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누구나 비밀은 있다
“그들이 떠난다고요?”
모용미의 물음에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출발 준비를 하고 있다. 고독객 독고랑이 가진 서찰에 대해 조사하겠다는구나.”
“그도 같이 떠나겠지요?”
모용미가 언급한 그가 누구인지는 모용단천도 알았다.
“물론이다.”
잠시 생각하던 모용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사단에 제 동행을 요청해 주세요.”
모용단천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저들과 함께 가겠다고?”
“네. 저는 서찰을 직접 본 사람이니까 저들의 조사에 도움이 될 거예요.”
“하지만, 왜?”
모용단천은 이해하지 못했다.
모용미가 있다면 저들의 조사에 도움은 될 것이다.
하지만 구태여 그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조사단이 아니라, 그에게서요.”
운현이 창룡검주 본인일지 모른다는 것은 가주 모용단천에게는 보고하지 않았다.
그저 모용미 자신의 억측일 수도 있으니까.
모용단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 역시 이대로 운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느끼는 건 모용단천이나 모용미만이 아니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옆에 있던 모용진이 말을 꺼냈다.
“오라버니.”
모용미가 놀란 눈을 했지만 모용진은 진지했다.
“무림맹의 조사단은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당설련은 은연중에 운 대인을 경계하고 있더군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면 미아만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진이의 말이 옳다.”
모용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모용미와 모용진을 보며 말했다.
“함께 가거라. 그리고 그분을 지키도록 해라.”
모용진이 본 운현의 경지를 생각하면 두 사람이 그를 지킨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언제나 한 손보다는 여러 손이 낫고, 세상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법이다.
특히 강호 무림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모용미와 모용진의 목소리는 거의 동시였다.
그들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가주의 명을 받들었다.
***
따각, 따각.
마차에 탄 영호준은 반쯤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당설련의 눈매는 당연히 곱지 않았다.
“왜 저들의 동행을 허락한 거죠?”
조는 듯 보이던 영호준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는 대답을 하려거든 그만두세요.”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내게 숨기는 게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내가 말이오? 아하암.”
하품을 한 영호준은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래요. 조사단의 구성부터 저들의 동행을 허락한 것, 그리고 애초에 소림사로 가겠다는 것까지.”
당설련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죠?”
영호준은 항주에선 유명한 풍류공자다.
기행과 방탕한 생활로 유명하지만 당설련은 그의 진면목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영호준의 의도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저들의 동행을 허락한 건 내가 미인의 부탁에 약하기 때문이오.”
당설련을 바라보며 영호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졸다가 깬 모습이지만 타고난 멋진 얼굴은 누구라도 반할 만했다.
오직 눈앞의 당설련을 빼고는 말이다.
“소림사를 가자고 한 건 뭔가 괜찮은 거라도 나올까 싶어서였고, 왜 조사단을 구성하자고 했냐 하면.”
영호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림처럼 멋진 미소였다.
“비밀이오. 당신이 동행한 이유 또한 비밀이듯이 말이오.”
당설련은 멈칫했다.
“그리고 굳이 고독객 독고랑을 조사하자고 주장한 진짜 이유도 묻지 않겠소.”
매화검 영호준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누구나 비밀은 있는 법이니까. 아, 그런데 이 마차는 너무 불편한걸?”
툴툴거리던 영호준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몸을 뒤로 기댔다.
마치 게으른 한량 같은 모습을 보면서도 당설련은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벌써 알고 있었단 말이지?’
당설련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영호준은 묻지 않겠다고 했지만 당설련의 의도를 눈치채고 있음은 분명했다.
아니, 영호준처럼 총명한 사람이 그걸 모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리라.
당설련이 영호준을 아는 것처럼 영호준 역시 당설련의 진면목을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그냥 놔두는 건 대책이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그’를 믿고 있다는 것일까?’
당설련은 고개를 돌렸다.
