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고수의 검식
“후우.”
운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고독객이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군.’
고독객 독고랑의 상처는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독고랑은 사흘 만에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다.
그 강인한 생명력에 의원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탈진 상태에 이르렀던 기력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어서 내일 정도면 거동도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의원이 말했다.
‘내가 서찰을 보냈다는 건 그도 모르겠지만.’
독고랑이 회복하면 당연히 무림맹 조사단, 매화검 영호준이나 당문설화 당설련의 조사가 시작될 것이다.
어차피 고독객 독고랑도 운현에 대해 아는 것은 없으니 조사해 봐야 나올 건 없을 터다.
문제는 그렇게 자신의 서찰이 거론되는 것 자체가 운현에겐 매우 거북한 일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벌인 일에 모른 척하고 있기도 민망하고, 자신을 보는 모용미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버티는 것도 고역이다.
특히나 모용미의 시선은, 물론 언제나 빙긋 웃기는 하지만, 이미 들켜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말하는 게 옳을까?’
애초에 숨긴 것은 자신이 누명을 쓸까 봐서였다.
수적들에게 나돈다는 그 의문의 괴서찰을 보낸 사람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탓에 이렇게 마음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떳떳하게 밝히고 괴서찰은 자신이 아니라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장강에서 일어난 일을 아직 모르는 운현이 진지하게 그렇게 고민할 때였다.
“하아!”
촤락.
연무장을 울리는 소리에 문득 운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모용세가의 젊은 제자들이 내지르는 기합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타하!”
힘차게 검을 뻗는 청년들의 패기 넘치는 모습이 운현의 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자율 수련이었지만, 요 며칠간 수련 한 번 하지 못한 운현에게는 부럽기만 한 광경이었다.
‘좋겠다.’
운현은 모용세가의 젊은 제자들을 열심히 바라보았다.
‘아, 저기서는 저러면 안 되는데.’
부러운 것도 잠시, 운현은 젊은 제자들의 자세에서 부족한 부분을 금방 알아차렸다.
어디까지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운현은 아쉬움의 한숨을 흘렸다.
이러다 예전에 시비가 붙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였다.
“운 오빠.”
낭랑한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운현을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 뿐이다.
“아, 상아야.”
아니나 다를까?
도도도도.
모용상아가 통통 튀듯 가벼운 걸음으로 운현에게 달려왔다.
그 귀여운 모습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또 여기 있네? 오빠는 여기가 좋은가 봐?”
달려온 모용상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언니나 오빠는 같이 안 왔니?”
“언니는 지금 없어.”
모용상아는 운현이 앉은 돌계단 옆에 폴짝 뛰어 앉았다.
“무슨 상단인가가 찾아와서 만나고 있거든. 그리고 우리 언니 맘에 들려면 그렇게 우물쭈물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해.”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으로 운현을 올려다보며 모용상아가 말했다.
“언니는 당당하고 기개 있는 사람을 좋아하니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당하고 기개 있는 사람은 나도 좋아해.”
그건 그저 맞장구에 불과했다.
“어, 오빠……. 그쪽이야?”
“뭐?”
상아의 말에 의아해하던 운현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상아야, 너…….”
“아니, 뭐 나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모용상아가 측은한 표정으로 운현에게 말했다.
“오빠도 힘들겠구나.”
“아니야!”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모용상아가 인상을 쓰며 귀를 막았다.
“귀 아파.”
그제야 운현은 자신이 아이를 겁박한 모양세가 된 것을 깨달았다.
“미, 미안.”
운현은 즉시 사과했다.
그리고 자신의 어른스럽지 못한 대응을 반성했다.
“크흠. 상아야. 그런 말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근엄하게 주의를 주려고 했지만 모용상아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검은 언제 보여 줄 거야?”
“검?”
운현이 묻자 모용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때 보여 주겠다고 하고 그냥 갔잖아.”
“아.”
생각해 보니 예전에 모용상아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젊은 제자들과 시비가 붙어서 무산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금 보여 주면 안 돼?”
“……하지만.”
잠시 머뭇거린 건 운현도 수련이 너무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 연무장엔 운현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아!”
쿵.
모용세가의 젊은 제자들이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왜? 저 사람들 신경 쓰여서?”
모용상아는 운현의 심정을 정확히 읽어 냈다.
“괜찮아. 진 오빠가 확실히 교육시켰으니까, 이젠 아무도 뭐라고 못 할 거야.”
예전엔 모용상아도 못 알아보던 신입 제자들이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게다가 그들은 대제자 모용진으로부터 확실하게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젊은 제자들은, 사실 운현의 존재나 시선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있었음에도 묵묵히 수련에만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현은 흘깃 젊은 제자들을 쳐다보았다.
모용상아의 말대로 그들은 운현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연무장도 넓고.’
모용세가의 연무장은 넓고 잘 정비되어 있었다.
젊은 제자들이 있는 곳을 피하면 운현 한 사람이 수련을 할 만한 장소는 충분히 있었다.
‘……해 볼까?’
운현이 지금껏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수련을 한 이유는 그저 습관에 불과했다.
남 보이기 부끄럽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건 아주 초반 잠깐뿐, 일충현 교두나 다른 교두들 앞에서 수련을 한 적도 있고 박 환관에게 보인 적도 있었다.
무림맹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그리고 쓸데없는 구설수에 오르기 싫어 조용한 장소를 찾았었다.
