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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24화 (124/530)

124화. 서기의 방문

“꼭 네가 가야 하는 일이냐?”

호암상단의 가주 이호암은 딸 이서연에게 말했다.

“네. 아버지.”

이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움직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에요. 만일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저는 반드시 후회할 거예요.”

가주가 움직이는 것은 곧 남궁세가의 전력을 쏟는다는 뜻이다.

앞으로 또 언제 이런 일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대단한 기회다.

“음.”

가주 이호암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딸의 말은 옳다.

하지만 구태여 위험을 감수하고까지 그래야 하는지 이호암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

그런 이호암의 속내를 눈치챘는지 이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

“때로는 직접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도 있어요. 저는 이번 일을 통해 우리 호암상단이 남궁세가와 어떤 관계를 맺어 가야 할지 확인하려고 해요.”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것은 지난번 운현의 ‘그 광경’을 본 이후로 이서연의 흔들림 없는 신념이 되었다.

“허나 만일의 경우 너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이서연은 생긋 웃었다.

한창때인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가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를 위험하게 할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호암은 더 이상 그녀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알았다. 대신 호위를 데려가도록 해라.”

이서연은 입을 비쭉 내밀었다.

“어차피 잘못될 상황이라면 호위가 있어도 마찬가지란 사실을 모르시나요?”

“담보라고 생각해라.”

늙은 이호암은 딱 잘라 말했다.

이서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사락.

이서연은 팔을 뻗어 아버지 이호암을 안았다.

“고마워요, 아버지.”

이호암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였다.

하지만 더 이상 그가 화를 내고 있지 않음을 이서연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다녀올게요.”

이서연은 가볍게 예를 표하며 그렇게 말했다.

“조심하라고는 하지 않겠다.”

이호암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허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온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늙은 이호암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이서연은 분명히 보았다.

“걱정 마세요.”

사뭇 낭랑한 목소리로 이서연이 말했다.

“그보다 이번 기회에 오빠들에게 신경을 좀 쓰시는 게 좋겠어요. 너무 오랫동안 내버려 두면 이상한 생각을 품을 수도 있거든요.”

이서연은 살짝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나중에 봐요. 아버지.”

탁.

집무실의 문이 닫히고 이호암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젊은 딸의 패기는 부럽지만 늙은 이호암에겐 때로 무모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이호암은 주름진 손을 쥐며 중얼거렸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법이지.”

그런 면에서 딸 이서연은 이호암을 닮았다.

그 거침없는 행동력도,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패기도, 그리고 세상을 두려워 않는 어리석음도 말이다.

이호암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이 유독 실감나는 요즈음이었다.

***

“어서 오십시오.”

정문 앞에 나와 있던 모용세가의 총관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무림맹의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을 이렇게 맞이해 주셔서 감사드리오.”

매화검 영호준이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미리 서찰을 보내긴 했으나 갑작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사람 숫자도 적지 않았다.

십여 명의 수행원과 서른 명의 호위무사를 포함하면 조사단은 오십여 명에 달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노년의 총관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총관의 시선이 뒤쪽으로 잠깐 향하는 것을 영호준은 놓치지 않았다.

“가주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안으로 드시지요.”

총관의 말에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살을 찌푸린 채 모용세가를 쳐다보던 당설련도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노년의 총관과 영호준, 당설련이 세가 안으로 사라졌다.

남은 수행원들과 호위무사들은 짐을 내리고 말을 묶느라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열심히 짐을 내리는 신입 서기 운현도 끼어 있었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짐을 내리던 운현은 모용세가를 바라보며 새삼 생각했다.

‘다들 잘 있을까?’

모용세가의 기억은 운현에겐 흐뭇한 것들이다.

앞날이 기대되는 모용진이라는 청년도, 귀여운 꼬마 여자아이 모용상아도, 그리고 성숙한 분위기의 모용미도 말이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면 다들 좋아하겠지.’

운현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조사단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 말이다.

***

‘음.’

모용세가의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앞에는 무림맹 대표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화산파의 매화검 영호준과 당문의 이름 높은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이었다.

모용세가로서는 정중할 수밖에 없는 상대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들고 온 용건에 있었다.

“괴서찰이라 하셨소?”

“그렇게 말씀하시니 오해의 소지가 있군요.”

귀공자 같은 외모의 영호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는 다만 모용세가가 받은 서찰과, 무심파가 받았다는 괴서찰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지 확인하고자 할 뿐입니다.”

“뜻은 알겠소.”

모용단천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무심파 같은 곳과 우리 모용세가를 연관시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대단히 모욕적으로 들리오만.”

그의 기세는 사뭇 대단했다.

영호준은 내심 감탄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물론 이해합니다. 하지만…….”

“서찰을 보여 주시면.”

여인의 목소리가 영호준의 말을 끊었다.

옆에 앉아 있던 당문설화 당설련이 냉랭하게 말했다.

“모든 것이 끝날 일이에요.”

모용단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당문의 대표자라 하나 당설련은 지나치게 안하무인이었다.

“허허.”

모용단천은 웃음을 흘렸다.

“세가의 사사로운 서찰을 감찰할 권한은 무림맹에도, 당문에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만.”

