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혈투
“저 사람이군요.”
모용미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그렇소. 저 사람이 고독객 독고랑이오.”
영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고독객을 알아보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영호준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하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닮았군.”
“네?”
모용미는 어이가 없었다.
“고독객과 매화검께서 닮았다고요?”
그건 말도 안 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뭇 진지하게 답했다.
“그렇소. 제법 훤칠한 외모도 그렇지만 저 날카로운 기세 또한 예전의 나와 같소. 자신이 세운 뜻을 위해서라면 세상 전부를 적으로 돌린다 해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지.”
영호준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너무나 멍청하고, 그래서 아름답던 시절이었소.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런 시절 말이오.”
말하던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떤 면에서는 지금도 여전하지만.”
모용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항주에서 이름난 풍류공자인 매화검이 고독객 독고랑과 비슷한 부류라니?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점은 같을지도 모르겠군요.”
반쯤은 비꼬는 심정으로 모용미는 말했다.
하지만 영호준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모용미는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더 이상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지금 그녀가 신경 쓰는 사람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슥.
모용미는 슬쩍 시선을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운현은 고독객 독고랑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모용미의 시선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독객을 바라보는 운현의 모습은 옆에 있는 모용진과 너무나 똑같았다.
두 사내의 그 모습에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운현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보낸 서찰의 결과가 이제 막 눈앞에서 펼쳐지려는 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조사단이 고독객의 괴서찰, 즉 운현 자신이 보낸 서찰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반면 호기심도 있었다.
‘과연 그는 어떤 검을 이루어 냈을까?’
들려온 이야기들로 미루어 보건대 고독객 독고랑은 운현이 보낸 서찰을 받고 은거했다.
그런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분명 무언가를 성취했기 때문이리라.
고독객 독고랑이 운현의 서찰에 자극받아 이루어 낸 검의 경지.
운현으로선 설사 누명을 쓰더라도 반드시 보고 싶은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고독객 독고랑의 검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불안과 염려마저 넘어 버린 것이다.
“시작하나 보군.”
영호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운현은 꿀꺽 침을 삼켰다.
이 순간만은 영호준도, 모용진도, 그리고 운현도 고독객 독고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부웅, 부웅.
어둠 속에 회전하는 유성추가 섬뜩한 소리를 냈다.
고독객 독고랑은 분명히 지치고 상처 입었지만 산동삼웅은 감히 그를 경시하지 못했다.
그의 무자비한 손속을, 그리고 그 엄청난 실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놈도 사람이다.’
산동삼웅의 첫째가 눈을 빛냈다.
뒤쫓는 자신들이 지칠 정도면 쫓기는 고독객은 오죽하랴?
산동삼웅은 지금이 승부수를 던질 때라는 것을 확신했다.
슥.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뜻을 전하기는 충분했다.
“타하!”
쉬익.
은빛 유성추와 날카로운 창날이 어둠을 가르고 짓쳐 들었다.
커다란 대도 역시 고독객이 보일 빈틈을 기다리며 칼날을 번뜩였다.
상대가 뒤로 물러서면 유성추와 창의 제물이 될 뿐, 결국 거리를 좁히기 위해 달려들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독객은 그들의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쉭, 카앙.
달빛 아래 고독객의 검이 번뜩였다.
그리고 고독객을 향해 짓쳐 들던 은빛 유성추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창을 든 사내를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헉!’
창을 찔러 가던 사내는 대경실색했다.
유성추를 날린 사내조차 경악했다.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는 작은 유성추를, 고독객은 단 한 번의 검격으로 뒤틀어 버린 것이다.
“이익!”
창을 든 사내가 유성추를 피하고, 유성추를 날린 사내는 즉시 추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 고독객은 이미 대도를 든 사내 앞으로 짓쳐 들고 있었다.
“놈!”
하지만 대도를 쥔 거한 역시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콰곽.
내력을 실은 커다란 도가 고독객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고독객은 아랑곳 않고 그대로 검을 위로 그어 올렸다.
쉬익.
날카로운 충격음은 없었다.
고독객의 칼은 마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커다란 도를 그대로 지나 거한을 베어 버렸다.
“크악!”
거한의 가슴이 갈라지며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러나 고독객 독고랑의 검은 어느새 유성추를 든 사내를 베어 가고 있었다.
쉭.
“컥.”
유성추를 회수하려던 사내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단번에 목이 잘린 그는 그대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털썩.
고독객 독고랑의 발 아래로 피가 흘렀다.
그 피 한가운데서 고독객 독고랑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헉.’
산동삼웅의 첫째는 그 모습에 그만 숨을 삼켰다.
푸른 달빛 아래 고독객 독고랑이 칼을 들고 서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고독객 독고랑의 눈빛은 너무나 섬뜩하고 괴기했다.
방금 죽어 간 동료들의 죽음조차 완전히 잊혀질 만큼.
“으으. 괴, 괴물 같은 놈…….”
산동삼웅의 첫째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저벅.
고독객 독고랑이 한 발을 내디뎠다.
산동삼웅,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삼웅이 아닌 사내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미 전의는 사라지고 없었다.
사내는 그저 포식자의 송곳니 앞에 떨고 있는 먹잇감일 뿐이었다.
저벅.
“멈춰라!”
