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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37화 (137/530)
  • 137화. 혼란의 시대

    풀썩.

    흙먼지가 일었다.

    전신처럼 검기를 휘두르던 남궁진천이 쓰러지고, 무제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켜보던 무림맹 대표자들도, 그리고 남궁세가의 정예들도 다만 침묵 속에 얼어붙은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수적들의 커다란 함성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와아!”

    “우아아아!”

    수적들은 병기를 든 손을 위로 치켜올리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천하의 남궁세가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남궁세가의 가주가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거꾸러진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에 수적들은 미친 듯 환호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그들의 소리는 큰 물처럼 계곡을 뒤덮었다.

    “뇌검이.”

    흑도회의 열혈도 묵혈엽이 침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갔군.”

    아무도 그 말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따각, 따각.

    문득 들려온 말발굽 소리에 대표자들이 눈을 들었다.

    한 명의 무사가 말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따각.

    무사는 조금 떨어진 곳에 말을 멈추고 내렸다.

    짙은 황색 무복을 입고 손목에 황색 띠를 맨 무사는 대표자들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무림맹 대표자들께 예를 올립니다.”

    그 목소리는 수적들의 환호성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렸다.

    황천대의 무사는 품 속에서 서찰을 꺼내 들었다.

    “이것은 수로채 연합에서 무림맹에 드리는 서한입니다.”

    대표자들 사이에서 작은 동요가 일었다.

    추측만 하던 ‘수로채 연합’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슥.

    제갈세가의 제갈연이 호위무사에게 눈짓을 했다.

    호위무사는 황천대 무사에게 달려가 서찰을 받았다.

    제갈연이 서찰을 건네받는데 황천대의 무사가 말했다.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황천대 무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이제 더 이상의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남궁세가의 정예들을 이대로 놓아주겠다는 의미였다.

    황천대 무사는 다시 예를 표하고 몸을 돌렸다.

    “잠깐.”

    제갈세가의 제갈연이 그를 불러 세웠다.

    “너는 누구냐?”

    눈빛과 기세, 그리고 내력이 담긴 목소리까지.

    눈앞의 황천대 무사는 상당한 무위를 지닌 자가 분명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저 일개 수적일 따름입니다.”

    그 목소리는 어쩐지 비웃는 듯했다.

    황천대 무사는 말에 휙 올라타고는 자리를 떴다.

    제갈연은 멀어져 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패배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암천무제라는 새로운 강자의 등장, 그리고 무엇보다 수로채 연합에 대한 소식은 강호 무림을 발칵 뒤집어 놓을 것이 분명했다.

    수십 년간 이어져 왔던 무림맹 체제가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계곡을 뒤흔드는 수적들의 환호 속에 대표자들은 침묵했다.

    이것이 단지 시작일뿐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대표자들의 마음속에 어둠처럼 짙게 깔리고 있었다.

    ***

    “오, 놀랍군.”

    문왕은 눈을 크게 뜨며 과장된 몸짓으로 박수를 쳤다.

    “과연 일품이군. 아무런 규칙도 없이 흐르는 화살, 유시라 했던가? 과연 절기라 할 만해.”

    문왕은 고개를 돌려 비련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들고 있던 작은 단궁은 벌써 모습을 감추어 보이지 않았다.

    “짧은 단궁으로 그런 위력을 보이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군.”

    문왕의 말에도 불구하고 비련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비련은 메마른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천하패령의 뜻은 분명히 이행되었습니다.”

    문왕은 조소를 흘렸다.

    그는 비련 가까이 서 있던 한 무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너.”

    “존명!”

    무사는 급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문왕은 그 무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어나서 저 년의 뺨을 쳐라.”

    무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문왕은 자신의 명을 거둔 법이 없다.

    이를 악문 무사는 벌떡 일어나서 즉시 비련의 얼굴을 후려쳤다.

    짜악.

    비련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의 고개가 돌아가고 입술 사이로 피가 비쳤다.

    “천하패령의 뜻이 이루어졌는지 판단하는 건 너 따위가 아니다.”

    촤락.

    부채를 펴 입을 가리며 문왕은 자그맣게 말했다.

    “……미천한 것 같으니.”

    그 말은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눈을 내리고 문왕과 비련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이었다.

    저벅.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무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어서 오시오.”

    문왕은 부채를 접으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반가운 듯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무엇들 하느냐? 뇌검을 죽인 영웅께서 돌아오지 않았느냐?”

    문왕의 호통에 수하들이 막 반응하려던 때였다.

    “남궁세가의 가주를 죽이는 것이.”

    묵직한 목소리가 모두의 움직임을 막았다.

    “상인께서 천하패령으로 친히 명하신 바였는가?”

    무제는 이곳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문왕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고로 무지한 것들에겐 공포가 최고의 통치 방법이라오.”

    “지금 나는.”

    암천무제는 눈을 빛내며 문왕에게 말했다.

    그 강렬한 기세에 문왕 옆에 서 있던 무사들마저 움찔할 정도였다.

    “상인께서 천하패령으로 남궁세가의 가주를 죽이라 명하셨는지 묻고 있네.”

    촥.

    문왕이 비단 부채를 펴 얼굴을 가렸다.

    무제의 기세 앞에서도 문왕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무위로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무제가 자신에게 아무 위해도 가하지 못함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제가 상인의 뜻을 받드는 한, 아니 무제에게 생명이 붙어 있는 한 말이다.

    “그것이 그리도 궁금하다면.”

    문왕은 조소를 머금으며 느릿하게 말했다.

