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26화 (126/530)

126화. 제자도 지인도 아니다

“운 대인께서 ‘그분’과 어떤 인연이신지.”

모용미가 나지막이 운현에게 말했다.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창룡검주’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이 모용세가에 무림맹의 조사단이 와 있기 때문이리라.

“말해 주실 수 없을까요?”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싶지만.”

모용미를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이 말했다.

“지금은 때가 좋지 않습니다.”

운현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모용미는 운현이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인께서 그리 판단하셨다면 당연히 그리하셔야지요.”

모용미는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저희는 운 대인께서 그분의 제자나 혹 지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지만요.”

“하하하.”

운현은 웃었다.

자기 자신의 제자라니 우스꽝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저는 제자도, 지인도 아닙니다.”

순간 모용미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운현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모용미는 다시금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에요. 그럼 저희는 그리 알고 기다리겠습니다. 때가 되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세요.”

모용미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저희는 그 어떤 것이든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의 말은 유난히 무거웠다.

그래서였을까?

“무엇을 요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야 어찌 그것을 호의라 할 수 있겠습니까?”

모용세가에 보낸 서찰은 전적으로 호의였다.

물론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순수한 호의일 뿐 서찰의 보답을 바란 적은 없었다.

자신이 예전에 모용세가에서 서찰의 주인임을 밝히지 않은 것 역시,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자칫 호의를 빌미로 대가를 요구하는 파렴치한 사람이 될 뻔했으니 말이다.

“……그런가요?”

“네, 그렇습니다.”

운현은 서슴없이 단언했다.

잠시 눈빛이 흔들리던 모용미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렇군요.”

어쩐지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모용미는 운현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그 미소가 부담스러운 운현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찻잔을 홀짝였다.

게다가 대추의 분배를 마친 모용상아의 싱글거리는 눈빛도 매우 부담스러웠다.

“크흠. 아, 혹시.”

운현은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새벽에 수련을 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수련요? 아.”

모용미는 운현이 용봉지회에서 새벽마다 비무대를 찾았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다른 사람의 수련을 구경하려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마침 적당한 곳이 있어요.”

모용미는 웃으며 말했다.

“가주와 직계 외에는 사용할 수 없는 곳이지요. 그곳이라면 다른 사람의 방해를 걱정하실 필요도 없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운현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아, 하지만.”

모용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어쩌면 오라버니를 만날지도 모르겠네요.”

오라버니라면 대제자 모용진이다.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어진 모용미의 말은 운현의 눈동자를 단번에 반짝이게 만들었다.

“운 대인께 보여 드리고 싶은 것이 아주 많은가 보더라고요.”

모용진이 보여 주고 싶은 것이라면 검의 성취 외에는 없다.

그렇지 않아도 앞날이 촉망되던 그가 어떤 검로를 이루어 냈을지 운현은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가요?”

기뻐하는 운현의 모습을 보며 모용미는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운현은 보이는 그대로의 사람이다.

숨기는 것도 없고 계산도 하지 않는, 처음 서호에서 보았던 그 소탈하고 초연한 모습처럼 말이다.

운현을 바라보며 미소 짓던 모용미는 문득 동생 모용상아의 반짝이는 시선을 알아차리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하지만 모용상아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모용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자박, 자박.

등을 밝힌 세가 건물들 사이로 모용미와 모용상아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운현이 준 대추 꾸러미를 손에 들고 종종걸음을 옮기던 모용상아가 문득 말했다.

“언니.”

“왜?”

모용미가 모용상아를 보지도 않은 채 답했다.

지금 그녀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운 오빠라면 나도 찬성이야.”

“찬성이라니, 뭐가?”

“언니랑 혼인하는 거.”

자박.

모용미는 깜짝 놀라 상념에서 깨어났다.

걸음까지 멈춘 모용미는 동생 모용상아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그게 무슨…….”

모용상아는 빙긋 웃었다.

“난 봤어.”

그 말과 웃음이 어쩐지 불안하다고 모용미는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깜짝 놀랄 말이 모용상아의 작은 입에서 흘러나왔다.

“언니 운 오빠를 열심히 쳐다보고 있던걸? 반한 거지?”

“얘는!”

모용미는 펄쩍 뛰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니? 너는…….”

“지금도 언니는 운 오빠 생각을 하고 있었잖아. 그렇지?”

모용미는 순간 대답할 말이 없었다.

동생의 말처럼 운현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동생의 생각과는 사뭇 달랐다.

‘제자도, 지인도 아니라고 했어.’

언뜻 지나가듯 한 말이었지만 운현은 분명 자신이 창룡검주의 제자도, 지인조차도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말이 옳다고 전제한다면 가능성은 둘 뿐이다.

첫째는 바로 전혀 무관한 타인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

운현은 창룡검주와 인연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창룡검주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 서찰의 내용을 알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다.

‘바로 창룡검주 본인일 경우.’

운현의 말을 듣는 순간 모용미는 직감적으로 그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정말 그가 창룡검주일까?

어쩌면 자신이 성급한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닐까?

모용미는 아직까지도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떠오르는 건 운현의 그 부드러운 미소와 빛나는 눈동자뿐이다.

“너무 걱정 마.”

문득 모용상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여운 동생 모용상아가 웃으며 모용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운현에게 선물받은 꿀에 절인 대추 꾸러미를 꼭 들고서.

“운 오빠도 언니에게 반한 것 같으니까.”

“……뭐?”

모용상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운 오빠도 아까 언니만 열심히 쳐다보고 있던걸? 난 신경도 안 쓰고 말이야.”

