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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32화 (132/530)

132화. 천향접

휙.

놀란 모용미가 움직이려는 것보다 모용진이 더 빨랐다.

모용진은 순식간에 쓰러지는 고독객을 안아 들었다.

모용미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모용진은 천천히 독고랑을 땅에 눕혔다.

사락.

모용미가 즉시 다가가 독고랑의 맥을 짚고 상처를 살폈다.

‘이런.’

자신도 모르게 모용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독고랑의 상태는 참혹할 정도였다.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것은 물론이고 피를 많이 흘린 데다 제대로 쉬지 못해 완전히 탈진에 이른 상태였다.

어떻게 이런 상태로 검기를 발현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탁, 탁.

모용미는 혈을 짚어 지혈을 하고는 품에서 작은 자기병을 꺼냈다.

사락.

병에 든 흰 가루를 모용미는 독고랑의 상처에 조심스럽게 뿌렸다.

“그는 어떻소?”

매화검 영호준이 물었다.

“한시바삐 의원에게 보여야 해요.”

모용미가 독고랑을 살피며 말했다.

“이건 단지 시간을 버는 것에 불과해요. 오래 지체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요.”

“알았소. 즉시 의원에게 데려가도록 합시다.”

말하던 영호준이 물었다.

“그런데 운 서기는 어디 있소?”

“그는…….”

모용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걸 말해도 되나 잠시 갈등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떠났어요.”

“떠났다고? 운 대인께서 말이냐?”

모용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할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런.”

매화검 영호준이 혀를 찼다.

“오늘따라 다른 볼일이 있는 사람이 많군. 당 소저도 그러더니 운 서기까지.”

그 말에 모용미는 잠시 미뤄뒀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무림맹 대표자가 어째서 운 학사님을 이렇듯 정중하게 대하는 것일까?’

운현이 일반적인 서기였다면 이렇게 대할 리가 없다.

무림맹은 과연 운현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으며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도대체 운 학사는 왜…….’

독고랑을 내버려 두면서까지 운현이 해야 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운현은 창룡검주와 연관이 없는 사람인 걸까?

모용미의 마음속에서는 온갖 의문이 솟아올랐다.

그때 문득 운현의 부드러운 미소와 목소리가 떠올랐다.

―잘 부탁합니다.

운현은 모용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독고랑을 내버려 둔 것이 결코 아니다.

“……어서 가요.”

모용미는 말했다.

모용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즉시 독고랑을 안아 들었다.

“따라오시오. 앞장설 테니.”

탁.

매화검 영호준이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몸을 날렸다.

모용진 역시 독고랑을 안은 채 영호준을 뒤따르고 모용미도 땅을 박찼다.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현장을 뒤로하고, 그들은 독고랑과 함께 철정산을 떠났다.

***

자박, 자박.

운현의 발밑에서 풀들이 소리를 냈다.

달빛이 기우는 철정산의 숲은 익숙한 산꾼도 길을 찾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지만, 운현은 캄캄한 숲길을 거침없이 걸어갔다.

자박.

얼마나 걸어왔을까?

숲이 끝나고 넓은 풀밭이 펼쳐진 곳에서 운현은 발을 멈췄다.

쏴아아.

달빛 아래 바람에 흔들리는 풀들은 마치 일렁이는 물결처럼 반짝였다.

“왔느냐?”

허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길게 기른 흰 수염과 허연 눈썹, 마치 선인과도 같은 한 노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슥.

“저는 운현이라 합니다.”

운현이 먼저 예를 표했다.

그것은 노인이 대단한 고수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이 많은 어른께 예를 표하는 것은 운현에겐 당연한 일인 데다가, 노인이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르신께서 저를 부르셨습니까?”

운현의 예에 노인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렇다.”

그렇게 답한 노인이 문득 물었다.

“너는 내가 두렵지 않으냐?”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두려워해야 합니까?”

눈앞의 노인이 뿜어내는 기세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웬만한 고수라도 단번에 표정이 변하고 공포를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운현에게는 아니었다.

그 강렬한 기운 너머로 전해지는 어떤 허허로운 느낌을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마치 연로한 노학자나 초탈한 선인을 대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호감이 들 정도였다.

그가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확신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허허.”

노인은 웃었다.

“불영과 이검학이 너를 주목한 이유를 알 만하구나.”

그 역시 운현에게 호기심과 함께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호감은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 크게 달랐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운현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웃!’

사사삭.

노인이 선 곳부터 시작해서 주위의 수풀이 빠르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무성하던 잎들조차 생기를 잃고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 소리들이 바람소리처럼 들린 것이다.

“죽음도, 그리고 삶도.”

노인을 중심으로 번져 가던 죽음의 기운이 어느 순간 멈췄다.

그리고 이번에는 노인의 발밑에서 시작하여 초목들이 생명을 회복하고 있었다.

메말랐던 풀잎이 푸르름을 회복하고 축 늘어졌던 초목들에 생기가 돋았다.

생명의 기운이 노인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초목들이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그리고 어느새 생명의 원은 죽음의 원을 지워 버렸다.

떨어졌던 낙엽들조차 바스러져 자취를 감추니, 주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을 눈앞의 이 노인이 행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 내가 쥐고 있다.”

노인은 깊은 눈동자로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약이요, 생명을 죽이는 것은 독이라. 그러나 약과 독은 본래 한 가지이니…….”