    “상인께 직접 여쭤 보시게. 그대의 의심을 상인께서 어찌 받아들이실지 나도 궁금하니까.”

    무제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 이상 어쩌지는 못했다.

    슥.

    무제는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좋은 수하를 두었더군.”

    걸어 나가는 암천무제의 뒤로 문왕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주인이 할 일을 알아서 처리해 주는 수하라니, 정말 기특한 일이지 않소? 하하하.”

    조롱하는 듯한 문왕의 목소리에도 무제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던 비련 역시 무제를 따라 발을 옮겼다.

    사박.

    “따라오지 마라.”

    무제의 낮은 목소리에 비련이 흠칫 멈춰 섰다.

    비련이 쳐다보는 사이, 무제의 커다란 뒷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이런.”

    문왕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혀를 찼다.

    “네 주인이 너의 충정을 몰라주는구나. 쯧쯧.”

    비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제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몇 걸음을 걸어 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련의 모습은 마치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져 버렸다.

    “흥.”

    비련이 사라지자 문왕은 코웃음을 쳤다.

    착.

    부채를 접은 문왕의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

    “너희가 언제까지 날 무시하는지.”

    으드득.

    이를 갈며 문왕이 말했다.

    “어디 두고 보자.”

    계곡에서는 아직도 수적들의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문왕의 표정에 승리의 기쁨 같은 건 전혀 없었다.

    ***

    남궁세가 정예들은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고, 또 누군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혹해 했다.

    그러나 모두들 침묵하고 있는 것만은 동일했다.

    몰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없었다.

    무림맹 대표자들로부터 전갈이 오는 것과 함께 수적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신임 가주이자 새로운 뇌검이 된 남궁벽은 선대 가주 남궁진천의 시신을 직접 수습했다.

    남궁진천이 타던 백마도 주인의 죽음을 아는 듯 구슬프게 울었다.

    도무지 움직이려 하지 않던 백마는, 남궁진천의 시신을 실은 마차가 떠나자 그제야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남궁세가 정예들이 그 모습을 침통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서연의 시선은 그 광경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단 한 번.’

    이서연은 고개를 돌려 무제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남궁세가가 졌으니 이서연의 전공은 의미가 없어졌다.

    칼과 피가 난무하는 싸움터에서 그녀가 애써 손에 쥔 전공을, 암천무제는 단번에 헛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모든 것을 바꿔 버렸어.’

    무제가 바꿔 버린 건 단지 이 계곡의 싸움만이 아니다.

    이제 장강을 오가는 그 누구도 수로채 연합을 무시할 수 없다.

    남궁세가의 가주를 꺾은 암천무제를, 그리고 수로채 연합을 감히 누가 경시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수로채 연합과 무림맹이 당장 전면전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무림맹은 패배라는 상처를 안게 되었고 수로채 연합이라는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쩌면 강호 무림에 격변이 찾아올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득.

    이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눈 앞에 생생한 그 광경에 이서연은 새삼 몸을 떨었다.

    슥.

    이서연은 어둠 속으로 손을 뻗었다.

    무제와 뇌검의 경지는 이서연과 너무나 큰 격차가 있다.

    아예 다른 세상이라 해도 좋을 격차가.

    그러나 이서연은 그들과 자신이 어쩐지 그리 멀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그건 그런 경지를 지닌 또 다른 사람을 이미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녀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바로 그 사람, 운현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락.

    이서연은 손을 거뒀다.

    하얀 손이 소매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이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은 아니지.’

    이서연의 붉은 입술이 달빛 아래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

    뇌검 남궁진천의 패배라는 충격적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남궁세가의 패퇴와 남궁진천의 죽음, 그리고 그를 꺾은 암천무제의 무위는 강호 무림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강의 분위기도 삽시간에 변했다.

    수로채 연합의 힘을 본 상단들은 자발적으로 통행세를 바치기 시작했다.

    연합에 이름을 올리려는 수채들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장강 유역의 크고 작은 문파와 무관 들은 수로채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직 수로채 연합은 야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물길, 장강에 혼란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으음.”

    운현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장강의 사건이 온 강호를 울리고 있었지만 운현은 예외였다.

    모용세가 연무장 구석에 앉아 있는 서기 운현에게 장강의 사건은 아직 전해지지도 않았을뿐더러, 알았다 해도 관심조차 없는 딴 세상 일에 불과했다.

    지금 운현을 고민하게 하는 건 바로 철정산에서 만났던 독선의 일이이었다.

    “천하제일문이라…….”

    독선은 그야말로 난데없는 제안을 던지고 갔다.

    당문을 천하제일문으로 만들어 준다면 천하를 주겠다는 것이 바로 독선의 제안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서 거절했지만, 문제는 독선이 이대로 뜻을 접을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게 순순히 물러난 건 아마도 화산지약 때문이겠지만.’

    독선이 보여 준 가공할 절기, 천향접을 생각하면 그냥 물러난 건 아니다.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인 독선이 입 밖으로 꺼낸 말을 순순히 거둘 리가 없다.

    ‘이러다 또 이상한 일로 번지는 거 아냐?’

    검성 이검학이 건넨 검 한 자루는, 운현이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북해빙궁과 비무를 하게 만들었다.

    신승 불영이 말한 ‘검성의 후계’라는 한마디는, 운현이 부인했어도 무림맹의 특별 취급을 가져왔다.

    그러니 독선의 제안이 앞으로 어떤 파급효과를 불러올지 운현으로선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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