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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35화 (135/530)
  • 135화. 뇌검과 무제

    황천대에 뛰어든 뇌검 남궁진천은 무인지경으로 그들 사이를 오가며 검기를 뿌려 대고 있었다.

    그의 시퍼런 검기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짙은 황색 무복을 입은 자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일대제자에 필적한다던 황천대 백여 명이, 뇌검 남궁진천 한 사람을 막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으음, 이대로라면.’

    소림의 진허가 남궁세가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감하던 바로 그때였다.

    “응?”

    혁련세가의 대표자 혁련필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저들이 대응을 달리하고 있군.”

    진허는 눈을 들었다.

    황천대가 좌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뇌검 남궁진천을 향해 덤벼들던 황천대가 천천히 뒤로 물러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후퇴가 아니었다.

    저벅, 저벅.

    “설마.”

    혁련필이 눈썹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설마는 현실이 되었다.

    좌우로 갈라져 물러서고 있는 황천대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흑색 무복과 외투를 입은 그 사내는 멀리서 보기에도 강렬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자가 무심파 채주 이무심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

    누군가의 물음에 묵혈엽이 와락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수채의 채주 따위가 저런 기세를 뿜어낼 수 있을 리 없소.”

    그의 말대로였다.

    흑색 무복을 입은 그 사내의 기세는 결코 범상치 않았다.

    여기서도 그 기세가 느껴질 정도인데, 그를 마주한 남궁진천이 느끼는 압박감은 어떠하랴?

    ‘허어.’

    소림의 대표자 진허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불호를 외웠다.

    무언가 대단히 불안한 예감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검기를 흩뿌리던 뇌검 남궁진천은 움직임을 멈췄다.

    천천히 물러나는 황천대 사이로 걸어 나오는 한 사람을 남궁진천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뿜어내는 그 범상치 않은 기세도.

    저벅, 저벅.

    흑색 무복과 외투를 걸친 그는 커다란 체격을 가진 강한 인상의 사내였다.

    나이는 자신보다 훨씬 젊어 보였지만 사내의 기세는 그 무위가 결코 낮지 않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저벅.

    흑색 무복을 입은 사내가 멈춰 섰다.

    남궁진천 역시 백마를 멈추고 사내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묵직한 음성으로 남궁진천이 말했다.

    “수적들과 함께 있을 사람은 아닌 듯하군.”

    그건 남궁진천의 진심이었다.

    고수의 경지에 이른 자들에겐 숨길 수 없는 기세가 있다.

    지금 남궁진천 앞에 선 흑색 무복의 사내는 대단히 진중하고 무거운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청명하고 강렬한 그 눈빛은 결코 수적 따위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명문정파의 고수나 가질 법한 기세가, 흑색 무복의 사내에게선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대 역시.”

    흑색 무복을 입은 사내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비열한 세가의 무리들과 함께 있을 자는 아니로군.”

    그것이 비난이나 도발이 아님을 남궁진천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상대를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상대 역시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후후.”

    남궁진천은 웃음을 흘렸다.

    “우리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어야 했군.”

    그것은 진심이자 호감이었다.

    강한 상대를 갈구하는 무인의 본능이 지금 남궁진천 안에서 꿈틀거린 것이다.

    휘릭.

    남궁진천은 말에서 내렸다.

    자신을 위해 쏟아지는 화살 속으로 돌진해 준 충성스러운 백마를 한번 쓰다듬어 준 후, 남궁진천은 손바닥으로 말을 쳤다.

    “가라.”

    탁.

    똑똑한 말은 주인의 뜻을 따라 즉시 자리를 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곧 멈춰 섰다.

    “녀석.”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 남궁진천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흑색 무복의 사내에게 예를 표했다.

    슥.

    그것은 파격이었다.

    비록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해도 남궁세가의 가주가 먼저 예를 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림맹의 대표자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남궁가의 가주, 남궁진천일세. 뇌검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지.”

    스릉.

    흑색 무복을 입은 사내가 검을 뽑았다.

    곧게 세운 칼날이 저물어 가고 있는 석양에 붉게 빛났다.

    슥.

    그는 칼을 아래로 향하고 두 손을 모았다.

    “나는 어두운 하늘 아래 서 있는 자, 암천무제요.”

    예를 표하는 그의 눈동자는 번뜩이는 칼날보다 더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뇌검을 상대하게 되어 영광이오.”

    암천무제라는 명호가 이름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남궁진천은 상관하지 않았다.

    상대는 자신의 검을 들어 스스로를 밝혔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무인의 예를 다한 것이다.

    슥.

    암천무제가 검을 세웠다.

    웅.

    나지막한 울음이 그의 검에서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암천무제의 검에 낯선 기운이 일렁이나 싶더니 곧 붉은 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욱.

    그 흔들림 없는 붉은 검기는 뇌검 남궁진천의 검에서 뻗어 나오던 검기와 비교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뇌검의 검에도 푸른 검기가 모습을 나타냈다.

    우웅, 우웅.

    두 자루의 검이 우는 소리가 피비린내 나는 계곡 사이로 공명을 일으키며 퍼져 나갔다.

    황혼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그곳에서, 붉고 푸른 두 검기는 섬뜩한 빛을 뿌리며 일렁이고 있었다.

    ‘쉽지 않겠군.’

    문득 남궁진천은 생각했다.

    이 경지에 이른 후 더 이상 상대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굳이 꼽자면 다른 사대세가의 가주나 소림과 화산의 장문인 정도다.

