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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20화 (120/530)

120화. 불쾌한 재회

쾅.

남궁진천이 다시 한번 탁자를 내리쳤다.

의사청에 앉은 사람들의 눈에도 참담함이 어렸다.

정사대전이 끝난 이래 남궁세가의 제자가 바깥에서 죽임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오늘 일어난 것이다.

으드득.

“흉수가 누구냐?”

가주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

외청 총관은 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토벌대를 기습한 자들은 삼십여 명의 무사들이었습니다. 수적들은 그들을 황천대라 불렀으며 무공 수준이 본가의 일대제자에 필적했다고 합니다.”

의사청에 일제히 웅성거림이 퍼져 갔다.

남궁세가의 일대제자는 강호 무림에선 사실상 최고 수준이다.

물론 절정 고수로 꼽힐 정도는 아니지만 각 파의 문주나 장로급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경시하지 못한다.

이번에 토벌대를 이끌었던 남궁관이 바로 일대제자였다.

그런 자들이 삼십 명이나 있었다면 토벌대가 괴멸당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게 사실인가? 정말로 일대제자에 필적했다고?”

누군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외청 총관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현장에 있던 본가 이대제자의 증언입니다. 토벌대가 입은 피해를 생각하면 그 정도 수준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의사청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 나지막이 말했다.

“배후가 있겠군요.”

그건 모두가 생각하던 것이었다.

수채 따위가 남궁세가의 토벌대를 괴멸시키고 일대제자를 죽일 수는 없다.

문제는 과연 그 배후가 어딘가 하는 것이다.

“가주님.”

내청 청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는 자칫 강호 무림 전체에 심각한 파장을 몰고 올 문제입니다. 깊이 숙고하시고 움직이셔야 합니다.”

남궁세가의 제자들을 죽일 만한 무력을 갖춘 배후라면 사실상 무림맹 십팔 대 문파 외에는 없다.

자칫하면 무림맹 내부에서 문파 간의 전면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내청 청주가 신중할 것을 요청한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가주인 뇌검 남궁진천에게는 아니었다.

“세가의 제자들이 죽었다.”

남궁진천은 분노한 눈으로 말했다.

“그런데 지금 나더러 참고 있으라는 말인가?”

“허나 가주…….”

“남궁세가는 검왕가다!”

남궁진천은 내청 청주의 말을 듣지 않았다.

“태산이 가로막는다면 태산을 베고, 바다가 앞길을 막는다면 그 바다를 가르는 것이 바로 남궁세가의 검이다! 그런데 그 남궁세가의 어른들이라는 자들이 이렇게 앉아서 입으로만 떠들고 있단 말인가!”

의사청에 있는 누구도 남궁진천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남궁진천은 그런 그들을 노려보며 단언했다.

“배후가 누구건 나는 남궁세가의 핏값을 반드시 받아 내고 말겠다! 외청 청주!”

큰 체구의 외청 청주 남궁벽이 고개를 숙였다.

“토벌대를 준비하라! 규모는 이전과 똑같이 하되, 이번에는 오직 세가의 제자들로만 구성하겠다!”

사람들의 눈에 놀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백이십여 명의 토벌대를 세가의 제자들로만 구성한다는 것은 이번 일에 남궁세가가 전력을 다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이번 일에 대한 뇌검 남궁진천의 마음이 남다르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코 가볍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가주님, 그렇게 많은 제자들이 움직이면 당장 공손세가와 무당파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수채를 상대로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세가의 위신에도 문제가…….”

“세가의 위신이라 했는가?”

남궁진천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자들이 죽었는데 세가의 위신이라고? 위신이라면 이미 땅에 떨어지지 않았는가!”

콰당.

자리에서 떨쳐 일어난 남궁진천은 크게 외쳤다.

“나 뇌검 남궁진천, 흉수들의 피로 형제들의 원혼을 달래기 전에는 결단코 쉬지 않을 것이다!”

두 눈에서 시퍼런 살기를 뿜어내며 뇌검 남궁진천은 말했다.

의사청에 있던 모든 이들은 가주가 결코 뜻을 돌이키지 않을 것을 알았다.

슥.

한 사람, 두 사람, 의사청에 있던 이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가주에게 예를 표하며 일제히 말했다.

