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황천대
남궁관과 맞선 장삼채는 연신 후퇴를 외치며 뒤로 물러섰다.
당연히 남궁관은 그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놈! 어딜…….”
피피핑.
화살이 날아오고 남궁관은 즉시 검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섰다.
피해는 전혀 없었지만 덕분에 장삼채는 몸을 뺄 시간을 벌었다.
탁.
장삼채와 수적들은 미리 수풀 속에 숨겨 둔 말에 올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뒤쳐졌던 백이십여 토벌대도 그제야 길목으로 들어섰다.
“멈추지 마라! 저놈들을 잡아라!”
남궁관의 명에 따라 토벌대는 그대로 수적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몇 수하들은 말을 멈춰 남궁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다.”
저벅.
남궁관은 쓰러진 남궁상민에게 다가갔다.
토벌대 중에 의술을 아는 무사가 상처를 돌보고 있었지만 상태는 제법 엄중했다.
무엇보다 피를 많이 흘린 것이 컸다.
“사제.”
몸을 낮춘 남궁관의 말에 쓰러져 있던 남궁상민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추한 꼴을…… 보여 드렸습니다.”
남궁관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엄한 사형이라 해도 사제의 이런 모습에 누가 분노하지 않을까?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만 상처가 깊어 즉시 치료해야 합니다.”
남궁상민을 돌보던 무사가 말했다.
“다친 자들을 가까운 마을로 옮겨라.”
남궁관은 굳은 표정으로 일어서며 말했다.
으드득.
이를 갈며 남궁관은 말했다.
“감히 남궁세가에 대적한 그 쓰레기 같은 것들을 반드시 잡아 죽이고야 말겠다.”
남궁세가의 이번 토벌대에 세가의 정예는 스물다섯뿐이다.
백이십여 토벌대의 대부분은 남궁세가와 협력 관계, 사실상 상하 관계에 있는 협력 문파들의 무사들이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남궁세가의 제자가 수적의 칼에 상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결코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제 이 토벌은 압도적으로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 된 것이다.
“이랴!”
말에 오른 남궁관은 즉시 말을 몰았다.
사제의 부상에 분노한 남궁세가의 제자들 역시 이를 갈며 남궁관의 뒤를 따랐다.
따가닥, 따가닥.
분노한 남궁세가의 토벌대는 수적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좁은 계곡 길 좌우에서 쏟아져 나온 이백여 명의 수적들이었다.
바로 무심파의 매복 기습이었다.
카앙, 캉.
“크아아악!”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칼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가 계곡을 가득 메웠다.
좁은 계곡은 벌써 피로 물들다시피 했지만, 악귀 같은 형상이 된 무사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쉬익.
“컥!”
남궁관의 검이 흰빛을 뿌리자 또 한 명의 수적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네깟 놈들이 감히!”
남궁관은 분노한 얼굴로 피에 젖은 검을 들어 올렸다.
처음엔 수적들의 기습이 대단히 성공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남궁세가의 정예는 결코 수적 따위가 당해 낼 상대가 아니다.
협력 문파의 무사들 역시 수적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여서, 초반에 승기를 잡은 듯하던 수적들은 어느새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두 배에 가깝던 수적 우세도 이제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더 몰아붙여라!”
남궁관이 크게 소리쳤다.
수적들의 매복 기습은 기발한 책략이었지만 이기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남궁세가에는 까다로운 물 위의 싸움보다 나으니, 이번 싸움으로 사실상 토벌이 끝날 수도 있었다.
숫자로 보아 이들이 무심파의 전력 전부일 테니 말이다.
핑, 피핑.
간간이 토벌대를 향해 수적들이 화살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혼전 상태에서 화살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다.
“내 오늘 너희들의 씨를 말리리라.”
남궁관이 이를 갈며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쌔애액.
범상치 않은 기세를 담은 화살이 남궁관을 향해 날아왔다.
“어디서 감히!”
남궁관은 검을 휘둘러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화살을 쳐 냈다.
카앙.
예상외의 타격음에 남궁관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화살에는 만만치 않은 내력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슥.
남궁관은 고개를 들어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살폈다.
‘……좋지 않군.’
남궁관이 그렇게 생각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밀려나고 있는 수적들 사이로 새롭게 나타난 한 무리의 무사들이 서 있었다.
저벅.
그들의 숫자는 서른 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짙은 황색 무복을 차려입고 손목에 긴 황색 띠를 맨 모습은 한눈에도 사뭇 범상치 않았다.
펄럭.
손목에 황색 띠를 펄럭이던 무사 한 명이 천천히 활을 내렸다.
그가 조금 전 남궁관을 향해 화살을 날렸던 것이다.
남궁세가의 백이십여 토벌대 앞에서도 그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있었다.
“황천대다!”
“황천대가 왔다!”
몰리고 있던 수적들도 황색 무복의 무사들을 발견했다.
일방적으로 몰리던 수적들은 그들을 ‘황천대’라 부르며 한호하고 기뻐했다.
하지만 곧 실망 섞인 목소리도 새어나왔다.
“뭐야? 겨우 저거야?”
삼십여 명에 불과한 그들의 숫자는 확실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남궁관은 그들이 충분히 위협적임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슥.
남궁관이 신호를 보내자 남궁세가의 토벌대는 뒤로 물러서며 전열을 정비했다.
목숨을 구한 수적들 역시 멀찍이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덕분에 남궁세가의 백이십여 토벌대와 황천대 삼십 인의 무사들이 맞서고, 그 주위에서 수적들이 지켜보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남궁관은 ‘황천대’라 불리는 무사들을 향해 외쳤다.