부드러운 미소가 노인의 입가에 걸렸다.

“내가 약선이며 곧 독선이다.”

‘독선!’

운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신승 불영 대사가 말한 환우오천존의 일선(一仙), 당문의 독선이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것이다.

후우우.

독선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그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너는 어떠하냐?”

운현을 보며 독선은 물었다.

“너는 내게 독이 되려느냐, 아니면 약이 되려느냐?”

“그건 무슨 뜻입니까?”

운현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러나 독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운현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무림맹은.”

한참 만에야 독선이 입을 열었다.

“불영의 마지막 집착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도 무림맹만은 놓지 못했지.”

저벅.

독선이 운현을 향해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이검학의 집착은 검의 궁극에 있다. 그 끝을 보기 위해서라면 이검학은 생명조차 아끼지 않을 것이다. 허나 아직 그것을 보지 못했기에 그는 여전히 미련을 가지고 있지.”

저벅.

다시 한 걸음, 독선이 운현을 향해 다가왔다.

운현은 사방에서 자신을 조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온 세상이 운현을 압박하며 다가오는 듯했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 손을 등 뒤로 돌렸다.

그리고 손끝에 목검이 닿는 느낌을 확인했다.

“내 미련은 당문에 있다.”

토해 내듯 독선이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독선의 주위로 풀과 나무가 급격하게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파사삭.

‘맙소사.’

자신에게로 번져오는 그 죽음의 기운을 보며 운현은 경악했다.

‘이것은 독이 아니다.’

그것은 엄청난 기의 흐름이었다.

독선이 뿜어내는 그 무형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수풀이 말라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파스스스스.

마치 낙엽이 지는 듯 요란한 소리가 운현의 주위를 메우기 시작했다.

“만일 네가 당문을 천하제일문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다면.”

저벅.

마른 풀잎이 독선의 발밑에서 바스러졌다.

살아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독선은 운현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는 네게 천하를 주겠다.”

모든 것이 죽음으로 뒤덮인 그곳에서, 푸른 달빛 아래 선 독선은 운현에게 말했다.

독선의 눈동자는 파랗게 빛을 내며 일렁이고 있었다.

사락.

침묵 속에 갈색으로 변한 나뭇잎들이 떨어져 내렸다.

갑자기 가을이 온 것처럼 세상은 온통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운현은 대답해야 했다.

이 광경을 만들어 낸 독선이 좋아하지 않을 대답을.

“어르신께서는.”

운현은 목검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사람을 잘못 찾으신 듯하군요.”

독선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운현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었다.

천하제일문 같은 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다.

관심도 없는 데다가 무엇보다 그럴 능력도 되지 못한다.

아는 것이라곤 검뿐인 운현에게 무슨 천하제일문을 약속하란 말인가?

사락.

문득 독선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운현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독선은 다시 한 발 더 물러섰다.

사박.

“과연 그러한지.”

나지막이 독선이 말하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후웅.

그 단순한 행동에 주변의 기세가 단숨에 변했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독선의 손으로 모여드는 것을 운현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운현은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독선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 확인해 보자꾸나.”

훅.

손바닥을 위로 한 채로, 독선이 가볍게 손을 위로 올렸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위로 날리듯 가벼운 동작이었다.

그러나 운현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독선의 손끝에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마치 나비처럼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르는 것을.

그것은 무형의 기운이 모여 이루어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한 기세였다.

사락.

처음에는 매우 작았다.

하지만 독선의 손끝을 벗어난 순간부터 그 무형의 기운은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화아악.

그것은 어쩌면 여전히 나비였다.

그러나 그 날개는 더 이상 작지도 가냘프지도 않았다.

독선의 절기가 만들어 낸 무형의 날개가 밤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운현의 마음속에는 이미 한 자루 검의 형상이 떠올라 있었다.

웅.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운현은 즉시 목검을 뽑았다.

그리고 투박한 목검에 낯선 기운이 휘감아 도는 것과 동시에 위를 향해 쳐 올렸다.

자신을 감싸 안을 듯 내려앉는 그 커다란 날개를 향해서.

쉭.

후웅.

충격은 없었다.

무엇인가를 벤 느낌조차도 없었다.

운현의 목검은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마치 모든 것이 착각인 듯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콰콰콰곽.

운현의 뒷편 숲이 굉음을 내며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그제야 폭음이 뒤를 이었다.

콰콰쾅.

‘웃.’

운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급히 몸을 낮췄다.

부서진 나무와 흙먼지가 사방을 뒤덮었다.

강한 바람이 운현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흩날리고, 마치 폭풍에 휩싸인 듯 숲 전체가 요동쳤다.

잠시 후, 바람이 가라앉고 운현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운현은 자신의 좌우로 깊은 상흔처럼 땅이 패여 있음을 보았다.

만일 운현이 검을 쳐 올리지 않았다면 저 충격을 고스란히 맞받았을 터였다.

“불영에게 식견이 있다면 나 또한 그러하며.”

느긋하게 들려오는 독선의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이검학에게 안목이 있다면 나 또한 그러하다.”

슥.

독선은 뒷짐을 졌다.

이 엄청난 참상조차 그에겐 아무것도 아닌 듯, 독선은 희미한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지난 삼십 년간 나의 천향접을 막아 낸 사람은 없었다. 비록 두 걸음의 유예를 주었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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