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장강의 혈투
운현은 그제야 독선이 뒤로 물러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나름의 유예였던 것이다.
“이래도 내가 사람을 잘못 찾았다 하겠느냐?”
독선이 웃었다. 그것은 분명한 득의의 미소였다.
그러나 운현의 눈동자 역시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운현은 말했다.
“저는 천하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선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의 깊은 눈동자는 운현을 주목하고 있었다.
“한때는 저도 천하를 손에 쥐었다 생각했습니다. 아니, 실은 그것도 그저 제 착각일 뿐이었지만.”
운현은 쓴웃음을 흘렸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천하 모든 권력의 정점, 황궁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황제를 보필하며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꿈꾸리라.
자신의 처지가 복마전의 나락 밑바닥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도 그리 나쁜 시절은 아니었습니다.”
화려하고 거대한 황궁에서 운현이 찾은 것은 권력도 부귀도 아니었다.
그것은 소중한 사람들과 마음 속 한 자루의 검, 그리고 자신만의 길[道]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운현이 황궁에서 발견한 소중한 것들이었다.
“그러니 저는 천하를 원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독선의 깊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운현이 말했다.
“저는 천하와 더불어 사는 것을 원합니다.”
독선은 침묵했다.
깊은 눈동자로 운현을 바라보던 독선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독선의 눈동자에는 새파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리석구나.”
독선이 말했다.
“너는 천하와 더불어 살고자 할지라도 천하는 너를 두려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희미한 조소가 독선의 눈동자에 떠올랐다.
“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너를 두려워할 것이며, 숭배할 것이며, 또한 증오할 터다. 강호 무림은 은과 원이 가득한 바다와 같으니 이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후우웅.
독선 주변의 기세가 난폭하게 요동쳤다.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독선이 말했다.
“네가 주인이 되지 않으면 그들이 너를 좌우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천하와 더불어 살겠다 말하겠느냐?”
서늘한 독선의 눈빛이 운현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들었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믿기지는 않습니다만 만일 정말로 그렇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지요.”
쓴웃음을 지으며 운현은 대답했다.
“저는 한 사람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을뿐더러, 천하와 더불어 사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니까요.”
천하는 황제의 것이다.
그러나 그 황제에게 천명을 위임하는 이는 바로 백성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학문을 한 운현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후우웅.
독선을 둘러싼 기세는 여전했다.
그러나 그 기세는 더 이상 파괴적이지도 난폭하지도 않았다.
“……어리석은 대답이로군.”
희미한 조소를 머금으며 독선이 말했다.
“하지만 너라면 조금은 다를지도 모르지.”
그 목소리에는 어딘가 깊은 회한이 스며들어 있었다.
슥.
독선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다시 운현을 바라보았다.
“너는 네 대답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독선의 말은 운현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책임.’
운현이 그 의미를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독선이 몸을 돌렸다.
사박, 사박.
독선은 천천히 멀어져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독선의 모습은 운현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쏴아아.
바람이 불고 나무와 풀 들이 소리를 냈다.
주위는 어느새 다시 푸르름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향접이 남긴 파괴의 흔적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후우.”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달은 저문 지 오래였다.
벌써 동녘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하고, 새벽빛에 저물어 가는 별들만이 저편에서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씨앙.”
무심파 부채주 장삼채는 욕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장삼채 자신에게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사방이 온통 비명과 고함, 쇳소리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채앵, 챙, 채챙.
“크아악!”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장삼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죽은 수적들이 사방에 가득하다. 이 상황에서 누구 하나 더 죽어간들 무슨 상관이랴?
으드득.
장삼채는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작정하고 나선 남궁세가의 무력은 무시무시했다.
그것을 장삼채는 이 순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더 열심히 몰아붙여! 무조건 버티란 말이다!”
놀랍게도 수적들은 남궁세가의 정예를 상대로 제법 분전하고 있었다.
수적들의 숫자가 남궁세가를 크게 웃돌기도 했지만, 수적들이 사용하는 ‘삼재진(三才陣)’이 예상보다 쓸 만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돼.”
장삼채는 자신에게 말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본래 수적들의 싸움은 오래 끌지 않는다.
강한 고수 앞에서는 다들 몸을 사리는 데다가, 승패가 기울었다 싶으면 바로 도망치는 것이 수적들의 싸움이다.
하지만 이번은 사뭇 달랐다.
서로 물러서지 않는 혼란스러운 난전 속에서는 남궁세가의 강한 무공도 지엽적인 승리밖에는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무림인들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집단 전투에 가까운 양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남궁세가의 토벌대를 물리쳤을 때부터 이미 일반적인 싸움과는 멀어졌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버티면.”
장삼채가 다시 그렇게 중얼거리던 순간이었다.
쉬익.
“커억.”
바로 옆에서 터져 나온 비명 소리에 장삼채는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아니나 다를까?
카앙.
‘헉.’
상대의 검격을 막아 낸 장삼채는 검을 통해 전해져 오는 상대의 내력에 화들짝 놀랐다.
남궁세가 정예들의 검이 무섭다는 것은 벌써 질리게 보았다.
장삼채는 그들과 직접 검을 마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쉭, 탁.
