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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34화 (134/530)

134화. 욕심을 드러내는 때

남궁윤이 되묻자 이서연이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가던 남궁윤은 다른 수적들을 독려하는 한 사내를 보았다.

방금 전 놓친 자보다 지위가 높아 보이는 수적이다.

“호암상단의 이서연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리하도록 하지.”

과장된 태도로 예를 표한 남궁윤은 가볍게 땅을 박찼다.

그리고 이서연이 목표로 찍은 수적을 향해 짓쳐 들었다.

양보한다는 말과는 사뭇 다른 행동이었지만 이서연은 놀라지 않았다.

“헉! 막아라!”

안색이 변한 그 수적이 외치자 다른 수적들이 남궁윤을 막아섰다.

쉬식.

남궁윤의 손에서 칼이 번득이자 수적들의 피가 튀었다.

하지만 삼재진을 이룬 수적들은 남궁윤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남궁윤이 노리던 바였다.

갑자기 나타난 남궁윤을 상대하느라 그 일대의 수적들이 흐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탁.

이서연은 발을 굴렀다.

남궁윤이 주위를 끌어 준 덕분에 목표로 한 수적을 향한 길이 열렸다.

쉭.

이서연은 빠르고 유연하게 수적들과 남궁윤을 스쳐 지났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윤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것을 이서연은 놓치지 않았다.

―호암상단의 이서연.

조금 전 들은 남궁윤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탓.

이서연이 목표로 삼은 수적은 바로 앞에 있었다.

수적은 아직도 이서연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수하들에게 무어라 소리치기에 정신이 없었다.

치열한 전투의 광경이 양옆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느끼며 이서연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호암상단의, 이서연.’

수적이 이서연을 발견한 것과 이서연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흔들리는 수적의 눈동자에서 이서연은 승리를 예감했다.

그것은 이서연이 이제껏 숱하게 보아 왔던 패배자의 눈빛이었다.

서걱.

수적이 다급히 검을 들어올리는 순간 이서연의 검이 그의 목을 베었다.

파아앗.

솟구치는 뜨거운 피가 한발 늦게 주인의 죽음을 알렸다.

탁.

땅에 내려선 이서연은 천천히 뒤돌아서며 자신이 이미 확신하고 있던 결과를 지켜보았다.

생기를 잃은 수적의 몸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힘없이 땅으로 무너졌다.

털썩.

‘……하지만 언젠가는.’

호암상단이라는 이름은 이서연에게 특권을 의미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의 실수조차 용서받을 수 없는 곳.

호암상단은 그녀가 태어나면서부터 내던져진 전쟁터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쟁취해야만 할, 그녀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했다.

“호암상단의 이서연이 아니라, 이서연의 호암상단이라고 불리게 될 거야.”

짙은 피냄새가 퍼져 나갔다.

방금 죽은 수적이 제법 지위가 있었는지 주변의 수적들이 혼란에 빠졌다.

이서연은 수적들이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았다.

단지 주변 일대만이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수적들이 후퇴하며 양측의 치열한 난전도 점차 소강상태에 들어서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정예들 역시 물러나는 수적들을 경계할 뿐 뒤쫓지는 않았다.

‘여기까지인가?’

이서연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직감했다.

남궁세가가 수적들을 추격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했다.

진짜 적이라 할 수 있는 ‘황천대’와 싸울 것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서연이 나설 자리도 없어진다.

아무리 이서연이 남궁세가에서 무공을 배웠다지만, 세가의 일대제자들에 비할 정도는 못되기 때문이다.

사락.

이서연은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수적들의 비명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밤하늘에는 차가운 달빛이 빛나고 있었다.

“역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장을 지켜보던 제갈세가의 무림맹 대표 제갈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장강의 수채들이 다시 연합을 결성한 것이 분명하군요.”

옆에 있던 무림맹 대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태는 그들이 우려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남궁세가에 맞선 수적들은 무심파만이 아니었다.

장강의 수채들, 적어도 대여섯 개 이상의 규모 있는 수채들이 동원된 것이 분명했다.

수적들이 다시 연합을 결성한 것이다.

“어째서 저들이 다시 뭉친 걸까요?”

제갈연은 의아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대체 무엇이, 지난 삼십 년간 숨죽이던 저들을 다시 움직이게 했겠습니까?”

그건 다른 대표자들 모두의 공통된 의문이기도 했다.

삼십 년 전 무림맹에 의해 무너진 이후 사실상 명맥만 유지해 오던 장강수로채 연합이다.

무림맹이 있는 이상 그들이 다시 일어설 여지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도 남궁세가를 상대로 연합을 일으킬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힘을 손에 넣은 것이겠지요.”

무당의 대표자 청진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적이 범죄를 삼가는 것은 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욕심을 드러내었다는 것은 곧 벌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만한 힘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무림맹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니, 대체 무슨 힘을 얻었기에 말입니까?”

혁련세가의 혁련필이 물었다.

“반드시 힘을 얻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청진의 답을 대신했다.

소림의 대표자 진허였다.

“욕심은 눈을 가리고 판단을 흐리는 법. 저들이 정말 힘을 손에 넣은 것인지, 아니면 탐욕으로 인해 눈이 어두워진 것인지는 곧 증명될 것입니다.”

진허는 합장을 하며 불호를 외웠다.

그의 말대로였다.

이제 곧 ‘황천대’가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수적들이 남궁세가에 맞설 힘을 손에 넣었는지, 아니면 그저 무모한 발악에 불과한 일이었는지 말이다.

“쯧, 어느 쪽이든 반갑지는 않구려.”

누군가의 나직한 투덜거림은 대표자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말해 주고 있었다.

수로채 연합이 진짜 힘을 손에 넣었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였다.

