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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31화 (131/530)

131화. 각자의 할 일

“나도 가겠소.”

그렇게 말한 사람은 바로 모용진이었다.

매화검 영호준은 힐끗 모용진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오. 나 혼자보다야 둘이 더 낫겠지.”

그건 영호준이 모용진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저벅.

영호준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모용진은 모용미와 운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영호준의 뒤를 따랐다.

저벅, 저벅.

영호준과 모용진은 달빛 아래 서 있는 고독객 독고랑을 향해 걸어갔다.

모용미는 긴장된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커다란 등과 강인한 어깨가 푸른 달빛 아래 두터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사락.

“나도 가야겠어요.”

모용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저도요?”

그렇게 묻는 운현을 내려다보며 모용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 검은 큰 도움이 못되겠지만 모용세가의 외당 당주라는 직함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영호준 대협의 말대로라면 절 함부로 적대하지는 못할 거예요.”

모용미는 모용세가의 외당 당주다.

총명한 그녀는 영호준이 정치적인 문제로 몰아가려는 뜻임을 이미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모용세가의 외당 당주가 나서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군요.”

운현은 모용미의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박.

그리고 운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저도 움직여야겠네요.”

모용미는 눈을 빛냈다.

운현이 결국 고독객 독고랑을 위해 나서겠다는 뜻일까?

그러나 운현의 행동은 모용미의 생각과 달랐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운현은 정중하게 모용미에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뒤로 돌았다.

저벅.

그쪽은 고독객 독고랑이 있는 곳과 정확히 반대 방향이었다.

매화검 영호준이나 모용진과는 전혀 다른, 산을 내려가는 길을 따라 운현이 걷기 시작한 것이다.

저벅, 저벅.

모용미가 무어라 할 새도 없었다.

운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발을 옮겼다.

“운 학사님!”

모용미가 자신도 모르게 운현을 불렀다.

운현은 발을 멈추고 모용미를 돌아보았다.

“소저께서는 저들을 도와주십시오.”

부드럽게 웃으며 운현이 말했다.

“저는 제 일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운현은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갔다.

모용미가 망설이는 사이, 운현은 곧 숲속 어둠 사이로 잠겨 들었다.

등에 진 작은 봇짐과 그 아래 달려 있는 목검 한 자루가 대롱거리는 것이, 모용미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운현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용미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녀의 혼란은 길지 못했다.

“너희는 누구냐?”

적의가 가득한 목소리에 모용미는 고개를 돌렸다.

다섯 흑의인들이 매화검 영호준과 모용진을 경계하며 대치하고 있었다.

모용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운현의 말대로 지금은 모용진과 영호준, 그리고 고독객 독고랑을 도울 때였다.

자박, 자박.

모용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날 모르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는데.”

매화검 영호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날카로운 긴장이 가득한 상황에서도 그는 사뭇 느긋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안 그렇소?”

그건 작은 비도들을 들고 있는 흑의인을 향한 말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그 흑의인은 사뭇 동요한 듯했다.

그는 다른 흑의인들과 시선을 나누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박.

그때 모용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모용세가의 외당 당주 모용미예요.”

그녀는 당당한 모습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누구이며 어째서 고독객을 핍박하는 것이지요?”

흑의인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중 한 흑의인이 말했다.

“모용세가가 이 일과 무슨 상관이냐?”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변성된 상태였다.

말하는 사람도 흑의인 중에는 오직 그뿐이었다.

“당연히 상관이 있지요.”

모용미는 흑의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모용세가는 무림맹 조사단에 협력하고 있어요. 여기 계신 매화검 영호준 대협께서 그 조사단의 총책임자시죠.”

사뭇 낭랑한 목소리로 모용미는 말을 이었다.

“무림맹 조사단은 고독객 독고랑에 대한 조사를 결정했습니다. 이는 매화검 영호준 대협과 당문설화 당설련 여협께서 정한 일입니다.”

흑의인의 눈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비도를 들고 서 있던 호리호리한 체격의 흑의인이 날카롭게 말했다.

“흥! 무림맹이면 뭐든 마음대로 해도 된단 말이냐!”

목소리를 숨기려는 듯 변성을 했지만 여성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모용미는 빙긋 웃었다.

“물론 그렇지는 않아요. 여러분이 고독객과 은원이 있거나,정당한 채무 관계가 있다면 당연히 그 권리가 존중받아야겠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스스로 정체를 밝힌 다음에 말이에요.”

그 말에 흑의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모용미는 희미하게 웃었다.

“왜 그러시지요?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요? 아니면 여러분의 이 행동이.”

흑의인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모용미가 말했다.

“정당하지 못하다는 뜻인가요?”

으득.

“……너.”

호리호리한 흑의인이 이를 갈며 무언가 말하려던 때였다.

“만일.”

처음 나섰던 흑의인이 말했다.

“우리가 여기서 너희를 치워 버리겠다면 어쩔 테냐?”

흑의인들의 눈빛이 단번에 흉흉해졌다.

싸늘한 살기가 사방을 뒤덮고 태허칠협 중 살아남은 셋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사락.

모용미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달빛 아래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할 수 있다면요.”

스릉.

옆에 서 있던 모용진이 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칼날이 달빛아래 서늘하게 빛났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웅.

