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괴서찰 감찰단
흐뭇한 영호준의 미소에 당설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아무도 반기지 않는 손님이에요.”
당설련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왜 제 눈에는 당신이 그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지요?”
“내가 말이오?”
“그래요.”
당설련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화산파의 뜻인가요, 아니면 당신 개인의 의지인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반한 사람이라 그렇소.”
영호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말했지 않소? 재미있을 것 같다고.”
당설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싱글거리는 영호준의 얼굴은 철벽과 같았다.
그에게서 아무런 의미 있는 대답도 나오지 않을 것을, 당설련은 알았다.
“좋아요. 그렇다고 해 두죠.”
살짝 한숨을 쉬고 당설련이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소림으로 가고 있는 거지요?”
영호준이 스스로 제안하고 구성한 이 조사단의 목적은 강호 무림에 나도는 괴서찰의 배후를 찾는 것이다.
당연히 괴서찰에 대한 소문이 돈 문파나 세가를 찾아가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나 조사단은 생뚱맞게도 소림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건 소림 정도는 되어야 재미있는 게 나올 것 같기 때문이오.”
당설련은 의아한 표정으로 영호준을 보았다.
“……재미있는 거라고요?”
“하하, 갑자기 또 왜 모르는 척을…….”
영호준은 웃으며 말했다.
“작은 문파 따위 털어 봤자 뭐가 나오겠소? 소림 정도는 되어야 뭔가 재미있는 게 나오지 않겠소?”
당연한 말이긴 하다.
소림의 역사는 매우 길고 대단히 폐쇄적이어서 숨겨진 것들 또한 아주 많을 테니까.
하지만 당설련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소림에 괴서찰이 왔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오?”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아무거나 나오면 그만이지.”
당설련은 잠시 침묵했다.
소림을 흔들어 보는 건 확실히 그녀에게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문제 또한 분명했다.
“……소림을 흔들 수 있겠어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당설련이 물었다.
소림을 흔들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성과가 될 것이다.
당장 출처조차 의심스러운 괴서찰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영호준의 대답은 그녀의 기대와 크게 달랐다.
영호준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 흔들리면 말고.”
빠득.
당설련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분노를 참아 냈다.
여기서 소리를 질렀다간 뒤따르는 마차에까지 들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근거도 희박하고 가능성도 없는 일 때문에 소림까지 간다고요?”
“어차피 우리 조사단 자체가 별 가능성 없는 일이지 않소?”
다시 한번 당설련은 화를 참았다.
어쩌면 이 남자는 자신의 속을 긁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당설련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조사단이 아니라 당신의 조사단이에요. 이 조사단을 제안한 건 바로 당신이라고요.”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조차 너무나 얄미워 보여서 당설련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좋아요. 어차피 당신의 조사단이니 당신 마음대로 해요.”
작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당설련은 말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감출 수는 없을 거예요. 당신의 진의가 무엇이든 말예요.”
영호준은 그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따각, 따각.
말발굽 소리만 들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처음부터 소림으로 가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커요.”
당설련이 조용히 말했다.
“이 때문에 소림과 관계가 틀어진다면 당신이라도 감당하기 어려울 거예요.”
“당문의 눈꽃께서 나를 걱정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당신 때문이 아니니 착각하지 말아요. 나까지 말려들까 봐 하는 말이니까.”
날카롭게 쏘아붙인 당설련은 말을 이었다.
“중간에 몇몇 문파와 세가에 들러 괴서찰에 관한 일을 탐문하도록 해요. 그 후에 소림에 예를 표하기 위해 들렀다고 하면 최소한 명분은 될 거예요.”
즉 처음부터 소림에 찾아올 생각은 없었고 인근을 지나다가 인사차 들렀다는 의미다.
영호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리합시다. 소림에 예를 표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지만.”
“나도 그래요. 하지만 강호 무림에서 예의와 명분은 매우 중요하니까요.”
말하던 당설련은 피식 웃었다.
“정작 모든 일은 무력과 계략으로 해결하는 주제에 말이지요. 아주 웃기지도 않는 곳이에요.”
“……그렇게 강호 무림이 싫다면 떠나면 되지 않소?”
당설련은 무슨 소리냐는 듯 영호준을 쳐다보았다.
영호준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설련 소저와 함께라면 내 기꺼이 도사의 옷을 벗고 환속하겠소만.”
아름다운 당설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득.
“헛소리, 하지 마요.”
당설련은 이까지 갈며 말했다.
그러곤 아예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 예민한 반응에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다시 대화를 이어가기는 틀린 듯싶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의 성격으로 보건대 며칠간은 말도 안 할지 몰랐다.
따각, 따각.
다시 말발굽 소리만이 관도 위로 건조하게 울려 퍼졌다.
운현은 수행원들을 위한 마차에 타고 있었다.
그리 좋은 마차는 아니었지만 수행원들을 위한 마차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호위하는 기마 무사 또한 삼십여 명에 달해서, 무림맹의 위세를 여지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하긴 대표자가 두 명이나 있으니…….”
운현은 힐끗 시선을 앞 마차로 던졌다.
지붕이 없는 마차에 타고 있는 화산파의 매화검 영호준과, 당문의 당문설화 당설련이 보였다.
‘그런데 저들이 대단한 고수들이라고?’
선배 서기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히 천하를 아우르는 무림맹에서 각 문파의 입장을 대표하는 이들이 바로 무림맹 대표자들이다.
