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36화 (136/530)

136화. 얽매인 자들

콰앙.

커다란 폭음과 거센 충격파가 두 사람을 휩쓸고 지나갔다.

휘이잉.

두 자루의 검이 부딪히며 만들어 낸 폭풍에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휘날렸다.

그러나 무제와 뇌검의 시선은 서로를 향한 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휙.

두 사람이 거리를 벌렸다.

서로를 마주하고 선 두 사람은 검을 든 채 날카로운 시선을 교환했다.

“과연.”

먼저 입을 연 것은 암천무제였다.

그는 뇌검 남궁진천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뇌검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무위요.”

“과찬의 말이군.”

쓴웃음을 지으며 남궁진천이 말했다.

암천무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오늘 그대를 만나 비로소 진정한 남궁가의 검을 보았소. 만일 그대를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

암천무제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이런 식으로 만나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의 말이 진심임을 남궁진천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는 달리 상대의 기세가 처음과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사실도.

“후후.”

남궁진천은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무제의 말투는 사뭇 오만했지만 그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뇌검 남궁진천 자신이 그것을 인정했다.

남궁진천은 마음을 정했다.

“암천무제라 했나?”

무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진천이 무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자네와 검을 겨루게 된 것을.”

남궁진천의 눈동자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을 뒤덮고 있던 불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야 비로소 모든 것이 분명하고 정확하게 보였다.

무제를 바라보는 뇌검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나는 자랑으로 생각하겠네.”

우웅.

뇌검의 결의에 응하듯 그의 검이 울었다.

그리고 뇌검의 검기가 변화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천천히 잦아드는가 싶더니, 마치 강철처럼 강렬한 존재감을 가지고 유형화된 것이다.

그 모습에 무제의 표정이 변했다.

“나 역시.”

웅.

무제의 검 역시 나지막이 울었다.

그리고 똑같은 변화가 무제의 검에도 나타났다.

“그러하오.”

뇌검을 똑바로 바라보며 무제가 말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러나 서로의 눈동자에 이글거리는 강렬한 불길만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무인의 본능이자 칼을 든 자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우우우우우웅.

침묵은 길었다.

그러나 기다림은 순간이었다.

쉭.

먼저 움직인 사람은 뇌검 남궁진천이었다.

그의 검은 푸른 빛을 뿌리며 무제를 향해 짓쳐 들어갔다.

설령 태산이라도 가를 듯한 엄청난 기세였다.

반면 무제의 검은 한발 늦게, 마치 무거운 둔기를 휘두르듯 느릿하게 움직여 나갔다.

기세만은 여전히 어마어마했지만 무제의 검은 분명 뇌검보다 늦었다.

‘이겼다.’

뇌검이 순간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신의 검이 먼저 상대를 가르고 지나갈 것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우웅.

그리고 뇌검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무제의 검은 분명 늦었다.

그리고 느렸다.

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느릿한 무제의 검은 뇌검의 눈앞으로 짓쳐 들고 있었다.

반면 뇌검 자신의 검은 아직도 상대에 닿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뇌검은 경악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무제의 경지가 뇌검 자신보다 위였던 것이다.

콰아앙.

폭음이 터져 나왔다.

뇌검에게는 너무나 길었던, 그러나 다른 이들에겐 단 한순간에 불과했던 격돌은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결과를 보지 못했다.

뒤이어 일어난 흙먼지가 두터운 휘장처럼 두 사람의 모습을 가렸기 때문이다.

“으윽.”

“큭.”

히히힝.

격돌의 후폭풍에 남궁세가의 정예들이 신음을 흘리고 말들이 동요했다.

두 사람의 격돌이 가져온 충격이 그들의 내력마저 뒤흔든 것이다.

거리를 두고 있던 무림맹 대표자들조차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대결은 대표자들조차 상상도 못하던 것이었다.

흙먼지 탓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면서도 대표자들은 그 결과를 보기 위해 눈을 돌리지 않았다.

후우우.

바람이 불고 흙먼지가 몰려가자 모두의 눈앞에 격돌의 결과가 나타났다.

“……이럴 수가.”

누군가 신음처럼 내뱉었다.

결과는 분명했다.

서로를 스쳐지나간 무제와 뇌검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서 있는 무제에 비해, 뇌검은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을 지지대 삼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이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졌어.’

뇌검이 졌다.

그 충격적인 결과 앞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남궁세가의 정예들도, 황천대도,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수적들까지, 모두가 무거운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허허.”

무릎꿇은 뇌검이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이 졌다.

그런데도 마음은 어지럽지 않았다.

분노도, 슬픔도, 미련조차도 없었다.

무인으로서 뇌검은 이 대결에 더없이 만족하고 있었다.

스릉.

무제가 검을 갈무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뇌검은 고개를 돌렸다.

검을 넣은 무제는 뇌검 앞으로 걸어왔다.

저벅, 저벅.

무제는 뇌검 앞에서 멈춰 섰다.

한쪽 무릎을 꿇은 뇌검을 내려다보며 무제는 말했다.

“훌륭한 일검이었소.”

무제의 눈빛에 조롱이나 거만함은 없었다.

“자네 역시.”

뇌검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무제는 고개를 끄덕여 뇌검의 찬사를 받아들였다.

“삼 년간 봉문하시오.”

그것은 승자의 요구였다.