그저 무모한 발악이었다 해도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수적들을 토벌한 남궁세가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장강에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파는 많다.

남궁세가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문파들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을 의미한다.

남궁세가와 무심파, 아니 장강수로채 연합과의 싸움을 지켜보는 무림맹 대표자들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저들이 나왔구려.”

누군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무림맹 대표자들의 상념을 깨트렸다.

대표자들은 일제히 한곳을 바라보았다.

수적들이 물러나는 곳 옆으로 짙은 황색 무복을 입은 무리가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제.”

누군가 긴장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궁세가의 진짜 힘을 볼 차례로군요.”

무림맹 대표자들이 이번 참관에 동행한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남궁세가의 가주, 뇌검 남궁진천의 진짜 무위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 순간이 이제 그들의 눈앞에 도래한 것이다.

대표자들은 눈을 빛내며 상황을 주시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보여 주는 무위에 따라 무림맹의 많은 것이 변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하얀 말을 타고 전장을 지켜보던 남궁세가의 가주 뇌검 남궁진천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그와 동시에 옆에 있던 외청 청주 남궁벽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드디어, 저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남궁진천은 모르지 않았다.

감히 수적들 따위가 남궁세가의 피를 흘리게 했다.

그 핏값을 이제야 받아낼 때가 된 것이다.

“제자들을 뒤로 물려라.”

가주 남궁진천의 명에 외청 청주 남궁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펄럭.

뒷편에서 누군가 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고, 가주 남궁진천은 천천히 말을 앞으로 몰았다.

“가주님.”

“자네는 여기 있게.”

남궁진천이 남궁벽에게 말했다.

“이곳은 나 혼자로도 충분하니까.”

말하는 남궁진천의 표정은 엄숙했다.

남궁벽은 가주의 명을 받들어 말을 멈췄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세가의 제자들 다섯을 뒤따르게 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창을 든 제자들은 말을 타고 거리를 둔 채 가주를 뒤따랐다.

따각, 따각.

앞으로 나와 있던 남궁세가의 제자들이 뒤로 물러나고, 가주 남궁진천은 그 사이를 지나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황천대를 향해 나가는 그 모습은 마치 신화에 나오는 전신처럼 위엄이 넘쳤다.

“크흠.”

지켜보던 대표자 중 누군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저들이 그 황천대로군요.”

애써 남궁진천의 모습에서 눈을 돌린 것은 질투 때문이리라.

그러나 황천대 역시 함부로 볼 상대는 아니었다.

짙은 황색 무복과 황색 띠를 손목에 맨 그들은 풍기는 기세부터가 다른 수적들과 사뭇 달랐다.

그 숫자 또한 듣던 것과 달리 백여 명에 이르렀다.

남궁세가의 정예들이 지쳐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승패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따각, 따각.

그러나 남궁진천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뒤따르던 다섯 제자들이 거리를 두고 멈춰 선 이후에도, 남궁진천은 그대로 말을 몰아 황천대를 향해 달렸다.

말 위에서 사용하는 장병기 역시 없었다.

하지만 남궁진천에겐 그런 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쉭.

거리가 가까워지지자 황천대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그것이 신호인 양, 수많은 화살이 남궁진천을 향해 쏘아졌다.

파바바박.

빗발치는 화살을 향해 남궁진천은 검을 뽑았다.

우우웅.

그 순간 낯선 기운이 남궁진천의 검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시퍼런 검기가 되어 그의 검에서 줄기줄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헉!”

지켜보던 무림맹 대표자들이 헛바람을 삼켰다.

“거, 검기!”

무림맹 체제가 성립된 후 수십 년간 강호에는 커다란 분쟁이 없었다.

가주나 문파 수장들의 실력은 소문만 무성할 뿐 그들의 실제 무위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대표자들의 눈앞에 남궁세가의 가주가 자신의 무위를 아낌없이 드러낸 것이다.

후우웅.

남궁진천이 검을 휘두르자 곧게 뻗어 나간 시퍼런 검기가 허공에 춤을 추었다.

쏟아지던 화살들은 그 검기 앞에서 무력하게 잘려 나갔다.

두두두.

남궁진천의 말은 눈처럼 하얀 갈기를 휘날리며 순식간에 황천대로 짓쳐 들었다.

콰직.

백마를 탄 남궁진천은 푸른 검기를 휘두르며 황천대 한복판을 휘저었다.

화살도 더 이상 날아오지 못했다.

황천대가 사방에서 남궁진천을 압박했지만 시퍼런 검기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허어.”

무림맹 대표자들은 창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유자재로 검기를 다루는 남궁진천의 모습은 과거 정사대전 당시 환우오천존만이 보여 주던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검기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뇌검의 모습은 그의 경지가 곧 그 이상으로 갈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뇌검 시주의 무위가 저 정도였다니…….”

소림의 진허는 나지막이 한탄을 흘렸다.

뇌검 남궁진천의 무위는 그로서도 예상외였다.

남궁세가를 비롯한 사대세가는 일반적으로 소림이나 화산, 무당보다 아래로 여겨졌다.

그러나 뇌검 남궁진천의 검기는 그런 일반적인 평가를 무색하게 할 정도였다.

‘남궁세가가 저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진허는 문득 생각했다.

남궁세가가 저 경지에 이르렀다면 다른 세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들 역시 저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는 것이 옳으리라.

‘무림맹의 갈 길이 평탄치는 않겠구나.’

조금 전 무당의 청진은 말했다.

탐욕을 가진 이가 자신의 욕심을 드러내는 것은 힘을 얻었을 때라고.

그렇다면 힘을 가진 사대세가가 어찌 가만히 있을까?

“허어.”

진허는 다시 한번 탄식을 흘리며 나지막이 불호를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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