수행원들이 탄 지붕 없는 마차 옆으로 각자 말을 탄 모용미와 모용진이 보였다.
그리고 그 마차 안에 운현이 앉아 있었다.
지나는 풍경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그 모습에 당설련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당문의 눈꽃이라 불릴 정도로 냉정한 당설련의 기분을, 그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망쳐 버리는 건 어찌 보면 놀라운 재주가 아닐 수 없었다.
따각, 따각.
단조로운 말발굽 소리와 함께 영호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졸기 시작했다.
앞에서 조는 영호준과 뒤에서 경치 구경이나 하고 있는 운현.
두 남자 탓에 당문의 눈꽃 당설련의 기분은 더더욱 나빠졌다.
“당 소저가 노려보는데?”
말을 타고 있던 모용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모른 척하세요.”
모용미는 당설련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답했다.
“우릴 보는 게 아니에요.”
“그거야 나도 알지만.”
모용진은 힐끔 마차 안에 앉아 있는 운현을 보았다.
마침 눈이 마주친 운현이 빙긋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인다.
모용진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는 거라더냐?”
모용진의 물음은 모용미를 향한 것이었다.
“산동성 철정산이에요. 그곳에 고독객 독고랑이 나타날 거라더군요.”
“고독객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적이 있다만…….”
고독객 독고랑의 명호는 제법 유명했다.
안휘성의 내로라하는 문파들에 홀로 도전하여 승리를 이어 가던 그의 이름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모습을 감추기 전까지 말이다.
“갑자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동안 고독객은 강호 무림에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어요.”
모용미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었다.
외당 당주인 그녀는 고독객 독고랑의 소문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그가 산동성 태허문에 도전장을 냈죠.”
“태허문? 태허문이라면 확실히…….”
그건 모용진도 들어본 적 있는 문파였다.
“네. 태산에 자리 잡은 문파들 중에 가장 큰 문파지요. 도가 계열의 문파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뒷소문이 많은 곳이에요. 산동성의 패주를 자처하고는 있지만 그 영향력은 태산 일대를 벗어나지 못해요.”
“그렇군.”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산에 고독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강호 무림에 다시 발을 디디는 첫 제물로 태허문을 선택한 것이겠죠.”
태산이라면 일 년의 대부분이 안개에 휩싸여 있다는 명산이다.
만일 고독객 독고랑이 홀로 검을 수련하고 있었다면 태산에 있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가 절세 비급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은 어찌 된 거냐?”
모용미가 살짝 조소를 머금었다.
“아마도 태허문 문주가 흘렸을 거예요. 덕분에 그가 고독객의 일 검조차 받아 내지 못한 사실은 확실하게 묻혀 버렸으니까요.”
“태허문의 문주를 일 검에 말이냐?”
모용진은 놀라 되물었다.
태허문 문주라면 산동성에선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다.
소문으로는 도술을 부리기도 한다는 둥 허황된 면이 없지 않지만, 적어도 무공으로는 예전 철가장 가주 철무웅에 비견되는 사람이다.
“일 검이라는 건 소문이에요. 하지만 그를 이겼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요.”
“호오.”
모용진은 은근히 호승심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홀연히 나타나 한 자루 검으로 강자를 꺾고 사라지는 사내.
고독객 독고랑은 검을 쥔 자들에게는 확실히 흥미로운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고독객은 궁지에 몰렸어요. 탐욕에 눈이 먼 들개 떼를 홀로 상대하는 건 아무리 강한 늑대라도 쉽지 않으니까요.”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가 있는 곳이 태산이란 말이냐?”
“지금은 아니지요. 말했잖아요. 쫓기고 있다고.”
모용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난 행적과 추적자들의 위치를 고려하면 아마도 철정산 즈음에서 그를 만나게 될 거예요.”
자신감 넘치는 그 말에 모용진은 빙긋 웃었다.
“그렇구나. 내 동생이 그리 말한다면 당연히 그리되겠지.”
