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예(禮)
스륵.
의자에 등을 기대며 모용단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분의 제자를 찾아뵙고 싶지만.’
단 한 통의 서찰을 통해 창룡검주는 모용단천에게 새로운 검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받은 바에 보답하는 것은 무인의 절대적인 신념이다.
은혜는 열 배로, 그리고 원한은 백 배로.
그러므로 창룡검주를 향한 모용단천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 제자로 추정되는 운현이 세가에 와 있으니 어찌 만나고 싶지 않으랴?
가능하다면 창룡검주와 그의 검에 대해, 그 놀라운 경지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저 생각만으로도 모용단천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마치 검을 수련하던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하지만.’
무림맹 조사단이 세가에 함께 머물고 있다.
게다가 창룡검주의 제자는 서기로서 그들과 동행하고 있다.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상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금물이었다.
‘미아나 진이를 보내는 정도뿐인가?’
가주인 자신이 운현을 만나는 것은 의심을 살 여지가 있다.
그러나 모용미나 모용진 정도라면 괜찮을 것이다.
무엇보다 모용미는 용봉지회에서 만났던 인연도 있다니 말이다.
“후우우.”
모용단천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하군.”
창룡검주는 여전히 천외비처에 숨어 있다.
그 제자로 추정되는 운현의 의도는 알 수 없고, 무림맹은 여전히 커다란 벽이 되어 모용세가의 앞에 서 있다.
가주 모용단천으로서는 여러모로 답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 모용단천처럼 운현 역시 근심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후우우.”
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조사단이, 내가 보낸 서찰을 감찰하려는 조사단이었단 말인가?’
조금 전 영호준과 당설련이 서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운현은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야기를 들어 보니 자신이 무림맹과 적대하여 새로운 세력을 세울, 무슨 악의 배후 같은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체 어쩌다 이런.’
운현으로선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으로선 그저 순수한 호의로 보낸 것이다.
물론 자신이 알아차린 것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중히 예를 갖춰 보낸, 문인으로선 너무나 상식적인 서찰이었다.
서로의 글에 대해 문인들이 소감을 나누고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말이다.
‘가끔은 그러다가 싸움이 나기도 하지만, 난 그런 것도 없었잖아.’
당연히 없다.
상대가 반론을 펴려 해도 답장을 보낼 방법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익명으로 서찰을 보낸 운현이 찔리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그렇다고 괴서찰 취급은 대단히 억울했다.
‘그나마 가주께서 잘 해 주셔서 다행이지.’
가주 모용단천이 자신을 흘깃 쳐다보는 건 운현도 느꼈다.
운현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몰라도 모용단천은 완강히 서찰의 공개를 거부했다.
하긴 모용세가가 무림맹의 산하 조직도 아닌데 그런 사적인 것을 공개할 이유는 없으리라.
‘진짜 범인이 잡혀야 하는데.’
운현의 서찰이 의심받는 이유는 진짜 괴서찰이 있기 때문이다.
무림맹에 적대하고 새로운 세력을 일구려 하는 자들이 말이다.
이번에 장강에서 남궁세가를 꺾은 무심파가 받은 것이 바로 그런 괴서찰이다.
‘그걸 입수할 방법이 어디 없을까?’
진짜 괴서찰을 찾으면 자신의 무고함도 증명할 수 있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운현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운 오빠!”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용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상아야, 허락을 받고 문을 열어야지!”
“괜찮아. 운 오빠는 나를 좋아하니까.”
열린 문 너머로 모용미와 모용상아가 서 있었다.
모용미는 여전히 성숙하고 조용한 분위기였고, 모용상아는 언제나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운 오빠!”
모용상아는 운현을 향해 거침없이 뛰어왔다.
그리고 작은 손으로 운현을 톡톡 쳤다.
“왜 이제 왔어? 기다렸단 말이야.”
그 행동에 모용미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되었다.
운현도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곧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 내가 좀 늦게 왔지?”
모용상아는 방긋 웃었다.