크게 검을 휘두른 장삼채는 상대를 파악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뒤로 몸을 날렸다.
그 과감하고 신속한 판단이 장삼채의 목숨을 구했다.
“아, 이런!”
장삼채가 순식간에 꽁무니를 빼자 이서연은 당황했다.
수적들을 독려하던 장삼채가 변변한 저항조차 없이 달아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뒤늦게라도 추격해 보려 했지만 어느새 세 명의 수적들이 이서연의 앞을 막았다.
“비켜!”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서연이 외쳤지만 수적들은 비키지 않았다.
이서연 역시 이미 검을 휘둘러 수적들을 베어 가고 있었다.
쉭, 카앙.
제일 앞에 선 건장한 체격의 수적이 커다란 도로 이서연의 검을 막았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 두 자루가 기다렸다는 듯 이서연을 향해 짓쳐들어왔다.
쉬익, 쉭.
하나는 정면에서, 그리고 또 하나는 측면에서.
이서연의 검이 멈추는 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두 자루의 칼이 이서연의 목숨을 노렸다.
그러나 그 순간, 이서연은 가볍게 발을 굴러 공중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수적들의 이 ‘삼재진’을 처음 상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파라락.
이서연은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덩치 큰 수적의 뒤로 내려서는 것과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커헉!”
도를 들고 있던 수적이 무너졌다.
그러나 남은 두 수적은 도망가는 대신 다시 한번 이서연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하나는 낮게, 그리고 또 하나는 옆에서.
잠시라도 당황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빠르고 정확한 공격이었지만 이서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수적들의 공격은 빠른 반면 단순했고, 이서연은 그 공격을 이미 질리도록 겪은 다음이었다.
쉬쉭.
이서연은 앞으로 한발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컥.”
“크흑.”
두 번 칼이 번득이고 두 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서연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 칼에 들러붙은 피를 털어 냈다.
‘삼재진이라…….’
이서연은 상황을 살펴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남궁세가를 상대하기 위해 수적들도 나름대로 대비를 한 흔적이 역력했다.
무엇보다 수적들의 수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무심채 홀로 이렇게 많은 수적들을 동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수적들은 첫 싸움에서처럼 아무렇게나 달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세 명이 ‘삼재진’을 형성하여 움직였다.
방금 전처럼 커다란 도를 든 건장한 수적이 공격을 막아 내면, 뒤에 붙어 있던 다른 두 수적이 빈틈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오는 식이다.
매우 단조로운 공격이었지만 오직 그것만 연습한 듯 대단히 빠르고 주저함이 없었다.
만일 한순간이라도 당황한다면 낭패를 면하지 못할 것이었다.
물론 이런 술수가 남궁세가의 정예들에게 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궁세가 제자들을 지치게 하는 데는 확실히 성공하고 있었다.
각각 세 사람을 상대하는 것과 조직화된 세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꽤나 큰 차이가 있으니까.
‘어쩐지 시간을 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접전이라고는 하지만 전황은 확실히 남궁세가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이번 토벌의 가장 중요한 상대인 ‘황천대’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우리가 지쳤을 때를 노리려는 거겠지.’
이서연은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조직화된 다수의 인원을 동원하고 상황에 따라 집단을 운용하는 건 이미 군(軍)의 영역인데…….’
수적들의 반응은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반면 남궁세가는 정면 돌파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만큼 무공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지만, 수적들에 비해 단순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내가 무슨 생각을.’
이서연은 피식 웃었다.
천하의 남궁세가가 수적들보다 뒤져 보인다는 생각을 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때였다.
“벌써 지친 건가, 사매?”
사뭇 낭랑한 목소리에 이서연의 생각이 끊겼다.
이서연은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니면 노리던 상대를 놓쳐서 화가 났나?”
치열한 싸움터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빙긋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남궁세가의 제자 남궁윤이었다.
“사매는 참 특이하군. 이렇게 직접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야.”
이서연은 남궁세가의 제자이기 이전에 호암상단의 사람이다.
그녀가 원하지 않았더라면 이렇듯 피를 뒤집어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일로 이서연이 얻은 것도 컸다.
그녀가 직접 나선 덕분에 남궁세가는 호암상단을 혈맹이라 여기게 되었다.
특히나 세가의 장로들은 이서연과 호암상단에 대해 크게 호의를 갖게 되었다.
어려운 때에 같이 피를 흘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가요?”
이서연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남궁세가의 제자라면 당연한 의무지요. 특권이란 의무를 감당할 때만 정당화되는 법이니까요.”
“오오.”
남궁윤은 사뭇 놀랍다는 듯 감탄을 흘렸다.
“대단하군. 남궁세가랍시고 잘난 척하는 것밖에 모르는 다른 멍청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대답이야.”
이서연은 피식 웃었다.
“그들이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 사형에게는 더 좋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지.”
남궁윤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도검이 난무하는 싸움터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여유로운 미소였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사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고 말이야.”
이서연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질투를 가장한 은근한 찬사임을 알고 있지만 그리 싫지는 않았다.
“제 호감을 얻고 싶다면 다음 목표는 제게 양보해 주시겠어요?”
“다음 목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