수염을 쓰다듬으며 모용단천은 말했다.

“그래도 당문에서 뜻을 굽히지 않겠다면 우리 모용세가도 진심으로 나설 수밖에 없겠소이다.”

그건 명백한 거절의 뜻이었다.

한순간 모용단천과 당설련의 눈빛이 마주쳤지만 누구도 먼저 눈을 돌리지 않았다.

“저희가 어찌 모용세가를 감찰할 수 있겠습니까?”

영호준이 나섰다.

아무리 상대가 당문이라도 가문의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협조할 리가 없다.

그러나 당설련 또한 절대로 먼저 물러서지 않을 것을 잘 알기에, 결국 영호준이 중재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무림맹의 우려를 씻을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신다면 충분합니다.”

그건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였다.

모용단천이 영호준을 바라보았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시오?”

“서찰의 수신인과 발신인, 그리고 개략적인 내용.”

당설련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모용단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또한 무림맹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거나 혹은 새로운 세력 형성을 암시하는 언급이 있는가 하는 것들이에요.”

“그런 언급은 없었소.”

“그건 우리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당설련의 말에 모용단천의 눈살이 일그러졌다.

“그건 결국…….”

서찰을 보겠다는 뜻이 아닌가라고 모용단천은 말하려 했다.

하지만 당설련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가주님께서 그러한 내용이 없었다고 가문의 이름을 걸고 확언하신다면 무림맹은 그 말씀을 믿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협박이자 거래였다.

“없었소.”

모용단천은 서슴없이 말했다.

“가문과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컨대 결코 그러한 언급은 없었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용단천을 날카롭게 쳐다보던 당설련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락.

가주 모용단천은 물론 매화검 영호준도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당설련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옥구슬 구르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집무실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가주님의 말씀을 믿도록 하지요.”

당설련의 태도는 정중했다.

그러나 그것이 협박의 또 다른 형태임을, 모용단천도 매화검 영호준도 모르지 않았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모용단천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하기 이를 데 없소이다.”

한순간 모용단천의 시선이 당설련의 뒤로 향했지만 그건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기 싸움은 누구도 물러서는 일 없이 치열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때, 서기로서 뒤에 앉아 있던 운현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무림 고수들의 팽팽한 기 싸움에 놀란 것 같았지만 내심은 아주 달랐다.

‘내가 뭐라고 썼더라?’

운현은 열심히 기억을 떠올렸다.

검에 대한 것은 전부 기억한다.

자신이 무엇이라 썼는지, 그리고 어떤 제안을 했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서찰의 내용 전부를 완전히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혹시라도.’

그럴 의도는 물론 없었다.

하지만 무림맹에 대한 불만이나, 혹은 새로운 세력을 이루려는 것으로 오해되는 문장을 썼는지는, 운현 본인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운현은 노심초사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 운현의 앞에서, 모용세가 가주 모용단천과 당문의 눈꽃 당설련은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

모용세가의 가주 관일검 모용단천은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 원인은 바로 세가를 찾아온 무림맹의 조사단이었다.

‘이거 마냥 기뻐할 수도 없고…….’

무림맹에서 조사단이 찾아온다는 데 기쁠 이유는 없다.

말로는 협조를 부탁한다지만 무림맹의 위세를 빌어 세가 내부를 들여다보겠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에 ‘창룡검주의 제자’가 동행하고 있다면 상황은 다르다.

‘남해검문에 사람을 보냈지만 성과가 없었거늘.’

창룡검주의 제자, 정확히는 제자로 추정되는 운현을 찾기 위해 머나먼 남해검문까지 사람을 보냈다.

다행히도 파진한은 모용세가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아마도 그건 운현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동질감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파진한이 아는 것은 모용세가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용봉지회의 일은 어차피 모용미도 알고 있었고, 운현의 정체를 모르는 것은 파진한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운현의 행적에 대해서도 역시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그 운현이 무림맹 조사단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서기로서.

‘그래도 일개 서기 같지는 않아 보이던데…….’

조금 전 모용단천을 당황스럽게 한 것은 무림맹 조사단이 서찰을 보자고 한 까닭만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그 서찰을 잘 알고 있을 운현이 그들 뒤에 떡하니 앉아 있는 것이다.

모용단천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 ‘혹시 창룡검주의 제자가 우리의 신의를 시험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그분의 제자와 무림맹이라…….’

서기라는 직책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운현이 무림맹과 함께 있다는 점이다.

화산의 대표자인 영호준과 당문의 대표자 당설련도 그것을 알고 있음은 분명했다.

모용단천과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는 중에도 그들이 운현을 신경 쓰는 것을 모용단천은 분명히 보았으니까.

문득 모용단천은 영호준과 당설련을 떠올렸다.

‘매화검 영호준, 그리고 당문설화 당설련.’

그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직 젊은데도 그들의 기세나 노련함은 모용단천조차 함부로 방심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과연 무림맹이로군.’

저런 뛰어난 젊은이들이 대표자라면 장로들이나 문주들은 어떠할까?

모용단천은 새삼 무림맹의, 그리고 무림맹 십팔 대 문파의 저력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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