“헤헤. 괜찮아. 말없이 떠난 건 싫었지만, 다시 왔으니까 용서해 줄게.”
“죄, 죄송해요. 운 학사님.”
모용미가 운현에게 말했다.
“상아가 평소에는 예의 바른데 갑자기 왜 이러는지…….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어요.”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모용미가 사과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봐! 괜찮다고 했잖아.”
그 말에 모용미는 모용상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모용상아는 본척만척 신경도 쓰지 않는다.
“우선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밤바람이 차니…….”
“감사합니다.”
모용미의 예에 운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따져 보면 이곳의 주인은 모용미인데 도리어 감사를 받다니 이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달칵.
모용미와 모용상아가 방으로 들어오고, 운현은 차를 준비했다.
모용상아는 폴짝 뛰어 의자에 앉았다.
키가 작으니 발이 땅에 닿지 않아서 앉은 채로 물장구치듯 발을 찰랑거렸다.
반면 모용미는 단아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운현을 기다렸다.
운현은 두 사람에게 따뜻한 차를 냈다.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오빠.”
모용미가 또다시 노려보자 모용상아가 얼른 말을 바꿨다.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모용미가 조용히 찻잔을 드는데 모용상아가 운현에게 말했다.
“오빠, 선물 사 왔어요?”
“상아야!”
차를 마시던 모용미가 얼른 막았지만 이미 모용상아의 말은 밖으로 나온 다음이다.
“서, 선물?”
운현은 눈을 껌뻑였다.
“죄, 죄송합니다. 상아 말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모용미는 정색을 하고 모용상아에게 말했다.
“상아야! 너 정말…….”
“아니, 괜찮습니다.”
운현이 얼른 모용미를 말렸다.
그리고 운현은 모용상아에게 미소를 지었다.
“잠깐만.”
자리에서 일어선 운현은 짐을 뒤졌다.
따로 준비한 선물은 없지만 모용상아가 좋아할 만한 것은 있었다.
부스럭.
운현이 꺼낸 것은 꿀에 절인 대추였다.
긴 여행 중에 원기를 돋우기 위해 먹으려고 항주에서 산 것이다.
온갖 물산이 넘쳐나는 항주답게 제법 싼값에 여러 꾸러미를 구할 수 있었는데, 그중 한 꾸러미를 운현은 꺼냈다.
그사이, 언니 모용미는 작은 소리로 모용상아를 혼내고 있었다.
물론 운현이 돌아서자마자 끝났지만.
“좋아할지 모르겠는데…….”
“우와!”
꾸러미를 풀자 나온 대추를 보고 모용상아는 좋아했다.
“이러실 필요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하는 모용미에게 운현이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저도 상아에게 좀 미안했으니까요.”
지난번 모용세가를 떠날 때 모용상아에게 말하지 않은 건 운현의 실책이었다.
어쨌거나 모용상아는 운현에게 친절히 대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자, 언니.”
모용상아가 꿀에 절인 대추 하나를 들고 불쑥 모용미에게 내밀었다.
“언니 먼저 먹어.”
모용미는 당황했다.
먹을 것을 양보하는 건 어린 모용상아에겐 대단한 일이다.
아무리 손님 앞이라지만 그 마음을 차마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괜찮습니다. 드시지요.”
운현이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모용미는 조금 주저하며 손을 내밀었지만 모용상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손에 묻어. 그냥 내가 넣어 줄게.”
평소라면 당연히 입을 벌렸겠지만 지금은 운현 앞이다.
모용미는 굳이 손을 내밀어 대추를 받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붉은 입술을 살짝 열어 대추를 넣었다.
‘부, 부끄러워.’
그저 그뿐인데 모용미의 뺨이 붉어졌다.
어쩌면 동생 모용상아와 운현이 자신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크흠.”
운현이 그제야 눈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냥 모용미가 대추를 먹는 것일 뿐인데, 어쩐지 보지 말아야 할 비밀스러운 모습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모용미는 입을 오물거리며 대추를 먹었다. 하지만 부끄러움과 긴장 탓인지 맛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운현은 운현대로 딴 곳을 쳐다보며 찻잔만 매만졌다.