‘어차피 다들 수련 중이니 눈에 띄지도 않을 것 같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수련한다 한들 튀어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운현은 생각했다.
강호 무림의 상식과는 전혀 동떨어진 판단이었지만 운현은 그걸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운현 자신이 너무나도 수련을 하고 싶었다.
“……그래.”
“와아!”
모용상아가 두 손을 번쩍 들며 좋아했다.
그 모습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부스럭.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까?”
“응!”
모용상아가 냉큼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모용상아와 함께 연무장 구석에 놓인 병기 거치대로 걸어갔다.
전통 있는 무가답게 거치대엔 놓인 병기들은 잘 손질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창도, 번뜩이는 검도, 위압적인 큰 도도 있었지만 운현의 시선을 끈 건 제일 구석에 있는 목검이었다.
‘잘됐네.’
운현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바로 목검을 쥐었다.
슥.
목검은 한눈에 보아도 잘 손질되어 있었다.
익숙한 목검의 감촉을 느끼며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휙, 휙.
운현은 가볍게 목검을 휘둘렀다.
느낌도 좋았다.
적당히 주변 거리를 가늠하며 운현은 자리를 잡았다.
문득 모용상아와 눈이 마주쳤다.
모용상아는 그 작은 손을 불끈 쥐고 잘하라는 듯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후후.’
운현은 속으로 웃었다.
작은 모용상아의 반짝이는 눈빛이 어쩐지 운현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운현은 목검을 쥐고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후우우우.”
한 번 숨을 내쉬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한 번 숨을 들이쉬자 주위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번민도, 고민도, 염려도 사라졌다.
오직 한 자루의 검만이 운현의 마음에 홀로 도도히 존재하고 있었다.
번쩍.
운현은 눈을 떴다.
언제 시작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운현의 검은 이미 백호수련검 제일식을 펼쳐 내고 있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검식이, 운현의 목검에서 거대한 물결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아!”
탁.
모용세가의 젊은 제자 고진철은 마지막 초식을 펼치며 기합을 내질렀다.
하지만 함께 터져 나와야 할 동료들의 기합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응?’
고진철이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있던 동료의 손이 고진철의 어깨를 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야, 야. 저거 봐.”
고진철은 눈살을 찌푸렸다.
수련 중에 대체 뭘 보라는 말인가?
하지만 무심코 고개를 돌린 고진철은 그 순간 굳어 버리고 말았다.
우우웅.
검이 울고 있었다.
칼날도 없는, 나무로 만든 목검이 문사 차림의 사내 손에서 검명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검명뿐만이 아니었다.
후우웅.
낯선 기운이 목검에 서려 있었다.
그 섬뜩한 기세가, 목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아지랑이처럼 허공에 궤적을 남겼다.
마치 공간 그 자체가 그 기세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처럼.
그것은 고진철이 난생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휘이잉.
투박한 목검은 흐르는 물처럼 유려하게 허공을 지났다.
그 검로는 너무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었다.
젊은 제자들은 그 엄청난 광경에 시선을 빼앗긴 채 다들 멍하니 서 있었다.
자신들이 무엇을 보는 것인지조차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고, 고수……!’
문사 차림의 저 청년은 고수였다.
그것도 젊은 제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수.
대제자 모용진이 신입 제자들에게 불호령을 내린 건 결코 과한 반응이 아니었던 것이다.
꿀꺽.
고진철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들고 있던 검은 어느새 아래로 늘어뜨린 채였다.
자신들이 수련 중이었다는 사실조차도, 이제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
운현의 수련은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수련조차도 운현에겐 마른 땅에 단비였다.
탁.
“후우우.”
검식을 마치고 운현은 숨을 골랐다.
사실 숨이 차진 않았지만 이렇게 호흡을 가다듬어야 비로소 수련이 끝나는 것 같았다.
검과 자신만 존재하던 세상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흐음.”
운현은 목검을 슬쩍 살펴보았다.
어딘가 부서졌다거나 하는 건 보이지 않았다.
남의 것이니 멀쩡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괜찮네.’
아쉬운 마음으로 고개를 들던 운현은 순간 흠칫했다.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어…….’
운현은 당황했다.
모용세가의 젊은 제자들이 저편에서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련을 하다 만 듯 손에 검을 들고 다들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그 표정이 다들 심상치가 않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운현은 눈을 껌뻑거렸다.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크흠.”
모용세가의 제자들이 일제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돌리는 방향은 제각각이었지만 헛기침은 거의 동시에 나왔기에, 연무장에 난데없이 헛기침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크흠, 크흠.”
젊은 제자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숙이며 딴청을 부렸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쳐다본 것인가 보군.’
먼저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니 운현의 잘못은 아닌 듯했다.
슥.
운현은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젊은 제자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고진철은 운현이 고개를 돌린 것을 확인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큰일 날 뻔했네.’
강호 무림에서 수련을 지켜보는 건 심각한 문제다.
지금처럼 젊은 제자들의 잘못이 없다 해도 그렇다.
고수가 작정하고 시비를 걸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 심정인지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고진철은 흘끔 운현을 바라보았다.
‘……고수.’
검기발현의 경지는 모든 무인들의 꿈이다.
그 경지를 이룬 사람이 바로 저기 있다.
저벅, 저벅.
운현은 목검을 들고 천천히 병기 거치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아까만 해도 허름한 문사 같던 그 모습이 고진철에겐 그토록 당당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