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매복 기습
탁.
화려한 부채를 소리 나게 접은 이무심은 주위를 손짓하며 말했다.
“보아라. 이곳은 넓은 길이 계속되다가 가늘고 길게 좁아지는 곳이다. 매복 습격을 위해서는 최적의 지형이 아니더냐?”
“하지만 채주님.”
장삼채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이곳은 장강이 아니라 육지입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수로채의 수적들은 강 위에서의 싸움에 능하다.
그런데 그런 이점을 버리고 수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나와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너는 아무 심려도 할 필요가 없느니라.”
번들거리는 이무심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매복 기습은 다른 부채주들이 할 것이다. 너는 남궁세가 놈들을 향해 곧장 돌격했다가 상황을 보아 가며 적당히 후퇴하기만 하면 된다.”
장삼채를 더욱 불안하게 한 것은 바로 그가 맡은 임무였다.
그의 임무는 돌격 선봉이다.
채주의 말로는 가서 툭 치고 약을 올린 다음 꽁무니를 빼면 된다고 했는데, 문제는 그다음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젠장, 막말로 매복조가 나 몰라라 해 버리면 나만 죽는 거 아냐?’
부채주들 간의 사이는 대단히 좋지 않았다.
언제 등에 칼을 꽂아도 이상하지 않은 판국에, 난리를 틈타 다른 부채주들이 자신을 제거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매복조로 남궁세가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장삼채의 모든 불안감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람 수는 자신들이 많다지만 과연 남궁세가를 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매복 기습이라 해도 상대는 바로 남궁세가의 정예들인데 말이다.
“어허!”
이무심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어찌 매복조만이더냐? 무심공의 대가인 나 이무심이 있지 않느냐? 게다가 남궁세가의 주력은 황천대가 처리할 터이니 우리는 그저 시간만 벌고 있으면 되느니라!”
이무심이 역정을 내자 장삼채는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젠장, 그놈의 황천대.’
장삼채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그놈들만 믿고 이런 짓을…….’
남궁세가의 무심파 토벌은 비밀이 아니었다.
오히려 남궁세가에서는 대대적으로 소문을 냈다. 그들의 힘을 과시하고 장강 유역의 영향력을 확대할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무심파는 초상을 당한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채주 이무심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무리 요즘 무심파의 기세가 높다해도 감히 남궁세가와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수상한 서찰을 받은 후부터 이무심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난생 처음 듣는 ‘황천대’를 핵심으로 한 작전을 발표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수채의 수적들이 장강을 버리고 육지로 가서 싸우자는, 그것도 남궁세가를 상대로 매복 기습을 하는 작전이었다.
모두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이무심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상천외한 작전’이자 ‘패배주의를 극복한 위대한 발상의 전환’이라 자찬했다.
수적들은 반신반의했으나 채주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채주 이무심의 무공도 뛰어났지만 그가 보인 자신감은 혹시나 하는 기대마저 갖게 만들었다.
결국 무심파의 수적들은 작전대로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 ‘황천대’는 코끝도 보이지 않고, 채주는 장삼채에게 무모한 돌격 선봉을 강요하고 있다.
그것도 남궁세가를 상대로 말이다.
장삼채로서는 이러다 뼈를 묻지 않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진작 야반도주라도 했어야 했나?’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던 장삼채에게 문득 난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장삼채는 고개를 갸웃했다.
‘만일 우리가 이기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만에 하나 정말로 남궁세가를 물리친다면 그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
‘에이.’
장삼채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일 일이야 알 게 뭐냐. 씨펄.’
잡념을 털어 버린 장삼채는 얼굴을 구겼다.
곧 닥쳐올 일을 생각하니 저절로 욕이 나왔지만 채주 앞이라 입 밖으로 내뱉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장삼채는 속을 푹푹 썩이고 있었다.
***
“사형!”
그 목소리에 말을 타고 있던 남궁관은 고개를 돌렸다.
따각, 따각.
말을 탄 젊은 청년이 남궁관에게 다가왔다.
남궁세가의 무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그 청년은 남궁관의 사제, 남궁상민이었다.