그 와중에 모용상아는 대추를 헤아리며 혼잣말처럼 종알거렸다.
“이건 할아버지 드리고, 이건 진 오빠 주고, 이건 총관 할아버지랑…….”
사뭇 즐거운 듯 모용상아는 발을 찰랑찰랑 저으며 기뻐했다.
저렇게 줄 사람이 많아서야 정작 모용상아가 먹을 것이나 남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한 꾸러미 더 줘야 하나?’
운현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모용미가 천으로 입을 가리고 대추씨를 뱉어 냈다.
어쩐지 아쉽다고 운현이 생각했지만 모용미는 아까도 천으로 가리고 먹을걸 하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안을 씻어 낸 모용미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운 대인.”
운 대인이라는 호칭은 운현에게도 어색했다.
아까 운 학사라 부른 것은 엉겁결에 익숙한 호칭이 나온 듯했다.
“그냥 운 학사라고……. 아니, 운 서기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학사의 직을 내려놓았으니 운현은 더 이상 학사가 아니다.
황궁의 박 환관은 ‘배우는 자는 언제나 학사’라고 했지만 그것은 박 환관의 위로일 뿐, 따지자면 운현은 운 서기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모용미에게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요.”
모용미는 아름다운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어려움의 때에 창룡검주께서 우리 세가에 베풀어 주신 은혜는 지극히 커서 그 무엇으로도 감히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말은 운현을 놀라게 했지만 동시에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자신이 보낸 서찰이 그렇게 큰 도움이 되었다니, 창룡전에서 쓸쓸히 보내던 시간들이 단번에 보답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인께서 그분과 남다른 인연이 있음을 이미 아는데 저희가 어떻게 대인께 소홀히 대할 수 있을까요?”
사락.
모용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운현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넘쳐흐르는 진심 때문임을 운현은 너무나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희의 이 뜻을 부디 그분께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운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고도 싶었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 모든 말을 막아 버릴 정도로 모용미의 말은 운현의 마음을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운현은 천천히 말했다.
그 목소리 역시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뜻은 분명히 전해질 것입니다.”
모용미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 편안하고 부드러운 미소는 너무나 아름답고 따뜻했다.
사락.
모용미가 자리에 앉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운현은 찻잔을 매만지며 벅찬 마음을 가라앉혔다.
‘본래라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옳겠지만.’
상대의 진심에 운현 또한 진심으로 응하는 것이 예(禮)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서찰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난 후다.
자신이 창룡검주라는 것을 밝히는 건 아무래도 미루는 것이 현명하리라.
“몇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문득 운현이 말했다.
모용미는 미소를 지었다.
“네, 무엇이든요.”
“제가 창룡검주와……, 크흠 인연이 있는지는 어찌 아셨습니까?”
자신을 남인 듯 이야기하려니 쑥스럽고 숨기는 셈이니 부끄럽다.
운현은 헛기침을 했다.
“대인께서 그분과 인연이 없으셨다면.”
모용미는 조용히 답했다.
“그분의 서찰에 있던 검로를 재현하실 수는 없었겠지요.”
‘아하.’
운현은 의문 하나를 풀었다.
그러니까 이곳의 대제자, 모용진에게 보여 줬던 모용세가의 검식이 근거였던 것이다.
“용봉지회에서도 남해검문의 파 공자를 도와주셨지요?”
빙긋 웃으며 모용미가 말했다.
“파 공자는 이미 알고 있더군요. 그에게도 정체는 숨기셨던 모양이지만요.”
운현은 뜨끔했다.
자신을 보는 파진한의 시선이 남달랐던 건 바로 그 때문인 듯했다.
‘다 알고 있었다니.’
어쩐지 자신을 숨기려 했던 일들이 창피해졌다.
다음번에 파진한을 만나면 미리 실토를 해야겠다고, 운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차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