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거래
‘그렇다면.’
살짝 입술을 깨물며 모용미는 생각했다.
‘오늘 고독객이 죽는 것은 피할 수 없겠구나.’
태허칠협이라 스스로 칭한 자들은 이미 검과 도를 빼어 들고 있었다.
푸른 달빛 아래 칼과 도가 번뜩이고 팽팽한 살기가 주위에 가득했다.
그 가운데 검을 들고 선 고독객 독고랑의 모습은 마치 저승사자처럼 섬뜩하게 보였다.
“강호의 동도 여러분!”
태허칠협 중 한 명이 크게 소리를 높였다.
그는 어둠 속에 잠긴 숲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자는 비겁한 암계로 태허문주를 상하게 하고, 이곳까지 도망쳐 오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악적이오! 이런 자에게 어찌 강호의 도리를 바라겠소?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자신의 위명에 흠이 될 것을 걱정 마시고 모두 의기롭게 나서도록 하시오!”
노골적으로 합공을 제안하는 말이었다.
아니, 이 정도 되면 합공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태허칠협이 독고랑 한 사람을 상대하겠다고 나섰을 때부터 상식선을 한참이나 벗어난 것이었다.
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태허칠협의 표정은 여전히 당당했다.
“우리 태허칠협은 이 패역무도한 자를 징계하는 것만을 원할 뿐이오. 만일 여러분께서 강호의 도의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신다면 우리는 기꺼이 모든 권리를 포기할 용의가 있소.”
이번에는 확실한 반응이 있었다.
태허칠협이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건 고독객의 비급에서 손을 뗀다는 뜻이었다.
숲속에 숨어 있는 이들은 아직 많으나 고독객 독고랑은 혼자다.
혹 난전 중에 누구라도 고독객의 목을 치면 절세 비급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소?”
누군가의 목소리에 태허칠협의 눈동자에 득의의 눈빛이 스쳤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주변을 향해 읍을 하며 예를 표했다.
“우리 태허칠협과 태허문의 문주가 그 이름을 걸겠소.”
태허칠협의 일곱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주위의 분위기가 단번에 변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고 몇몇은 벌써 모습을 드러냈다.
태허칠협의 입가에 짙은 웃음이 걸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야아아!”
누군가 기합을 내지르며 고독객에게 달려들었다.
때마침 태허칠협이 돕겠다는 듯 일제히 움직였다.
쉭.
수적 우세는 냉정한 판단을 가린다.
고독객보다 옆사람의 움직임에 더 신경을 쓰던 이들은 아차 싶은 마음에 너 나 할 것 없이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무작정 고독객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야아압!”
“크아아!”
괴상한 기합 소리가 한밤의 철정산을 가득 메웠다.
난전이 시작된 것이다.
“안 되겠습니다. 저라도…….”
막 검을 쥐고 일어서려던 모용진은 운현이 자신의 팔을 잡는 것을 느꼈다.
“운 대인?”
“아직은 아닙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여전히 고독객 독고랑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보여 줄 것이 아직 남아 있다고.”
빛나는 눈동자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그가 말하고 있으니까요.”
모용진은 고개를 돌려 고독객 독고랑을 보았다.
고독객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고독객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피어오르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가느다란 미소였다.
‘웃!’
모용진은 움찔했다.
그 미소가 담고 있는 알 수 없는 의미가 순간 모용진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용진은 그제야 볼 수 있었다.
우웅.
고독객의 검이 울고 있었다.
나지막한 울음을 흘리는 그 검에는 이제껏 보지 못한 푸른색의 낯선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후우욱.
아무런 경고도 없었다.
칼과 도를 빼어 들고 달려드는 자들을 향해 낯선 기운을 머금은 고독객의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콰과곽.
고독객의 검은 모든 것을 가르고 부숴 버렸다.
서슬 퍼런 검도, 살벌한 도도, 번들거리는 탐욕과 욕심도 그 앞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사람들이 그 푸른 궤적의 의미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참혹한 결과가 그들 앞에 펼쳐진 다음이었다.
“크악!”
“으아악!”
피가 솟구치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과 도가 땅에 나뒹굴고,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간 자들은 땅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손속에 인정을 두기는커녕 일말의 자비조차 없는 검격이었다.
지켜보던 모용미마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정도의 차이일 뿐 결국 이것이 강호 무림의 진정한 모습이니까.
그때였다.
쉬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은빛의 궤적을 그리며 무엇인가 고독객에게 짓쳐 들었다.
고독객은 즉시 검을 휘둘렀다.
카강.
그것은 세 자루의 작은 비도였다.
고독객을 노리고 날아든 비도 중 둘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그러나 하나는 고독객의 어깨를 스치는 데 성공했다.
핏.
고독객의 어깨에서 붉은 피가 번져 나왔다.
이미 크고 작은 상처는 많았다.
하지만 이번은 의미가 달랐다.
마치 사신 같던 고독객이 그들의 눈앞에서 상처를 입은 것이다.
고독객은 자신의 어깨를 흘깃 보고는 고개를 들어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비도를 던진 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저놈이 상처를 입었소!”
태허칠협 중 살아남은 도인이 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저놈은 지쳤소. 아마도 조금 전 그것이 저놈의 마지막 발악일 터, 그리니 누구든지 저 놈의 목을 베는 자가!”
도인은 악을 쓰듯 외쳤다.
“절세의 비급을 취하게 될 것이오!”
고독객은 반박하지 않았다.