    비록 그들의 경지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도 놀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허나 오늘,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적수를 발견했다.

    그것은 놀라움과 동시에 강렬한 승부욕을 불러일으켰다.

    강한 상대를 갈구하는 무인의 본능이 남궁진천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허나 쉽지 않아야 의미가 있는 법.’

    약한 상대 따위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

    오직 강자만이 남궁진천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며, 그래야 검을 든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웅.

    나지막한 검 울음소리가 어쩐지 기쁨의 환호처럼 들렸다.

    남궁진천은 천천히 검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천천히 황혼이 저물어 가고 있었지만 남궁진천의 눈에는 오직 암천무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쉭.

    그리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의 검은 이미 격돌하고 있었다.

    콰앙.

    붉고 푸른 두 검기가 서로 맞부딪히고 격렬한 폭음이 계곡을 뒤흔들었다.

    ***

    쾅, 콰앙.

    “으음…….”

    대표자 중 누군가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남궁진천과 암천무제의 격돌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앙.

    두 사람의 격돌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들의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폭음이 계곡을 뒤흔들었다.

    무림맹 대표자들과 남궁세가의 정예들은 물론이고 황천대와 수적들마저 검기가 난무하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서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맙소사.’

    이서연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미 동정호에서 운현의 검무를 보았으나, 남궁진천과 암천무제의 격돌은 또 다른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비교 같은 건 할 수 없었다.

    운현의 검무와 눈앞의 격돌은 완연히 그 궤를 달리하는 데다가, 그녀의 안목으로서는 차이나 우위를 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운현의 검무가 거대하고 압도적인 어떤 흐름과 같다면, 눈앞의 대결은 대단히 파괴적이고 난폭하다는 정도일까.

    그러나 이서연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매의 눈이라고 평가받는 그녀의 안목은 이미 운현의 검무를 보았고, 그래서 그녀는 불현듯 알아차릴 수 있었다.

    뇌검 남궁진천이 암천무제를 상대로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설마.’

    이서연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안목은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뇌검이.’

    이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밀리다니.’

    남궁세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르리라.

    번득이는 검기와 폭음이 그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을 뿐 아니라, 저런 대결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테니까.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 또한 남궁세가라는 자부심으로 스스로 부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암천무제.’

    이서연은 입술을 깨문 채 대결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이미 남궁진천이 아니라 암천무제라 밝힌 사내에게 가 있었다.

    그것은 승자를 향하는 그녀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저자는 대체 누구지?’

    이서연은 굳은 표정으로 암천무제를 바라보았다.

    그 탓에 그녀는 주위에 선 남궁세가 정예들의 표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뇌검 남궁진천의 검에서 검기가 뿜어 나왔을 때 자부심으로 눈을 빛내던 남궁세가의 정예들.

    대결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표정에 옅게 깔리는 것은 바로 불안이라는 이름의 그늘이었다.

    ***

    “쯧.”

    화려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혀를 차자 주위에 서 있던 이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지루하군. 그만 끝낼 때도 되지 않았나?”

    붉은 단 위에 앉아 있던 청년은 노골적으로 눈을 찌푸렸다.

    그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멀리서 남궁진천과 암천무제의 대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비련.”

    청년이 고개를 돌리자 머리에 얹힌 작은 금관의 정교한 장식들이 반짝이며 흔들렸다.

    대결을 지켜보던 젊은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사락.

    하얀 무복을 입은 그녀, 비련은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명하십시오, 문왕 전하.”

    그것은 매우 가늘고 높낮이조차 없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문왕이라 불린 청년은 작은 비단 부채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네가 보기엔 어떠냐? 그가 뇌검을 이길 수 있으리라 보느냐?”

    반쯤 빈정거리는 투로 그가 물었다.

    비련은 나지막이 답했다.

    “무제께는 패배가 없습니다.”

    세심하게 다듬어진 문왕의 가느다란 눈썹이 크게 일그러졌다.

    그는 무제를 싫어한다.

    심지어 ‘무제’라는 단어마저도 불편하게 여길 만큼.

    그래서 문왕 주변의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무제라는 호칭을 피했다.

    “흥.”

    촤락.

    문왕이 화려한 비단 부채를 펴서 눈 아래를 가렸다.

    “그래? 그렇다면 오늘 뇌검은 반드시 죽겠군.”

    “그것은 무제께서 정하실 일입니다.”

    비련은 담담하게 말했다.

    무제는 이제껏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그러나 상대의 목숨을 빼앗은 적은 대단히 드물었다.

    특히나 뇌검 같은 당당한 무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무제를 잘 아는 비련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었다.

    “호오, 그래?”

    문왕은 비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상인께서 천하패령으로 명하신 일인데도 말인가?”

    비련의 가녀린 어깨가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보며 문왕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몰랐더냐? 허나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

    슥.

    고개를 돌려 대결을 바라보며 문왕이 말했다.

    “아무리 그가 오만하다 해도 감히 천하패령을 거역하진 않을 테니까. 뇌검을 살려주는 것이 곧 상인께 반역이 됨을 어찌 모르겠느냐?”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문왕은 힐끗 비련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비련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천하패령으로 명하신 일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문왕은 만지며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부채를 접었다.

    탁.

    “뇌검은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천하패령으로 명하신 상인의 뜻이다.”

    젊은 문왕은 비련을 똑바로 바라보며 윽박지르듯 말했다.

    비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문왕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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