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토벌
짜악.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궁상혁은 고개를 돌려 당혹한 눈빛으로 대사형을 바라보았다.
대사형이 자신의 뺨을 친 것이다.
“네가 감히 내 말을 거역하느냐!”
남궁현은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숙소로 돌아가 근신하도록 해라!”
그렇게 말한 남궁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황한 사제 남궁상혁의 눈빛을, 배신당한 것 같은 그 심정을 어찌 모르랴?
만일 상대가 다른 서기였다면, 아니 심지어 다른 세가의 무인이었더라면 남궁현 역시 사제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나빴다.
‘하필 검성의 후계자라니.’
서기 운현의 정체는 오직 대표자급 이상만 아는 기밀이다.
그러니 남궁상혁이 오늘 일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몇 년은 지나야 하리라.
그가 남궁세가의 중책에 앉을 수 있다면 말이다.
스륵.
대사형의 엄한 눈빛에 남궁상혁의 검이 힘없이 아래로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대사형 남궁현은 몸을 돌려 운현을 향했다.
그리고 남궁상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어리석은 사제가 무례를 끼쳐 죄송하오.”
남궁현이 운현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무림맹 대표자인 대사형 남궁현이 일개 서기에게 말이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오.”
남궁상혁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궁현에게는 당연한 사과였다.
상대는 검성의 후계자다.
한때 그에 대해 의혹의 시선이, 주로 당문을 중심으로 있기도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무림맹 내에서 검성의 후계자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닙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 역시 말이 과했습니다. 대협께 사과드립니다.”
예를 표하는 운현에게 남궁현은 짐짓 너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고맙소. 같은 무림맹 식구끼리 다퉈서야 좋을 게 어디 있겠소? 하하하.”
좋을 게 없다.
특히 검성의 후계자와 문제를 일으키는 건 무림맹 대표자들 누구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불가근 불가원.
가까이 하지도, 멀리할 수도 없는 신입 서기 운현은 어느새 움직이는 와룡헌이 되어 있었다.
아무도 건드리려 하지도 않고 건드릴 수도 없는 와룡헌 말이다.
“그렇지요. 좋을 게 없습니다.”
운현은 씁쓸한 웃음으로 말했다.
그렇게 작은 분란은 끝이 났다.
그날 이후 서기들 사이에서 남궁세가 대표자 남궁현의 대협다운 풍모가 회자되었지만, 그것도 그저 잠깐의 일이었다.
***
며칠 후, 무림맹 대표자 회의에서는 격론이 오가고 있었다.
“절대 불가하오!”
남궁세가의 대표자 남궁현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수채 토벌은 이미 의결된 일이오. 또한 이것은 전적으로 남궁세가의 행사이니 다른 문파의 개입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소!”
“허나 남궁세가의 일만은 아니지요.”
무당파의 청진 도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무당파는 남궁세가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무심파의 수채는 무당파의 영역 안에 있다.
남궁세가의 정예 백이십 명이 움직이는 무력행사를 무당파가 순순히 용납할 리가 없었다.
“죽은 제자들의 핏값을 받아 내는 일이오.”
남궁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 일에 대해 남궁세가는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겠소.”
쾅.
공손세가의 대표자 공손창이 탁자를 내리쳤다.
“그게 무슨 뜻이오?”
늘 남궁세가와 경쟁해 왔던 공손세가는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남궁세가가 무림맹을 나가겠다는 거요?”
남궁현은 대답 대신 공손창을 노려보았다.
공손창 역시 강렬한 눈빛으로 맞받았다.
“모두들 잠시 진정하시오.”
제갈세가의 제갈연이 중재를 시도했다.
“남궁세가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오. 허나 이 일은 무림맹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오. 이런 일이 있음에도 가만히 있는다면 어찌 무림맹이 강호를 위한다 말할 수 있겠소?”
“무림맹에서 무엇을 결의하건 남궁세가는 그 결의를 존중하겠소.”
남궁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허나 무심파의 토벌은 반드시 우리 남궁세가의 것이 되어야만 하오.”
제갈연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남궁현은 ‘무림맹의 결의가 무엇이건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은 타협과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무심파 토벌만 보장해 준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또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호암상단의 재원이 큰가 보군.’
복수심만으로 움직이기에 남궁세가는 너무 큰 조직이다.
남궁세가가 이리 나오는 것은 호암상단이 세간의 평보다 더 큰 자금원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협상의 뜻을 밝혔으니 타협할 시간이 필요하다.
공식적인 의사청이 아닌, 은밀한 거래가 오갈 시간이 말이다.
그때였다.
“배후를 조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제갈연은 고개를 들었다.
화산파 대표자 매화검 영호준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무심파의 배후에는 정체불명의 세력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전의 그 서찰 이야기도 있었고.”
“하지만 영호준 대협.”
청진 도사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소문일 뿐이오.”
“하지만 매화검께서는 그런 소문에 관심이 많으시답니다.”
당설련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창룡검주의 서찰이 무림맹 정식 안건이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던 분이니까요.”
그 말은 이번 일도 예전 안건처럼 의미가 없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영호준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아니지요. 황천대라는 어엿한 실체가 있지 않습니까?”
대표자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남궁세가 토벌대를 괴멸시킨 황천대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들 알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무림맹에서 이번 일을 좌시할 수 없는 이유기도 했다.
