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천박(淺薄)
남궁세가 일행을 위한 숙소는 지객당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금방 숙소에 도착했다.
그동안 남궁상혁은 의외로 운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곳입니다.”
운현이 정중하게 말했다.
남궁상혁은 뒷짐을 지고 숙소를 쳐다보았다.
“그럼 저는 이만…….”
운현이 돌아서려 하는 그때였다.
“아, 참.”
남궁상혁이 운현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 짐을 지객당에 놓고 왔군. 가져다주겠나?”
“짐이라면 일하는 이들이 곧…….”
“이봐.”
남궁상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운현의 말을 끊었다.
“내가 가져오라고 말하지 않나?”
운현은 남궁상혁을 바라보았다.
그가 지금 의도적인 심통을 부리고 있다는 것은 뻔했다.
그러나 운현은 화가 나기보다는 유치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무공이 깊어진다고 인격이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로군.’
어쩌면 당연한 말이었다.
강호 무림에는 정도를 걷는 고수도 있지만 패도를 추구하는 고수도 많다.
심지어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성격을 가진 사람도, 잔학한 성품을 가진 이들도 있다.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인 철혈사왕 염중부가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알겠습니다.”
할 말은 많았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저벅.
운현은 몸을 돌려 지객당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궁상혁의 눈동자엔 조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운현은 금방 돌아왔다.
어차피 숙소에서 지객당이 그리 멀지도 않았고, 짐도 별것 없었기 때문이다.
“가져왔습니다.”
다시 나타난 운현 뒤에는 변기량이 딸려 있었다.
아무래도 불안한 그가 운현을 쫓아온 것이다.
마침 관지부도 돌아왔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럼 저는 이만…….”
운현이 막 짐을 내려놓았을 때였다.
“대사형을 뵈어야겠다.”
남궁상혁이 말했다.
“안내해라.”
운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말하는 대사형은 곧 남궁세가의 무림맹 대표자 남궁현이다.
어차피 지객당에서 기다리면 되었을 것인데 이제 와서 그를 만나겠다고 하는 것이다.
“남궁현 대협께서는 이미 집무실 쪽으로 가셨습니다.”
변기량이 얼른 말했다.
“그래? 그러면 집무실로 가야겠군.”
당연하다는 듯 남궁상혁은 운현에게 말했다.
“안내하도록.”
“저기, 안내는 제가…….”
변기량이 다시 말하려 했지만 남궁상혁이 노려보자 움찔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하지요.”
운현이 변기량에게 말했다.
비록 안 지 얼마 안 되었다지만 변기량은 같이 일하는 동료이자 운현을 잘 따르는, 마치 동생 같은 사람이다.
그런 변기량이 움찔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 울컥하는 것이 올라온다.
차라리 자신이 잠시간의 모욕을 감수하는 편이 낫다.
“그래야지.”
남궁상혁은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남궁상혁이 말했다.
“대형께 드릴 것이 저 짐 안에 있으니 들고 와라.”
당연하다는 듯 남궁상혁은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요.”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남궁상혁의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슥.
운현은 얼마 안 되는 남궁상혁의 짐을 들고 집무실로 향했다.
남궁상혁은 일부러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고, 변기량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아이고, 이러다가…….’
변기량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운현도 남궁상혁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변기량의 눈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처럼 보였다.
***
남궁세가 대표자 남궁현의 집무실은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남궁상혁을 안내하던 운현은 때마침 오전 근무를 마치고 식당으로 향하던 서기들과 지나쳤다.
안수재와 조두식, 편어두 역시 그 무리 중에 있었다.
운현은 그들과 서로 눈인사를 나눴다.
그러느라 운현의 발걸음이 잠시 늦춰지던 때였다.
슥.
갑자기 발밑으로 무엇인가 들어오는 것을 운현은 느꼈다.
‘엇.’
그 무엇인가를 피하기 위해 운현은 급히 몸을 틀었다.
그 탓에 몸의 균형이 무너졌지만, 그 순간 운현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운현의 걸음을 가로막은 것은 바로 칼집의 끝 부분이었다.
남궁상혁이 운현의 발 앞에 칼집을 들이민 것이다.
탁.
재빠른 반응 덕에 운현은 칼집에 부딪히는 일도, 짐을 떨어뜨리거나 넘어지는 것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칫 넘어졌다면 다른 서기들이 보는 앞에서 땅에 나뒹굴 뻔했기 때문이다.
다른 서기들 역시 깜짝 놀란 듯 멈춰 서서 운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왜?”
가까이 선 남궁상혁은 조소를 지으며 운현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남궁상혁의 표정은 사뭇 음흉하면서도 능청스러웠다.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남궁상혁은 오히려 조소를 던지며 말했다.
“운이 좋았군.”
그 말은 진심이었다.
다른 서기들이 보는 앞에 땅에 나뒹구는 망신을 피했으니 말이다.
만일 운현이 칼집을 걷어차거나 건드렸으면 일은 더 커졌을 것이다.
감히 무인의 검을 발로 차 모욕했으니 당장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다.
방금 그 한순간 운현이 망신도, 죽음도 피했으니 운이 좋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주, 운이 좋아.”
그렇게 말하는 남궁상혁의 눈동자에 살기가 번들거리는 것을 운현은 똑똑히 보았다.
남궁상혁은 운현을 죽이겠다던 그날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그 노골적인 악의에 운현이 이를 악물던 때였다.
“제가 들겠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변기량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건 남궁상혁이 바라던 바가 결코 아니었다.