가주가 패했으니 삼 년의 봉문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삼 년 후.”

뇌검을 바라보며 무제가 말했다.

“당신과 다시 만날 때를 기대하겠소.”

“허허허.”

대답 대신 뇌검은 웃었다.

“다음은 없네.”

슥.

뇌검이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검이 들린 채였다.

“나와 자네의 대결은 이것이 끝일세.”

무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의 대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뇌검은 웃었다.

무인으로서 뇌검은 무제의 말에 공감했다.

아니, 그의 말이 진정으로 기뻤다.

그러나 가주로서는 아니었다.

슥.

뇌검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세가의 정예들과, 그 앞에 서 있는 외청 청주이자 자신의 아우인 철검 남궁벽을 바라보았다.

“철검 남궁벽!”

남궁진천의 목소리가 계곡에 쩌렁쩌렁 울렸다.

철검 남궁벽은 지체 없이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그의 무릎이 땅을 울리고 그는 절규하듯 가주의 부름에 대답했다.

“남궁벽! 가주의 명을 기다립니다!”

남궁벽은 커다란 눈으로 가주이자 형님인 뇌검 남궁진천을 바라보았다.

죽음조차 불사할 각오가 그의 눈동자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첫째! 너는 남궁세가로 하여금 절대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게 하라.”

“존명!”

철검 남궁벽은 가주의 말에 지체 없이 소리쳐 대답했다.

남궁진천은 계속 말을 이었다.

“둘째! 이 시간 이후 남궁진으로 하여금 외청 청주의 위(位)를 잇게 하라.”

“존명!”

“셋째! 힘을 기르기 전에는 결단코 대사를 꾀하지 말라.”

“존명!”

“이 시간 이후 남궁세가의 가주는……, 바로 너다.”

남궁벽은 대답하지 못했다.

뇌검 남궁진천은 미소를 머금으며 철검 남궁벽을 쳐다보았다.

“네게 큰 짐을 맡기는구나.”

철검 남궁벽의 눈에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형님…….”

한 번도 눈물 흘리는 것을 보지 못했던, 철검(鐵劍)이라는 호를 얻은 사내의 눈에 굵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우의 모습에 뇌검은 가슴이 뭉클했다.

하지만 동시에 뇌검은 비로소 홀가분함을 느꼈다.

이로서 자신의 패배는 ‘전대 가주’의 것이 되었다.

남궁진천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겠으나 남궁세가는 그 굴레를 지지 않으리라.

가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삼 년의 봉문이라는 굴욕을 받아들일 이유 또한 없어졌다.

이제는 ‘전대 가주’로서 마지막 의무를 다할 때였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바라던 소망은 바로 이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남궁진천은 생각했다.

더 이상 뇌검이 아닌, 남궁진천이라는 무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말이다.

슥.

“기쁘군.”

검을 들어 올리며 남궁진천이 말했다.

“내 목숨을 거둬갈 자가 바로 자네 같은 강자여서.”

남궁진천의 눈은 빛나고 있었으나 무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짓 마시오.”

무제는 남궁진천의 목숨을 거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비록 상대가 그것을 바란다 해도 무제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남궁진천 역시 그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남궁진천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하아아아!”

기합을 내지르며 남궁진천이 무제에게 짓쳐 들었다.

무제는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쥐었다.

이런 막무가내의 공격이라면 상대를 무력화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쉬리릭.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무제는 즉시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쉭, 카앙.

어둠 속에 날아오던 새카만 화살이 무제의 검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그러나 화살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쉬쉬쉭.

새카만 화살이 남궁진천을 노리고 짓쳐 들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무제가 외쳤다.

그의 시선은 어두움 너머, 문왕이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문왕과 함께 있던 무사들이 남궁진천을 향해 화살을 날린 것이다.

무제는 웃고 있는 문왕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휙, 카앙.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 낸 무제가 문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당장…….”

슈르르르르.

뱀이 지나는 듯한 거북한 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무제의 시선이 향한 그곳에, 작은 단궁을 잡고 있는 비련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활에 있어야 할 화살은 이미 무제의 옆을 물 흐르듯 비껴 지나가고 있었다.

무제가 몸을 날린 바로 그 순간을 노린 화살.

바로 비련의 절기, 유시(流矢)였다.

퍼억.

“큭.”

무제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남궁진천이 신음을 흘렸다.

으득.

발을 멈춘 무제는 이를 악물었다.

비련의 화살은 이미 남궁진천의 심장을 꿰뚫어 버린 후였다.

“후후.”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이 남궁진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무제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남궁진천은 말했다.

“자네도, 자유롭지 못한 몸이었나 보군.”

남궁진천은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이토록 강한 그대가 자유롭지 못하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 않나? 참으로……, 쿨럭.”

남궁진천은 움찔 경련하며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무제는 침통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뜨고는 나지막이 답했다.

“그것은 그대 또한 마찬가지요.”

남궁진천의 마지막 선택은 결코 무인(武人)의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죽음으로 남궁진천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실패한 가주의 책임을 다하는 것뿐이었으니까.

“후후후.”

남궁진천은 웃었다.

“그래, 그렇지. 그래서…….”

남궁진천의 목소리는 점점 가늘어졌다.

그 생명이 꺼져 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우스운 일이라는 걸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궁진천의 몸은 무너져 내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