“뒤에서 따라오라 하지 않았느냐?”
중년의 남궁관이 짐짓 책망하듯 말했다.
남궁상민은 세가의 직계이자 자질이 제법 괜찮은 사제였다.
다만 아직 젊은 탓인지 공적에 대한 조급함 역시 엿보였다.
이번 토벌대에 동행케 한 것도 남궁상민에게 경험을 쌓아 주려는 세가 어른들의 뜻이었다.
“그게 아니라……. 저기, 사형. 저 앞쪽 지형이 조금 수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남궁상민은 슬쩍 말을 돌렸다.
“지형이 어떻단 말이냐?”
사형인 남궁관이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남궁상민은 오히려 눈을 빛냈다.
“수상합니다. 저렇게 갑자기 좁아지는 곳은 매복에 적격 아닙니까? 제가 저번에 읽은 책에서도…….”
“이곳은 무당파의 영역이다.”
남궁관은 사제 남궁상민의 말을 끊었다.
“온 사방에 무당과 연관되지 않은 문파나 도장이 없는데 어찌 수적들이 함부로 움직일 수 있을까? 무당파의 시선을 피해 장강 외진 곳에 수채를 세운 놈들이 말이야.”
남궁세가가 이제껏 무심파 토벌에 나서지 못한 이유는 이곳이 전통적으로 무당파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아는 무심파 역시 무당파나 그에 연관된 배는 털끝도 건드리지 않았다.
결국 상선들은 무당파와 연관된 무관에 보호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무심파는 교묘히 무당파를 피해 가며 통행세를 걷었다.
수채인 무심파와 거대 문파인 무당파가 일종의 상생관계를 이루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수적들이 매복을 하려면 우리의 행적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지.”
남궁관은 말을 이었다.
“수적들에게 그럴 역량이 있겠나?”
무심파 따위는 애초에 남궁세가의 안중에도 없었다.
장애물은 오직 무당파뿐, 암묵적인 허락을 얻은 지금 남궁세가에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수적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자칫…….”
남궁상민의 항변에 남궁관은 웃었다.
“확실히 궁지에 몰리긴 했지.”
남궁세가의 토벌대는 백이십여 명에 달한다.
물론 모두가 남궁세가의 정예는 아니다.
세가의 정예는 스물다섯뿐, 나머지는 남궁세가 휘하의 협력 문파 소속이다.
그러나 이들 만으로도 수채 하나를 토벌하기에는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과할 정도였다.
“그래서 어찌하고 싶은가?”
남궁관의 말에 남궁상민의 눈이 반짝였다.
“제가 앞을 정찰하겠습니다.”
‘척후라…….’
남궁상민의 제안은 척후, 곧 일종의 정찰대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다.
남궁관은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사제에게 공훈을 줄 명분으로는 말이다.
“한번 해 보게.”
“네!”
환한 표정이 된 남궁상민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휘익.
남궁상민은 즉시 뒤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백이십여 명의 기마 중 몇 사람이 즉시 대열 밖으로 나와 앞으로 달려왔다.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듯했다.
“가자!”
따가닥, 따가닥.
남궁상민과 다섯 기마는 토벌대 앞으로 빠르게 앞서 나갔다.
‘그래. 남궁세가의 사람이면 저 정도의 혈기는 있어야지.’
벌써 저 앞으로 멀어지고 있는 사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궁관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더욱 마음에 드는 날씨였다.
“피를 보기엔 좋은 날이군.”
백이십여 기마로 구성된 토벌대의 선두에 서서, 남궁관은 웃음을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
“옵니다!”
수풀에 몸을 숨기고 있던 장삼채는 수하의 보고에 침을 꿀꺽 삼켰다.
채주 이무심의 말대로였다.
남궁세가가 오늘 안으로 이곳을 지날 것이라더니 진짜로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정보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매복이 헛수고는 아니게 되었다.
사실 장삼채는 내심 헛수고가 되기를 바라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장삼채는 검을 든 손에 힘을 주며 낮은 목소리로 수하들에게 말했다.