힘이 실린 묵직한 음성이 어둠 속에서 터져 나왔다.
고독객 독고랑은 발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파라락.
어둠 속에서 일곱 명의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도인의 복장을 하고 수염을 기른 노년의 일곱 사내들은 고독객 독고랑을 에워싸듯 내려섰다.
“네놈의 손속이 참으로 악독하구나.”
일곱 도인들은 독고랑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 태허칠협이 오늘 너를 크게 꾸짖으리라!”
스스로를 태허칠협이라 말한 도인들은 하나같이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고독객 독고랑은 오히려 미소를 머금었다.
산동삼웅의 첫째였던 자가 후다닥 몸을 피하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고독객 독고랑이 말했다.
“이제야.”
달빛 아래 선 독고랑이 나지막이 말했다.
“태허문의 개새끼들이 나타나셨군.”
태허칠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분노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고독객 독고랑은 이곳에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고독객 독고랑의 눈동자가,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시퍼렇게 빛을 뿜기 시작했다.
“대단하군요.”
지켜보던 모용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순수한 감탄이 담겨 있었다.
운현 역시 그 말에 동감했다.
“……네.”
소매로 입을 가린 운현이 간신히 답했다.
피가 낭자한 혈투는 그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무림이다.
운현은 각오를 다지며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운현의 시선은 오직 독고랑에게, 그리고 그의 검에만 못 박혀 있었다.
“아주 멋진 검로였습니다.”
그것은 운현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검로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고독객 독고랑의 검은 패도적이다.
그러나 조금 전 그 검로는 더없이 유연하고 참으로 부드러웠다.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면서도 그것을 완벽하게 다스리고 있다는 뜻이니, 그야말로 고독객 독고랑의 성취를 보여 주는 일 검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검로가 가지는 의미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역시.’
운현은 가슴이 뛰었다.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그 검로는 운현의 서찰에 대한 독고랑의 대답이었다.
마치 완벽하게 작성된 답안처럼, 더 이상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운 검로가 운현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오직 운현과 독고랑밖에는 알 수 없는 의미를 담아서 말이다.
꾹.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슴이 너무나도 벅차오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르고 싶을 정도로.
모용미는 태허칠협과 고독객 독고랑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괜찮을까요?”
“고독객이라면 괜찮소.”
영호준이 말했다.
“태허칠협인지 뭔지, 조금 전 그자들보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으니 말이오. 그저 숫자가 늘었을 뿐이지.”
그 숫자가 생사를 가르는 큰 요인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영호준이 말했다.
모용미도 그 말에 동의했다.
“네, 저들뿐이라면 그렇겠지요.”
어둠 속에 있는 기세들을 바라보며 모용미는 말했다.
“하지만 고독객을 노리는 이들은 아직도 많아요.”
“괜찮소.”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들이 전부 나선다 해도 고독객을 어쩌진 못할 거요.”
모용미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태허칠협만이 아니라 저들 전부로도 고독객 독고랑을 어쩌지 못한다니?
지치고 상처 입은 고독객 독고랑의 모습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영호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독객 독고랑을 향해 중얼거렸다.
“고독객이 일문의 문주가 아닌 것이 다행이오. 아니, 곧 될 테니 어차피 마찬가진가?”
영호준이 말하는 ‘일문의 문주’가 흔한 중소 문파의 문주 정도를 뜻하지 않음은 분명했다.
“여기서 살아 나간다면 말이오.”
그 말에 모용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전부 나선다 해도 고독객을 어찌할 수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물론 그렇소만.”
영호준이 한숨을 쉬었다.
“저들 말고 기세를 숨기고 있는 이들 중에 좀 버거운 상대들이 있소.”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영호준은 말했다.
“나도 이길 것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오.”
그건 언뜻 허세처럼 들렸다.
강호 무림에서 영호준은 무공보다는 풍류공자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용미의 표정은 굳어 가고 있었다.
‘매화검이 장담하지 못할 상대라니.’
화산의 매화검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영호준은 화산의 무림맹 대표자다.
어쩌면 화산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수도 있는, 화산의 고수 말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지금 나서야 해요.”
모용미가 말했다.
“무림맹이 무의미한 희생을 막고자 한다면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을 거예요.”
“모용 소저.”
한숨을 섞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무림맹은 이런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오. 무의미한 희생을 막는 것에는 더더욱 아무런 관심도 없지.”
모용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실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곳.”
영호준은 모용미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무림맹은 그런 곳이라오.”
문파 간의 분쟁이나 다툼에 무림맹은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무림맹의 위상에 군림이라는 수식어까지 붙는다면 강호 무림의 반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림맹은 중대한 분쟁에는 반드시 압력을 행사하여 그 영향과 결과를 통제한다.
무림맹에, 그리고 무림맹 십팔 대 문파에 이득이 되도록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 고독객 독고랑이나 그의 칼에 헛되이 죽어 갈 탐욕스러운 자들에 대해서는, 무림맹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조사단은 그가 가진 서찰이 필요하잖아요.”
“물론 필요하오.”
영호준이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개입할 이유는 없지. 마지막에 그 서찰을 손에 쥔 자와 이야기하면 될 일이니까.”
그 말은 지극히 냉정한, 그러나 대단히 실리적인 판단이었다.
모용미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