생각하니 억울한지 모용상아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아마 지금쯤 달을 보며 언니를 위한 시라도 짓고 있을지 몰라. 혹시 연서라도 받으면 유치하다고 웃지 말고 고맙다고 해 줘. 남자는 자존심을 세워 줘야 하거든.”

종알거리는 동생 모용상아를 모용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후후.”

모용미는 웃음을 흘리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야.”

동생 모용상아를 보니 자신의 생각이 문득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래. 그가 기다려 달라고 했으니까.’

마음을 번잡하게 하던 상념은 사라졌다.

수많은 의문과 가능성을 따져 보던 것들도 버렸다.

‘기다리면 돼.’

모용미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렇게 결심했다.

“언니.”

모용상아가 모용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안아 주면 안 돼? 나 졸려.”

생각해 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눈을 비비는 모용상아에게 모용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리 오렴.”

모용미는 어린 동생 모용상아를 안아 들었다.

작고 귀여운 모용상아가 그녀의 품에 폭 안겨 들고, 그 따뜻한 온기에 모용미는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자박, 자박.

대추 꾸러미를 꼭 끌어안은 어린 동생을 품에 안고 모용미는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겼다.

달빛에 비친 모용미의 표정은 더 없이 부드럽고 온화했다.

***

“고독객?”

매화검 영호준은 난데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하지만 당문설화 당설련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고독객 독고랑을 모른다고는 안 하시겠죠?”

“글쎄, 나는 사내 녀석들 이름 외우는 것은 딱 질색이라서…….”

영호준은 손을 내저었다.

“게다가 그런 땀 냄새 나는 명호라면 기억에도 남겨 두고 싶지 않소.”

“안됐군요.”

찻잔을 들어 올리는 영호준을 보며 당설련은 살짝 조소를 지었다.

“이제부터는 싫어도 외우게 될 테니까요. 그가 골치 아픈 일을 가져왔거든요.”

“일?”

영호준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무슨 복수랍시고 가문 하나를 불태웠다든가 그런 거 아니오? 그런 거라면…….”

“아니에요.”

당설련은 간단하게 영호준의 말을 잘라버렸다.

“그가 절세 비급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에요.”

나지막한 탄식이 영호준에게서 흘러 나왔다.

“그건 더 어이없는 얘기로군. 얘기 끝났으면 이제 난 가도 되겠소? 새벽까지 술을 마셨더니 아직 머리가 아파서…….”

영호준은 벌써 자리에서 일어날 태세였다. 그러나 당설련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비급이 서찰이라고 하더군요.”

영호준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당설련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지금 그걸 조사하러 가자는 말은 아니라고 믿소. 모처럼 모용세가에서 좋은 대접을 해 주고 있는데…….”

당설련의 눈매가 날카롭게 위로 솟았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겠지.”

영호준은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귀찮은 일을 억지로 떠맡게 된 그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말해 주시오. 최대한 간략하게.”

“간단해요. 고독객 독고랑에게 절세 비급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욕심에 눈이 먼 바보들이 몰려들었죠. 이미 피를 본 사람들도 적지 않아요.”

당설련의 설명에 영호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그냥 늘 떠돌던 헛소문 같은데?”

“그렇겠지요. 당신이 이곳에 이렇게 오래 있지 않았다면요.”

영호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거기서 갑자기 내 탓이 되는 거요?”

“무림맹 조사단이 모용세가의 서찰을 조사하려고 칠 일간이나 머물렀으니까요.”

영호준은 당설련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즉, 우리 조사단이 괴서찰에 대한 소문에 불을 지핀 셈이라는 거로군. 이거 완전 역효과인데?”

괴서찰은 어디까지나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했다.

그러나 무림맹에서 조사단이 나올 정도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배후를 찾으려던 것이 오히려 괴서찰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킨 셈이다.

달그락.

당설련은 찻잔을 들어올렸다.

“남궁세가도 이미 장강으로 출발했어요. 토벌이 끝나면 당신도 더 이상 조사단 놀음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 무엇이든 성과를 만들어 둬야 하지 않겠어요?”

남궁세가가 무심파 토벌에 성공하면 무림맹은 아주 바빠질 것이다.

기세를 탄 남궁세가는 영향력 확대를 시도할 것이고, 다른 문파 대표자들은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 온갖 밀약이 오가리라.

당설련의 지적처럼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는 없어진다.

“쯧, 남궁세가가 벌써 출발했다니.”

영호준은 탐탁찮은 듯 말했다.

“무당파도 많이 누그러졌군. 이렇게 빨리 타협할 줄은 몰랐는데.”

“그럴 수밖에요. 남궁세가의 가주 뇌검 남궁진천이 나섰으니까요. 그가 직접 검을 뽑아 들었어요.”

“설마 뇌검 남궁진천이 친히 토벌대로 나섰단 말이오?”

“그래요.”

당설련은 사뭇 긴장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총원 백이십다섯 명, 그것도 남궁세가의 제자들로만 구성된 토벌대예요. 이 정도라면 가히 남궁세가의 핵심 전력이라고 할 수 있죠. 한동안은 강호에서 남궁세가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을 거예요.”

“으음, 이거…….”

영호준은 탁자에 기대며 턱에 손을 괴었다.

“조사단을 꾸릴 게 아니라 장강 쪽으로 가볼 걸 그랬나?”

탁.

“장강이 아니에요.”

다시 한번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이 흔들렸다.

당문설화 당설련은 영호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고독객 독고랑을 조사하러 갈 거예요. 그것도 당장. 알았어요?”

단호한 그녀의 목소리에 영호준은 한숨을 쉬었다.

느긋한 시간은 끝나고 이제는 일을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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