엄청나더라.”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는 고수다.
젊은 제자들로서는 감히 바라보기도 힘든 고수.
“그런데 괜찮을까?”
문득 또 다른 제자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나중에 무슨 문제라도 되는 거 아냐?”
그건 젊은 제자들 모두가 똑같이 느끼던, 그러나 애써 미뤄 두었던 불안이었다.
“야, 우리가 뭘 했다고 그래?”
젊은 제자 한 명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우린 그냥 구경한 것뿐이라고.”
억울하다는 듯 그가 말했다.
하지만 제자들의 불안을 없애지는 못했다.
“하지만 저번에는…….”
“그래서 그때 대제자께 혼났잖아. 그리고 저 정도 되는 고수가 설마 그때 일을 아직 마음에 두겠어?”
“그건 모르는 일이지.”
누군가 생각 없이 한마디를 던졌다.
“왜, 고수들은 성격도 괴팍하고 자존심도 강하다잖아?”
떠들던 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자존심’이라는 한마디가 그들의 아픈 곳을 찌른 것이다.
고수의 자존심을 건드리고도 무사히 넘어가길 바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고진철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대제자께서 알아서 하실 테니까 우리는 검이나 열심히 휘두르면 돼.”
그 말에 젊은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의 불안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었다.
서로를 쳐다보던 그들의 시선은 다시 고진철에게 향했다.
“왜?”
“그래도 직접 사과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제자 한 명이 말했다.
“아무리 우리가 대제자께 혼이 났다곤 하지만, 저분께 직접 사과한 건 아니잖아.”
고진철은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 말이 옳았다.
아니, 사실은 혼나기 전에 먼저 사과를 했어야 옳다.
그때는 운현이 떠난 후라서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후우.”
고진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하자.”
자신이 생각해도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언뜻 보기에 운현이 그리 괴팍한 성격일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고수다.
자신들과는 사는 세계가 다른 절정의 고수.
고진철과 다른 제자들의 표정에 긴장이 떠오르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
다음 날, 운현은 습관처럼 연무장을 찾았다.
본래라면 독고랑의 조사에 서기로서 동석해야 했지만, 독고랑이 단호하게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문의 당설련은 화를 냈지만 정작 책임자인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무림맹은 그 누구 위에도 군림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우며 말이다.
문파 협의체인 무림맹의 본질을 생각하면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무림맹에 감히 반기를 드는 사람이 없음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기인 운현 역시 덩달아 할 일이 없어져서, 이렇게 연무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나야 거북한 자리를 피하게 되어 다행이지만.’
독고랑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조금 아쉬웠다.
그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운현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연무장으로 발을 옮겼다.
“타하!”
여느 때처럼 모용세가 제자들의 기합 소리가 그를 반겼다.
운현은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탁.
기합이 멈췄다.
그리고 수련 중이던 모용세가 제자들이 일시에 멈춰 섰다.
‘응?’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젊은 제자들 모두가 운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어제처럼 말이다.
‘뭐지?’
운현은 눈을 껌뻑껌뻑했다.
넒은 연무장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모용세가의 젊은 제자들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운현이 의아해하는데, 모용세가 제자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스륵.
질서 정연하게 모여 있던 모용세가의 제자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크흠, 큼.”
어색한 표정을 애써 감추려는 듯 그 청년은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운현을 향한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저벅, 저벅.
운현은 그 제자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평범해 보이는 청년이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사뭇 심각했다.
‘무슨 일이지?’
운현이 궁금해하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청년이 발을 멈췄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운현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슥.
“저는 고진철이라 합니다.”
“아, 네. 저는 운현입니다.”
운현은 일단 답례했다.
그저 상식적인 반응이었지만 고진철의 표정은 한결 편해졌다.
운현이 예를 받아 준 것 자체가 좋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저희는 얼마 전 세가에 이름을 올리게 된 신입 제자들입니다.”
고진철의 말에 운현은 다른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저편에 서 있는 젊은 제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시군요. 헌데 무슨…….”
왜 갑자기 안 하던 인사를 하나 싶어서 운현이 고진철을 보았다.
고진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 번에는.”
긴장된 표정으로 고진철이 말했다.
“저희가 대인을 몰라뵙고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두 손을 모은 고진철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진철만이 아니었다.
뒤에 있던 젊은 제자들이 일제히 손을 모으더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인!”
기가 바짝 들어간 젊은 제자들의 목소리가 연무장을 울렸다.
운현은 당황했다.
갑자기 사과를, 그것도 단체로 사과를 받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니, 저기 이러실 필요는…….”
하지만 고진철도, 다른 제자들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어제 모용상아가 ‘진 오빠가 확실히 교육시켰다’고 하더니, 그래서 뒤늦게나마 사과를 하는 것이리라.
“고개를 드시지요.”
고진철이 고개를 들었다.
“여러분도 다요.”
조금 큰 그 목소리에 뒤에 있던 제자들도 고개를 든다.
운현은 고진철과 젊은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사과는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대제자 모용진에게 혼날 걱정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고진철과 제자들에겐 사뭇 다르게 들렸다.
이렇게 사과하지 않았더라면 걱정해야 할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단 의미 아닌가?
“가, 감사합니다.”
고진철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은 길거리의 낭인도 아니고 모용세가의 제자들입니다.”
어차피 지난 일이고 마음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다음부터는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무인으로서 스스로 판단하여 옳게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건 고진철과 제자들의 가슴을 찌르는 말이었다.
뒤늦은 사과에 대한, 그리고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무시한 것에 대한 꾸중처럼 들린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얼굴이 붉어진 고진철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사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유가 무엇이건 잘못을 사과한다는 건 옳은 행동이다.
운현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고진철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지만 눈빛은 한결 편해졌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감사합니다.”
고진철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운현도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였다.
“저기.”
문득 고진철이 말했다.
운현은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혹시……, 지금부터 수련을 하실 겁니까?”
고진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본 그 광경이 눈 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의 전율도.
그 수련을 운현은 또 하려는 것일까?
운현은 잠시 주저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해도 된다면 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걸 왜 고진철이 묻는 것일까?
운현의 의아한 기색을 눈치챈 고진철이 얼른 말했다.
“아니, 그게 다른 게 아니라…….”
잠시 주저하던 고진철은 용기를 내서 말을 이었다.
“……혹시 대인께서 수련하시는 걸 저희가 봐도 괜찮나 해서요.”
말하는 고진철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뻔뻔하기 그지없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어제 본 그 광경이 잊혀지질 않는데 말이다.
“아, 그건…….”
운현이 무어라 말하려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