“가주의 뜻을 받듭니다.”

뇌검 남궁진천은 번뜩이는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분노에 찬 뇌검 남궁진천의 기세가 남궁세가의 의사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장강의 소식은 항주 무림맹에도 어김없이 전해졌다.

사람들은 장강의 이변에 놀라고 수군거렸다.

앞으로 남궁세가가 어찌 나올지에 대해 서로 논쟁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장강의 일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그저 놀라운 소식 중 하나에 불과했다.

특히 정신없이 바쁜 신입 서기들에겐 더더욱 그랬다.

“안녕하십니까.”

이른 아침, 지객당에 들어선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먼저 와 있던 관지부와 변기량이 운현의 인사에 답했다.

“나오……셨소?”

“아, 나오셨습니까?”

반 존대와 경어의 두 가지 인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앞서는 관지부의 것이고 뒤는 변기량의 것이었다.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관지부와 변기량도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어색한 인사를 몇 번 주고받고서, 운현은 자신의 자리로 갔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힐끗 관지부와 변기량을 쳐다보고 나서 운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운현이 무림맹에서 정식으로 배속된 곳은 바로 이곳 지객당이었다.

출근 첫날, 과거의 경험을 떠올린 운현은 제법 일찍 출근했다.

이번엔 늦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현은 훨씬 일찍 나와 있던 관지부와 변기량을 만났다.

다음 날, 운현은 더욱 서둘렀고 관지부와 변기량은 더 일찍 나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며 점점 앞당겨지던 출근 시간은, 결국 운현이 포기함으로서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대로라면 수련까지 포기하고 나와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수련을 포기할 순 없으니.’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출근 첫날, 관지부와 변기량은 운현을 대단히 공손하게, 마치 윗사람처럼 대했다.

운현이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관지부도 변기량도 듣지 않았다.

특히 변기량은 ‘그저 조금 먼저 들어왔다고 어찌 윗사람을 자처하겠느냐?’며 운현에게 존칭을 사용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직책상 변기량과 운현은 대등하다고 하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결국 관지부는 반존대의 어투로, 변기량은 서로 존대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팔락.

자리에 앉은 운현은 지객당 일지를 펴 들었다.

‘오늘 올 사람은……, 남궁세가에서만 다섯 명이군.’

지객당의 업무는 무림맹을 방문하는 이들을 맞이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최근 장강에서 일어난 일 탓인지, 남궁세가는 자주 무림맹을 방문했다.

다른 문파들과 협의하고 조율할 일이 한둘이 아닌 탓이다.

‘남궁세가라…….’

운현은 문득 용봉지회에서 남해검문의 파진한과 겨루었던 상대, 남궁세가의 남궁비연이 생각났다.

그녀의 유연하면서도 날카로운 검로는 운현에게도 사뭇 좋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되지도 않았군.’

따져보면 용봉지회로부터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때가 아주 옛날 일처럼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크게 변했다는 뜻이리라.

게다가 정작 무림맹 서기가 되고 나니 자유롭던 그때가 문득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사실 당시에는 관직을 그만둔 것과 앞날의 불안감으로 인해 꽤나 힘들었는데도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탁.

지객당 일지를 덮으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무림맹에 도착한 것은 점심 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세가의 위상을 보여 주듯 그들은 크고 화려한 마차를 타고 무림맹 정문에 당당히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관지부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았다.

복장이며 태도가 귀한 손님을 맞이한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남궁세가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관지부를 따라 지객당으로 들어섰다.

“이곳이 지객당입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제가 곧 남궁현 대협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남궁세가 사람들을 먼저 맞이할 사람은 당연히 남궁세가의 대표자 남궁현이다.

관지부가 자리를 뜨고, 남궁세가 사람들은 준비된 차를 마시며 여행의 피로를 달랬다.

바로 그때였다.

“아니, 이게 누구시더라?”

앉아 있던 남궁세가의 청년이 운현을 향해 말했다.

자기 자리에 앉아 있던 운현이 고개를 드는데 청년의 말이 이어졌다.

“기개 높은 문사께서 여기 계실 줄은 몰랐군그래.”

그건 분명 조롱이었다.

그리고 운현은 남궁세가의 청년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지난 용봉지회 때 남궁세가의 후기지수로 참가했던 남궁상혁이었다.