무공 실력은 물론이고 문파의 신뢰 또한 확고해서, 대표자들은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재목으로 서슴없이 손꼽히곤 했다.
실제 각 문파의 다음 가주나 장문인으로 기대되는 이들은 대부분 무림맹 대표자직을 거친 이들이었다.
그들이 고수가 아니라면 천하에 누가 고수라 불릴 수 있으랴?
‘하지만.’
그러나 운현은 쉽사리 납득할 수 없었다.
물론 저들의 실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검성이나 신승에 비하면 한참 부족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지.’
자신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건 생각도 하지 않고 운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갑자기 조사단이라.’
조사단에 참가하게 된 것은 사뭇 의외의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서기들 말에 의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했다.
경험이나 교육의 일환으로 신입 서기들을 여러 임무에 배정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뭘 조사한다는 건지 알려 주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가 운현은 같은 서기 편어두에게 핀잔을 들었다.
무림맹이 서기들에게 그런 걸 미리 말해 줄 것 같냐고 말이다.
조두식은 어차피 알게 될 거라며 걱정 말라고 했다.
모든 기록은 결국 서기가 담당하게 되니 말이다.
‘소림사로 간다는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혹시 신승이 또 무엇을 꾸미는 건 아닌가 싶어 의심스럽기는 했다.
하지만 소림사라면 운현 역시 꼭 한 번은 가고 싶은 곳이다.
‘강호 무림의 태산북두가 바로 소림이라 하지 않는가?’
천하의 모든 무공이 바로 소림에서 나왔다는 말도 들었다.
운현으로서는 사뭇 기대가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소림사의 힘을 볼 수 있을지도.’
평범한 참배객이 아니라 무림맹 대표자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일반인은 볼 수 없는 소림 무공의 저력을 견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운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따각, 따각.
신승의 충고에 따라 챙겨 둔 목검을 슬쩍 어루만진 후, 운현은 들고 있던 책에 시선을 내렸다.
그것은 ‘무림맹 서기의 책무’라는 제목의, 선배 서기가 저술한 지침서 같은 것이었다.
출발 전 조두식이 어디선가 구해 준 것인데 실전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알찬 충고가 가득했다.
서기로서 충실한 직무 수행을 위해 운현은 열심히 책을 읽었다.
그러나 아직 운현은 알지 못했다.
조금 전 영호준과 당설련이 결정한, ‘소림으로 가는 길에 탐문할 몇몇 문파’ 중에 모용세가가 끼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용세가는 소림의 앞마당 하남성에 자리한 가장 대표적인 문파이자, ‘괴서찰’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
“검성의 후계자는 소림으로 향했습니다.”
고개 숙인 수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커다란 체구의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궁세가는 장강 토벌에 가문의 역량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또한 문왕께서 이번 토벌에…….”
“나는.”
수하의 목소리를 끊으며 어둠 속에 앉은 사내가 말했다.
“소림으로 가겠다.”
“무제 님.”
무제 옆에 선 여인, 비련이 나지막이 말했다.
정중한 어조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한 올의 감정조차 실려 있지 않았다.
“문왕께서 이미 무제 님의 동행을 요청했습니다.”
“장강의 일은 문왕 혼자서도 충분하다.”
무제는 말했다.
하지만 긴 머리의 비련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허나 이 일은 상인께서 이미 명하신 일입니다.”
암천무제는 침묵했다.
잠시 말이 없던 그에게서 다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창룡검주에 대한 조사는 어찌 되었느냐?”
수하는 즉시 답했다.
“여전히 아무런 성과도 없습니다. 하지만…….”
잠시 끊어졌던 그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고독객 독고랑이 다시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무제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는 수년 전 안휘성에서 활동하던 인물입니다. 창룡검주로 추정되는 자의 서찰을 받은 후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알고 있다.”
수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가 산동성 태허문에 나타나 태허문 문주에게 결투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태허문의 문주는 고독객의 일 검조차 받아 내지 못했습니다. 그 직후, 고독객 독고랑이 절세 비급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무제의 눈빛은 담담했다.
강호 무림인이라면 누구라도 관심을 보일 ‘절세 비급’이라는 단어조차 그에겐 의미가 없는 듯했다.
“그 행보가 창룡검주의 뜻이라는 의미인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연관이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휘장 뒤의 무제는 잠시 침묵했다.
“알았다.”
묵직한 그 말에 수하는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기척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비련이 입을 열었다.
“무제 님.”
“네가 하려는 말은 알고 있다, 비련.”
슥.
어둠 속에 앉은 무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상인의 뜻을 받들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장강보다 창룡검주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강렬한 눈빛으로 무제가 말했다.
“천하의 흐름 앞에 개인은 무력하다. 그러나 때로는 단 한 사람이 그 천하의 흐름을 바꿔 버리기도 하는 법.”
우웅.
거대한 산과 같은 기운이 어두운 전각을 가득 채웠다.
사방의 휘장이 흔들리고 비련의 긴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단 한 사람의 힘이다. 상인께서도 이와 같지 아니하시냐?”
희미하게 웃으며 무제가 말했다.
“그분이 제일 경계하시는 상대는 무림맹도 황실도 아닌…….”
무제의 강렬한 눈빛과 비련의 감정 없는 눈동자가 마주쳤다.
“존재하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문서(文書)의 주인이니까.”
저벅.
무제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어두운 전각에서 걸어 나갔다.
홀로 남은 비련은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제가 제일 염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전각 어둠 속에서 비련이 나지막이 말했다.
“언제나 당신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련은 조용히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