모용진의 검이 울었다.

그리고 낯선 기운이 순식간에 모용진의 검을 뒤덮었다.

아까 고독객의 검에 머물렀던 그 패도적인 기운.

바로 그 기운이 지금 이 순간 모용진의 검에 일렁이고 있었다.

“……검기.”

흑의인이 이를 갈듯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놀란 사람은 흑의인들만이 아니었다.

모용미 역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라버니가 언제…….’

운현과 만난 이후 모용진의 무공이 커다란 성취를 이루었음은 알고 있었다.

최근에는 새벽마다 운현과 함께 수련을 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검기를 발현할 정도라니?

비록 초입이라 해도 검기를 발현하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나는 모용세가의 대제자 모용진이다.”

모용진이 말했다.

그 목소리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너희가 모용세가를 적대하겠다면 먼저 나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우우웅.

모용진의 말에 화답하듯 그의 검이 울었다.

흑의인들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매화검 영호준은 아예 대놓고 감탄하고 있었고, 고독객 독고랑 역시 눈을 빛내며 모용진의 모습을 주시했다.

“고작 그 정도의 성취로 자만하지 마라.”

흑의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강호 무림에 너보다 강한 자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의 말은 옳았다.

검기 발현이 대단한 경지이긴 하지만 강호 무림에 고수는 많다.

숨은 기인이사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잘 알고 있다.”

모용진이 대답했다.

“가르침을 내려 주겠다면, 그 또한 마다하지 않겠다.”

웅.

다시 한번 모용진의 검이 울었다.

“……흥.”

흑의인은 낮게 코웃음을 흘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해 주고 싶지만 때가 좋지 않군.”

모용진만이 아니다.

아직 전의를 불태우는 고독객 독고랑이 있고 매화검 영호준이 버티고 있다.

게다가 무림맹과 모용세가가 정식으로 개입했으니 그들의 임무는 이미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흑의인은 고개를 돌려 매화검 영호준을 보았다.

“이 일은 반드시 기억해 두겠다.”

그 목소리엔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그러나 매화검 영호준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렇게 말한 사람이 하도 많아서.”

흑의인은 매화검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뒤로 물러섰다.

저벅.

그것이 신호인 양 다른 흑의인들도 천천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허칠협 중 남아 있는 자들의 안색이 변했다.

“대, 대협! 이러면 약속이…….”

핑.

날카로운 비도가 태허칠협 중 한 도인의 뺨을 스쳤다.

비도를 든 호리호리한 체격의 흑의인은 도인에게 말했다.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태허문 따위 언제라도 멸문시켜 버릴 수 있으니까.”

앙칼진 그 목소리에 도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매화검 영호준을 노려보았다.

그 서슬 퍼런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그러나 매화검 영호준은 오히려 빙긋 웃었다.

“지난번엔 즐거웠소, 소저.”

흑의인이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흥.”

눈을 가늘게 뜨며 흑의인이 코웃음을 쳤다.

그 소리가 어쩐지 요염하게 들린다고 모용미가 생각했을 때는, 이미 흑의인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흑의인들이 사라지자 눈치를 보던 태허칠협과 살아남은 무림인들도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남아 있는 사람은 매화검 영호준과 모용진, 모용미, 그리고 고독객 독고랑뿐이었다.

스릉.

모용진이 검을 거뒀다.

그는 몸을 돌려 고독객 독고랑을 향했다.

“괜찮으시오?”

그러나 고독객의 반응은 모용진의 예상과 달랐다.

“너희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여전히 검을 빼어 든 채로 고독객이 말했다.

모용진은 순간 당황했다.

고독객이 자신들에게 적의를 나타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는…….”

“도움은 필요 없다.”

고독객은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미 탈진할 대로 탈진해서 쓰러지기 직전이라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고독객의 눈빛은 살벌하게 살아 있었다.

그러나 사실 고독객의 상태는 보이는 것보다 더 심각했다.

만일 흑의인을 상대로 검기라도 펼쳤다면, 그것이 고독객 최후의 일검이 되었을 것이다.

“조사에 협조할 생각도 없다. 설령 너희가 무림맹이라 해도 말이다.”

그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고독객 독고랑은 늑대처럼 홀로 강호 무림을 떠도는 검객이니까.

모용진이 당황해하는데 모용미가 나섰다.

“우리는 모용세가예요.”

“안다.”

무뚝뚝한 고독객의 반응에 모용미가 빙긋 웃었다.

“아니, 당신은 아직 몰라요.”

고독객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모용미는 확신했다.

이 말을 들은 고독객의 반응이 반드시 달라지리라는 것을.

“우리도 서찰을 받았어요. 천외비처 창룡검주의 서찰을.”

고독객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박.

모용미는 고독객에게 다가갔다.

고독객은 아직 칼을 뽑아들고 있었지만 모용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말을 믿으세요.”

아름다운 눈동자로 고독객을 똑바로 바라보며 모용미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당신의 적이 아니에요.”

슥.

고독객은 모용진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맞받은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진의 눈빛이 진심이라는 것을 고독객은 알 수 있었다.

스륵.

고독객의 검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독객이 말했다.

‘……드디어.’

그 말은 입으로 나오지 못했다.

고독객이 검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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