남해검문의 파진한이 비무에서 이기자 암수라며 억지를 부렸고, 이를 꾸짖는 운현과 크게 감정이 상했던 바로 그 남궁상혁 말이다.

“이거 아주 반가운데? 하하하하.”

그렇게 말하는 남궁상혁의 눈동자엔 그날 보였던 적의가 노골적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사제, 아는 사람인가?”

남궁세가의 일행 중 한 사람이 남궁상혁에게 물었다.

“지난 용봉지회에 왔을 때 만난 사람입니다, 사형.”

“그런가?”

남궁상혁의 말에 그는 운현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객당을 책임지는 변기량조차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데 운현 같은 서기에게 관심을 둘 리가 없다.

하지만 남궁상혁은 조소를 띄운 채 말을 이었다.

“흐음, 무림맹 서기라……. 좋은 선택이군.”

운현을 위아래로 쳐다보던 남궁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많이 읽은 문사답게 참으로 교활한 선택이야. 어쨌거나 잘됐군. 이제 내 손에 죽는 일은 피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하하.”

그는 운현에게 ‘남궁세가의 땅을 밟는 날이 네 제삿날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때 운현은 ‘자부심도 없는 자의 검은 하나도 두렵지 않다’고 대꾸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운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궁상혁은 집요했다.

“그러고 보니 그 도도하시던 북해의 소궁주께서는 어디 가셨나?”

남궁상혁은 짐짓 누군가를 찾는 듯 좌우를 돌아보더니 운현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감싸주던 치마폭을 잃었으니 빨리 누구라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하하하.”

그는 사뭇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아마도 운현을 대놓고 조롱하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리라.

그러나 운현은 남궁상혁의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저런 사람은 상대하는 것 자체가 혐오스러운 일이다.

정작 사색이 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바로 변기량이었다.

“아, 저기…….”

변기량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운현과 남궁상혁을 번갈아 보았다.

“그만하게, 사제.”

때마침 남궁세가의 사람 한 명이 남궁상혁을 제지했다.

“우리는 놀러 온 것이 아니야.”

남궁상혁의 표정이 즉시 굳었다.

“알겠습니다, 사형.”

사형의 한마디에 남궁상혁은 입을 다물었다.

변기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건 길지 못했다.

“이봐.”

남궁상혁이 운현에게 말했다.

“숙소는 준비되어 있나?”

변기량이 즉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원하시면 어느 때건…….”

“안내해라.”

덜컹.

남궁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사형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남궁상혁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몸이 좀 불편해서 그럽니다. 대사형께는 제가 따로 인사드리지요.”

남궁상혁은 일행을 이끄는 중년의 무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괜찮지요? 숙부님.”

숙부라 불린 중년의 무인은 힐끔 남궁상혁을 보더니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알아서 해라.”

“감사합니다.”

남궁상혁은 빙긋 웃었다.

사형의 찌푸린 인상도 아랑곳없이 그는 운현을 향해 걸어왔다.

“뭐 하나? 안내하라니까.”

지켜보던 그의 사형이 한숨을 쉬었다.

남궁상혁이 운현에게 무언가 맺힌 것이 있음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무림맹이다.

평소 남궁상혁이 하듯 함부로 행동해선 안 된다.

“사제. 여기는…….”

“걱정 마십시오, 사형.”

남궁상혁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서기를 상대로 제가 검이라도 뽑을 것 같습니까?”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며 남궁상혁은 씨익 웃었다.

“이런 약골 따위, 툭 치기만 해도 피를 토하고 죽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사형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남궁상혁은 물러설 줄을 모르고, 책임자이자 가장 어른인 중년 무인은 여전히 잠자코 있다.

그러니 그로서도 더 이상 무어라 할 수가 없었다.

“대협, 숙소는 제가 안내를…….”

변기량이 나섰다. 그러나 남궁상혁은 안색을 굳혔다.

“나는 이자에게 안내하라고 했다. 감히 내 말을 무시하겠다는 것이냐?”

변기량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남궁상혁의 기세는 평범한 그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덜컹.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안내하지요.”

남궁상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이 말했다.

득의의 미소가 남궁상혁의 입가에 번져 갔지만 운현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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