“네 이놈! 감히 어디서 함부로……!”
남궁상혁이 외쳤지만 변기량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운현과 남궁상혁 사이로 끼어들며 운현이 들고 있는 짐을 쥐려 했다.
“네놈이!”
남궁상혁은 노를 발하며 변기량을 향해 손을 뻗었다.
주저없이 변기량의 목을 향해 날아가는 그 손에 실린 기세를 운현은 똑똑히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들끓던 남궁상혁의 분노가 갑자기 끼어드는 변기량을 향해 쏟아진 것이다.
쉭.
기세가 실린 남궁상혁의 손은 변기량의 급소를 향해 인정사정없이 짓쳐들었다.
그러나 변기량은 피하지도, 아니 남궁상혁의 공격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변기량이 크게 다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그 때였다.
운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그러나 어느새 자신의 무검을 쥐고 있는 그 손을.
쉬릭.
‘흥.’
남궁상혁 역시 그것을 보았다.
그러나 남궁상혁은 조소했다.
서기의 맨손 따위, 무공을 수련한 자신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운현의 손은 아랑곳없이 남궁상혁은 변기량을 쳐 내려 했다.
아니, 오히려 이것을 빌미로 운현에게도 손을 쓸 작정이었다.
그런데 운현의 텅 빈 손이 한순간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자신의 손을 막아섰다.
탁.
맨손과 맨손이 부딪혔다.
그런데 순간 육중한 충격이 남궁상혁을 울렸다.
쿵.
‘컥.’
그 결과는 놀라웠다.
턱, 턱.
남궁상혁의 손이 꼴사납게 위로 치솟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남궁상혁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온몸을 뒤흔든 충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운현의 맨손과 부딪힌 결과로 말이다.
‘이, 이게 무슨…….’
남궁상혁이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이게 무슨 짓이오!”
분노한 운현의 목소리가 남궁상혁의 귀를 때렸다.
쓰러진 변기량을 뒤로하고 일어선 운현이 남궁상혁을 향해 분노하고 있었다.
“무고한 사람에게 다짜고짜 그런 지독한 수를 쓰다니, 이러고도 당신이 무인이란 말이오?”
운현의 분노는 당연했다.
그대로 놔뒀다면 변기량이 크게 다쳤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서기들의 시선이 일제히 남궁상혁에게 향하고 남궁상혁은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곧 분노로 변했다.
“뭐라고?”
으득.
남궁상혁은 이를 갈았다.
“네가 지금 뭐라고 했느냐?”
“참으로 천박하오.”
운현은 남궁상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도 당신이 명문 세가의 제자를 자처한단 말이오?”
스릉.
남궁상혁의 손에서 시퍼런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남궁상혁이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해 봐라.”
남궁상혁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지켜보던 서기들도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내가, 어떻다고?”
사람들 앞에서 남궁세가의 제자를 감히 천박하다고 말했다.
남궁상혁에게 그것은 곧 가문에 대한 모독과 다름없었고, 지금 이 자리에서 목을 쳐도 부족할 대죄였다.
그러나 운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검은 휘두를 줄 알면서도 그 생각이 깊지 못하니 얕다[淺, 천]고 하였고.”
시퍼런 칼날 앞에서도 운현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명문 세가의 자제이나 그 언행이 진중하지 못하니 또한 얇다[薄, 박]고 하였소.”
남궁상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은 말했다.
“돌이켜 자신을 성찰할 줄은 모르고 힘과 지위에 취해 다른 사람을 우습게 여기니, 이 어찌 소인배의 행동이 아니란 말이오?”
분노한 사람은 남궁상혁만이 아니었다.
운현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분노하고 있었다.
“당신은!”
단호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스스로 무인이라 할 자격이 없소.”
“헉.”
서기들 중 누군가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하고 남궁상혁의 눈에서도 불꽃이 튀었다.
“오냐.”
으드득.
남궁상혁이 이를 갈았다.
“그럼 그 소인배의 검에 한번 죽어 봐라.”
저벅.
검을 쥔 남궁상혁이 운현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거나 제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남궁세가의 제자가 진심으로 뿜어내는 살기가 모두를 옴짝달싹 못 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슥.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이 위로 솟았다.
“운 형!”
안수재와 조두식의 외침과 동시에 칼날이 운현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쉬익.
그 순간 사람들은 눈앞에 참극이 벌어질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운현은 그렇지 않았다.
슥.
운현은 가볍게 고개를 젖히며 옆으로 움직였다.
성급했던 남궁상혁의 검은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그것이 남궁상혁의 분노를 더욱 부추겼다.
“네놈이 감히!”
남궁상혁은 검을 돌이키며 자세를 잡았다.
이제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운현의 가슴에 검이 박히게 될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멈춰라!”
한 줄기 강렬한 외침이 남궁상혁의 움직임을 막았다.
그리고 누군가 옆에 날아 내려왔다.
휘리릭, 탁.
“대, 대사형.”
남궁상혁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나타난 사람은 남궁세가의 대표자 남궁현이었다.
그는 즉시 남궁상혁에게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어서 검을 거둬라!”
그러나 남궁상혁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대사형! 이자가 지금…….”
남궁상혁은 대사형에게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설명은 이어지지 못했다.
“여기는 무림맹이다!”
남궁현이 큰 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네가 함부로 검을 휘두르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남궁상혁이 조금 똑똑했다면 대사형의 말이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남궁상혁은 그 말이 그저 답답하게만 들렸다.
“그게 아닙니다, 대사형! 지금 이자가 감히 남궁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