기세가 꺾였던 자들은 다시금 검과 도를 쥐고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탐욕이 다시 한번 사람들을 뒤덮고 있었다.
마치 사방에 가득한 피 냄새처럼.
슥.
고독객은 검을 고쳐 쥐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
서걱.
고독객 독고랑의 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을 베어 나갔다.
비록 아까와 같은 압도적인 검기를 뿌리지는 않았지만, 그의 검이 번득일 때마다 여지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악!”
커다란 도를 든 사내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러나 고독객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난전이 계속될수록 상처가 늘어 갔고, 이미 쫓긴 지 여러 날이 되어 체력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때때로 비도를 날리며 고독객을 방해했다.
새로 생긴 상처의 대부분은 바로 그 비도를 피하려다 입은 것이었다.
첫 비도는 아니었지만, 다른 비도에도 독이 없다고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크아악!”
또 한 번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피가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고독객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이미 여러 날을 쫓긴 고독객의 체력은 점차 한계에 이르고 있었고, 보이지 않는 적들이 주는 압박은 그를 심리적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검기를 쓰지 못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까닭이었다.
내력을 모두 소모한 채 저들을 맞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숨어 있는 자들에게 덤벼들고 싶지만 탐욕에 물든 이들이 독고랑의 발목을 붙잡았다.
결국 고독객은 그들을 하나하나 베어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상처가 늘어가고 체력은 고갈되어 갔다.
쉬익.
고독객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철정산의 싸움은 여전히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네, 네 이노옴!”
이제 셋밖에 남지 않은 태허칠협 중 한 명이 외쳤다.
제법 멋지게 기른 그의 흰 수염은 피로 더럽혀져 있었고, 소리치는 그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네가 이토록 많은 사람을 해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피가 흐르는 이곳에 서 있는 사람은 아홉뿐이었다.
고독객과 태허칠협 중 셋, 그리고 또 다른 다섯을 제외한 모두가 치명상을 입고 도망치거나 목숨을 잃은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시신들만 해도 서른이 넘으니, 어지간한 중소 문파 하나를 전멸시킨 셈이었다.
“……그런 것이 두렵다면.”
고독객 독고랑이 말했다.
호흡은 거칠어져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묵직한 힘을 담고 있었다.
“칼을 버리고 무림을 떠나라. 네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도 말고.”
“크윽!”
소리를 쳤던 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가 화를 내며 무언가 소리치려는 순간이었다.
“옳은 말이군.”
저벅.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그 음성은 일부러 변성시킨 듯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불쾌한 그 목소리와 함께 다섯 명의 각기 다른 사람들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정도로 두려워 떨 것이었다면 진작에 무림을 떠났어야지.”
그들은 모두 검은 무복을 입고 검은 천으로 눈 아래를 가리고 있었다.
무복에는 아무런 표식조차 없어서 문파를 알 수 없었다.
얼굴을 가린 것 역시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리라.
“네 것이 아닌 것을 탐내지 말라는 말 역시 옳아.”
검은 무복의 흑의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보물의 주인은 항상 따로 있는 법이니까.”
찰그락.
흑의인 중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한 사람이 짧은 비도를 가볍게 던져 올렸다가 받았다.
달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나는 그것은 지금까지 고독객을 방해하던 바로 그 비도였다.
얼굴은 가렸지만 그 눈이 조소하고 있다는 것을, 고독객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 이런.”
모습을 드러낸 다섯을 보며 영호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저들일 줄은 몰랐는걸?”
모용미는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 말은 영호준이 저들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저자들이 누군지 알아보시는 건가요?”
“저자들을 알아보는 건 아니고.”
영호준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 뭐 그런 게 있소.”
그는 말을 흐렸다.
모용미가 의심 가득한 시선을 쳐다보는 것을 알았지만 영호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저들 중 한 명이 여인이고, 그 여인의 몸매를 기억하고 있다는 말을 어찌 하겠는가?
“음, 이거 참 곤란한데.”
영호준은 중얼거렸다.
“서찰이 저쪽으로 넘어가면 나도 어쩔 수가 없으니…….”
그건 모용미에겐 커다란 단서였다.
무림맹의 권위로도 저들, 혹은 저들의 문파에 압력을 가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저들의 기세는 어디선가 본 듯하군요.”
문득 뒤에서 운현이 말했다.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운현을 돌아보았다.
“알아보시겠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운 서기의 그 불확실한 기억을 그대로 묻어 두려면.”
운현의 말을 끊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내가 무엇을 해 주면 되겠소?”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저들이 이곳에서 고독객을 핍박하고 있는 것은 제법 심각한 일이라오.”
영호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림맹 의제에서 저들의 양보를 한 번쯤 얻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말이오. 그러니 나로서는 운 서기께서 저들의 정체를 숨겼으면 하오. 모두가 알게 되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니까.”
운현은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매화검 영호준은 화산파 대표자다.
그는 이 일을 비밀로 하는 대신 저들의 문파에게서 정치적인 양보를 얻어 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운현에게는 그 협조를 부탁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필요한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고독객을 도와주십시오.”
“내가 말이오?”
영호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허나 그건 운 서기도…….”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곤 곧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매화검이시라면 싸우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뭐, 아니라곤 못 하겠소만.”
그렇게 말한 영호준은 고독객 독고랑과 검은 무복을 입은 다섯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를 위해 나서는 건 영 내키지 않는데…….”
슥.
그렇게 말하면서도 매화검 영호준은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