“다들 준비해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수하들의 눈에는 긴장이 역력했다.
장삼채는 이를 악물었다.
“절대 혼자 치고 들어가지 마라. 알았냐?”
수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남궁세가를 상대로 혼자 치고 들어갈 리가 없다.
하지만 싸움이 시작되고 눈이 뒤집히면 앞뒤 못 가리는 놈도 나오게 마련이다.
여러 번 싸움을 겪어 본 장삼채는 그것을 잘 알았다.
그리고 그놈은 십중팔구 죽는다는 것도.
“어려울 것 없다. 미리 말한 대로 우리는 저놈들을 끌어들이기만 하면 돼.”
장삼채는 다시 한번 수하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놈, 공포에 벌써 눈이 뒤집히려는 놈은 물론이고 득도라도 한 듯 담담한 놈도 있었다.
그러나 장삼채를 쳐다보는 눈길만은 모두가 똑같았다.
마치 장삼채만이 살길이라는 듯 말이다.
“……다들 죽지 마라.”
장삼채가 칼을 쥐고 막 일어서려는 때였다.
“어, 저기 부채주님.”
처음 보고했던 수하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긴 오는데, 여섯뿐입니다.”
“뭐?”
장삼채는 놀라 되물었다.
“나머지는? 본대는 어떻게 됐어?”
‘설마 벌써 들켰나?’
당황하자 목소리가 절로 높아진다. 장삼채의 물음에 수하는 곧바로 대답했다.
“여전히 뒤에 따라오고 있습니다.”
장삼채는 혼란스러워졌다.
매복을 의심해 척후를 보낸 것이라면 당연히 본대는 멈추거나 천천히 다가와야 한다.
그냥 오고 있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러다가 지나가겠습니다!”
다급한 목소리에 장삼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젠장.’
척후건 뭐건 상관없었다.
어쩌면 전령일지도 모르고 혹은 그냥 심심해서 달려 보는 미친놈들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들을 그냥 보냈다간 자신들의 퇴로가 막힌다.
“가자!”
일어서는 장삼채를 따라 서른 명 남짓한 수하들이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가닥, 따가닥.
길을 따라 남궁세가의 여섯 기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척후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경계심이나 긴장감조차 없었다.
“준비.”
뿌드득.
삼십 명의 수적들이 일제히 활을 당겼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한 시위 위에 날카로운 활촉이 번득인다.
따가닥, 따가닥.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남궁세가의 척후는 이미 충분히 가까웠다.
“쏴라!”
피피피핑.
“으악!”
히히힝.
말과 사람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장삼채는 즉시 외쳤다.
“가자아아!”
“우아아아!”
삼십 명의 수적들이 소리를 치며 남궁세가의 척후들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무심파 돌격 선봉, 부채주 장삼채의 출진이었다.
남궁상민을 척후로 앞서 보낸 남궁관은 무언가 변고가 생겼음을 즉시 알아차렸다.
비록 수풀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요란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랴!”
남궁관은 즉시 말을 달렸다.
남궁관의 말이 질주하자 뒤따르던 백이십여 토벌대도 속도를 높였다.
조용하던 길 위에 뿌연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따가닥, 따가닥.
남궁관은 말을 몰아 수풀이 우거진 길로 들어섰다.
그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바로 자신의 사제가 화살을 맞은 채 검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네 이놈들!”
남궁관은 노성을 내지르며 즉시 몸을 날렸다.
탓.
말을 멈추지도 않았다.
오히려 달리던 말의 기세를 이용하여 남궁관은 그대로 남궁상민 곁에 날아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남궁관의 검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렸다.
“크아악!”
“크헉!”
단번에 수적 둘이 고꾸라졌다.
그러나 남궁관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크아아악!”
남궁관의 검이 춤을 추자 주변에 있던 서너 명의 수적이 피를 흘리며 물러섰다.
바로 그때였다.
카앙.
커다란 칼날이 남궁관의 검을 막았다.
남궁관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상대는 남궁관의 검을 잠시 멈추는 것 이상을 바라지는 않았다.
“후퇴! 후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