전폭적인 신뢰가 느껴지는 그 말에 모용미가 모용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모용진은 이미 고독객 독고랑을 만날 기대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고독객이라…….”
모용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미 그의 호승심에 불이 당겨진 모양이었다.
모용미는 실소를 흘리고는 마차에 앉아 있는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도 모용미의 시선을 느꼈는지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인다.
사락.
모용미는 말을 탄 채로 고개를 숙여 그 예에 답했다.
그리고 운현의 눈동자 역시 기대로 반짝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오라버니 모용진과 마찬가지로.
‘역시, 다 들었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차 곁에 바싹 붙은 채로 이어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운현이라면 조금 전의 대화를 놓치지 않았으리라.
‘고독객 독고랑이 가지고 있다는 서찰은.’
따각, 따각.
단조롭게 이어지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모용미는 생각했다.
‘아마도 창룡검주의 것이겠지. 다른 괴서찰과 다르게.’
모용미는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서로 다른 이질적인 서찰이 강호 무림에 보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무림맹마저 그 서찰들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지만.’
모용미는 창룡검주의 서찰을 읽고 또 읽었다.
이제는 문장은 물론이고 글자 하나마저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수채에 괴서찰이 흘러들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모용미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건 창룡검주의 서찰이 아니야.’
세가에 온 서찰을 통해 모용미가 만난 창룡검주는 오로지 검에 대한 열정, 그 하나뿐인 존재였다.
강호 무림에 혼란을 일으키고 무림맹을 흔들기 위해 수적에게 서찰을 보낼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혹 그 수적이 검의 도에 대한 남다른 갈망이라도 갖고 있다면 모를까.
슥.
모용미는 다시 운현을 돌아보았다.
짐짓 무심하게 지나는 경치를 보는 듯하지만 운현의 눈동자는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럴 때는 참 바슷해. 오라버니도, 운 학사도, 그리고 상아도.’
문득 모용미는 세 사람의 눈빛이 아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총명하지만 너무나 밝고 순수한, 그래서 감추려는 것마저 환히 보이는 아이처럼 말이다.
모용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이 일을 통해 운현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어느새 희미하게 색이 바래고 있었다.
***
조사단과 모용진, 모용미 일행이 산동성 철정산에 도착한 것은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 무렵이었다.
“음, 밤 산행은 그리 바라는 바가 아닌걸.”
매화검 영호준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당설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를 만나고 싶다면 서두르는 게 좋아요. 고독객은 어제 이 산에 이르렀다고 하니까요. 물론 추적자들을 한 가득 이끌고 말이죠.”
당설련은 마차에서 사뿐 내려섰다.
그리고 수행원 중에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을 불렀다.
“부근 마을을 수배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 대기해. 긴급한 일이 생기면 미리 약속한 대로 신호를 보내고.”
수행원은 고개를 숙여 당설련의 명을 받들었다.
“아, 그리고 운 서기는.”
당설련은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운현을 흘낏 쳐다보고 말했다.
“우리와 함께 갈 테니 그리 알도록.”
“저희도 가겠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모용진이 당설련에게 말했다.
당설련은 모용진과 그 뒤에 서 있는 모용미를 쳐다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두 분의 안전은 책임질 수 없어요.”
모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설련은 마차에서 내린 영호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가 볼까요? 화산의 이름난 경공을 다시 견식 할 수 있겠군요.”
“내가 어찌 당문의 눈꽃께 비할 수 있겠소?”
영호준이 과장된 몸짓으로 그렇게 말할 때였다.
“아, 저기…….”
운현이 뒤에서 말했다.
영호준과 당설련이 돌아보자 운현은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는 어떻게 할까요?”
영호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라니? 당연히 같이 가는 것 아니겠소?”
“하지만…….”
무언가 곤란하다는 운현의 표정에 당설련의 눈꼬리가 치솟았다.
“설마 우리와 동행하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운현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경공을 못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