황천대가 보여 준 무력은 결코 수채 따위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찬성하오.”
남궁세가 대표자 남궁현이 말했다.
“남궁세가는 그 배후 조사에 적극 협조하겠소. 원한다면 토벌에 참관하는 것 역시 받아들이겠소. 허나 무심파를 치는 것만은 결코 양보할 수 없소.”
그 말에 제갈세가의 제갈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사에 협조하는 것이야 별것 아니라 해도 토벌에 참관하도록 하겠다는 건 대단한 양보가 아닐 수 없었다.
무림맹의 감시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이로써 명분도 확보할 수 있고.’
명분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엄청난 가치를 가진다.
이제 다른 문파들은 남궁세가에 결코 과한 요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남궁세가가 먼저 양보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제안을 포함하여…….”
“아, 그리고.”
영호준의 목소리가 또다시 제갈연의 말을 끊었다.
“다들 참관에만 관심이 있으신 것 같으니 아무래도 제가 조사단을 책임지게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 말은 너무 성급하지만 동시에 정확한 것이었다.
성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막연한 ‘배후 조사’보다는 남궁세가의 전력을 직접 지켜보는 것이 더욱 중요할 테니 말이다.
“조사단원 선발 정도는 제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요?”
제갈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매화검 영호준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그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정해 놓은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부족하다 보니 좀 똑똑한 사람을 데리고 가고 싶어서 말입니다.”
빙긋 웃으며 영호준은 말했다.
“이번에 수석 합격한 서기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제갈연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검성의 후계자를 데리고 가겠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아니면 무림맹에 홀로 두시겠습니까? ‘그’를?”
영호준의 말에 제갈연은 흠칫했다.
남궁세가의 전력을 확인하는 건 놓칠 수 없는 기회다.
당연히 모든 대표자들이 참가할 테고 텅 빈 무림맹에는 신승과 검성의 후계자만 남게 된다.
그래도 될까?
‘음.’
제갈연은 잠시 고민했다.
사실 지금까지는 이 문제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영호준의 말을 듣고 나니 어딘가 꺼림칙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가 토벌을 참관하게 할 것도 아닐 테고요.”
영호준의 말에 다른 대표자들 역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 검성의 후계자가 함께하는 건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할 일이었다.
매화검 영호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럼 제가 데려가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제갈연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다른 의견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살짝 한숨을 흘리는 제갈연의 말에 영호준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성급한 일이었다.
“저도.”
사락.
하얀 손이 오르며 여인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함께 가겠어요. 그 ‘괴서찰 배후 조사단’에 말예요.”
그녀는 바로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이었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영호준을 짐짓 모른 체하며 당설련은 말했다.
“괜찮겠지요?”
그녀의 말에 제갈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표자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제갈연처럼 당문의 진의가, 남궁세가의 전력 참관을 포기한 속셈이 의심스러운 듯했지만 이견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제갈연이 말했다.
당설련의 뜻 모를 미소와 영호준의 일그러진 표정과 함께 무림맹 대표자 회의는 잠시 휴식을 선언했다.
***
따그닥, 따그닥.
“하아.”
마차 말발굽 소리에 섞여 아름다운 여인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매화검 영호준은 지나는 풍경을 내다보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 여인이 아름답고 매력적이라 해도 그녀는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관심 끌기를 포기한 당설련은 먼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거죠?”
그녀의 뾰족한 목소리에 영호준이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응? 뭐가 말이오?”
그 의아한 표정에 당설련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딴청을 피울 건가요?”
“아, 미안하오. 풍광이 너무 좋아서 잠시 넋을 잃고 있었소.”
“이런 평범한 관도가 말인가요?”
그녀의 반문은 당연했다.
그들이 탄 마차는 제법 멋진 것이었지만 지나는 풍경은 그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모름지기 여행은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기 마련이라오.”
매화검 영호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당설련의 싸늘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오만.”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우리 조사단에 누가 대단한 결과를 기대하겠소? 그러니 오랜만에 여유를 만끽하다 해도 그리 큰 잘못은 아닐 테지.”
“바로 그거예요.”
“바로 그거?”
반문하는 영호준에게 당설련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림맹 십팔 대 문파들이 하나같이 남궁세가 참관에 열을 올리는 이때에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름뿐인 조사단을 맡고 나선 거죠? 그리고…….”
당설련은 힐끗 시선을 뒤로 돌렸다.
조금 뒤편, 수행원들이 타고 있는 덮개 없는 마차에 운현의 모습이 보였다.
운현은 무슨 일이 그리 바쁜지 마차 위에서도 책을 들고 열심히 읽는 중이었다.
천으로 둘둘 감은 목검 한 자루를 옆에 세워 놓고 말이다.
“왜 구태여 그를 동행시키려고 한 거죠?”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그러는 당문의 눈꽃께서는 어찌 이 이름뿐인 조사단에 참가하신 거요? 장강에서의 일도 바쁜 와중에.”
“흥.”
당문설화 당설련은 코웃음을 날렸다.
“뭔가 있다고 우르르 몰려가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전적으로 동감이오.”
영호준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를 흘리며 칼부림 하는 곳에 무슨 재미가 있겠소? 그런 모습을 볼 바에는 차라리.”
매화검 영호준은 슬쩍 뒤로 시선을 던졌다.
“이쪽이 더 재미있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