“너희는 누구냐!”
내력을 실은 남궁관의 목소리는 계곡을 쩌렁쩌렁 울렸다.
“무슨 연유로 남궁세가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냐!”
그러나 황천대라 불린 황색 무복의 무사들은 대답은커녕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너희가 감히 남궁세가를…….”
바로 그때였다.
“말이 많아지는 것을 보니.”
황천대의 선두에 선 황색 무복의 무사가 말했다.
그리 크지 않은 그의 목소리는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겁을 먹은 모양이로군.”
남궁관의 얼굴이 굳었다.
침묵하던 수적들 사이에서도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슥.
남궁관은 검을 들어 황색 무복의 사내를 향했다.
“이 무례는.”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고 남궁관은 분노로 이를 갈며 말했다.
“너희의 목숨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그 목소리는 지켜보던 수적들마저 침을 꿀꺽 삼킬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황색 무복의 ‘황천대’들에겐 아니었다.
“할 수 있으면.”
선두의 무사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해 보시든가.”
으득.
남궁관은 이를 갈았다.
사뭇 천박한 상대의 대답은 분명 남궁관의 노를 격동시키려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남궁관은 이미 그 어느 때보다 분노하고 있었으니까.
슥.
날카로운 남궁관의 검이 하늘로 솟았다.
남궁관은 크게 외쳤다.
“쳐라!”
“와아아아아!”
두두두두.
백이십여 토벌대가 삼십여 황천대를 향해 짓쳐 들었다.
건장한 말들이 내달리고 무사들의 칼날이 햇빛에 번득였다.
“하아!”
남궁관 역시 황천대를 향해 말을 몰았다.
그의 목표는 제일 앞에 서 있던 바로 그 무사였다.
그러나 남궁관을 쳐다보는 그 사내의 입가에는 비릿한 조소가 걸리고 있었다.
***
“장강의 일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빙혼의 나직한 목소리에 소궁주는 눈을 떴다.
의자에 기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빙혼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되었지요?”
“남궁세가의 토벌대는 괴멸했습니다.”
소궁주의 아름다운 눈썹이 움찔 경련했다.
“토벌대를 이끌던 남궁관은 사망했으며, 백이십 명의 토벌대 대부분이 죽거나 크게 다쳤습니다.”
빙혼은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남궁세가의 토벌은 실패입니다.”
“무심파에 그런 힘이 있을 리 없으니 분명 도움이 있었겠군요.”
소궁주의 말은 옳았다.
“남궁세가 토벌대를 괴멸시킨 것은 황천대입니다.”
찻잔을 향해 손을 뻗던 소궁주의 하얀 손가락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달그락.
찻잔을 들어 올리며 소궁주는 나지막이 말했다.
“황천대라……. 규모는요?”
“황천대 삼십 인이 이번 싸움에서 무심파를 도왔습니다.”
“놀랍군요. 벌써 황천대가 모습을 드러내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잠시 차향을 음미하던 소궁주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무제의 뜻은 아닐 듯하니 아마도 문왕의 짓일까요?”
잠시 생각하던 소궁주는 빙혼에게 명했다.
“확인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빙혼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명을 받들었다.
“무림맹은 어떻지요?”
소궁주의 물음에 빙혼은 즉시 답했다.
“지부 확장에 힘을 쏟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철혈사왕 염중부의 방문 외에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는?”
소궁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하지만 빙혼의 눈빛은 살짝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묵묵히 차를 준비하는 빙설의 눈빛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한 움직임은 전혀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소궁주도, 빙혼도, 그리고 빙설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가요.”
소궁주의 붉은 입술이 찻잔에 닿았다.
잠시 침묵하던 빙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궁세가를 감시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필요 없어요.”
조금도 주저 없이 소궁주는 말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그’의 의중입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소궁주는 가늘게 미소 지었다.
“낙일의 새로운 주인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뀌게 될 테니까요.”
소궁주의 매력적인 눈동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
남궁세가는 안휘성의 대도시 합비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림맹 십팔 대 문파이자 오대 세가로 꼽히는 남궁세가의 영향력은 이미 안휘성을 넘어 장강 일대를 아울렀다.
비록 이웃한 강서성의 공손세가와 신경전을 벌이고는 있었지만, 장강의 교역에서 남궁세가는 결코 빠질 수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 명성과 부를 말해 주듯 남궁세가에는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장강에서 날아든 비보는 남궁세가를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무엇이라고?”
남궁세가의 가주, 뇌검 남궁진천의 분노한 목소리가 의사청을 쩌렁쩌렁 울렸다.
쾅.
고풍스러운 탁자가 그의 손 아래서 소리를 냈지만 의사청에 앉은 십여 명의 사람들은 한마디도 못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토벌대가 괴멸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더냐!”
남궁진천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남궁세가의 외청 총관은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그 역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몇 번이나 확인했어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자세히 고하라!”
가주의 분노한 목소리에 외청 총관은 말을 계속했다.
“세가의 제자 스물다섯 중 여덟 명이 죽고 열넷이 크게 다쳤으며 셋이 가벼운 부상을 입었습니다. 토벌대 전체로는 사망이 서른 넷, 중상이 일흔 넷, 그리고 무사히 생환한 자가 열셋입니다. 그리고 토벌대를 이끌던 남궁관은…….”
외청 총관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보고는 해야만 했다.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