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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17화 (117/530)
  • 117화. 갈망

    신승의 주름진 눈에 거짓은 없었다.

    그는 운현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무나.”

    그 말은 운현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그건 분명 신승의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신승은 ‘네 힘이라도 빌릴까 했다’고 분명히 말했다.

    정말 운현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은 것일까?

    “그럼, 혹시 이대로 제가 낙향해도 괜찮으십니까?”

    “뭐?”

    신승이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묻는다.

    “아니 그러니까, 제가 이대로 고향에 돌아가서 서원을 차리고 강호 무림과는 아예 인연 없이 살아도 대사님께선 괜찮으신지…….”

    “크헐헐! 무어라? 서원을 차려?”

    신승은 크게 웃었다.

    “이놈아, 네가 서원을 차리면 이검학이 안 찾아갈 것 같더냐? 다른 문파들은 가만히 있고? 아니, 일단 북해빙궁부터가 당장 쫓아갈 텐데, 그 서원 한번 잘도 되겠구나.”

    정말로 웃기다는 듯 신승은 배까지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운현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신승의 말대로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예 문파를 하나 차린다고 하지 그러냐? 서원문이라고 하면 그럴듯하고 좋아 보이는구나. 크하하하.”

    마음껏 웃던 신승은 운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이 녀석아. 네가 이검학과 인연이 닿은 순간부터 편히 살기는 이미 그른 것이다. 알았느냐? 쯧쯧쯧.”

    동정과 웃음이 반쯤 섞인 그 말에 운현은 인상을 구겼다.

    “뭐,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라.”

    운현이 안돼 보였는지 신승이 위로랍시고 말했다.

    “나나 이검학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넌 이렇게 되었을 테니까.”

    “네?”

    그건 정말로 의외의 말이었다.

    운현은 눈을 껌뻑이며 신승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승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넌 왜 무림맹으로 돌아왔느냐? 네 말대로 낙향하여 서원이라도 차리면 될 것 아니냐? 그런데 왜 부득불 이곳으로 돌아와 서기를 하냐는 말이다.”

    “그건…….”

    운현은 말문이 막혔다.

    장강에서 만난 상인들이나 의형의 딸 일아영의 모습에서 자신도 무언가 해야겠다고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그뿐이라면 호암상단의 총수가 한 제안을 받아들였어도 될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말처럼 아예 낙향하여 작은 서원이라도 차리면 된다.

    그런데 자신은 무림맹으로 들어왔다.

    왜였을까?

    운현은 입안에서 대답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꼈다.

    할 말은 있었지만 변명 같았다.

    자신은 왜 이곳 무림맹으로 돌아 온 것일까?

    “그건 네 마음속에 검을 향한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운현은 흠칫 놀랐다.

    나지막한 신승의 목소리는 운현에 가슴에 비수 꽂히듯 파고들었다.

    “너는 이검학, 그 녀석과 똑같은 놈이다. 검의 끝을 추구하고 그 검을 논할 상대를 갈망하지. 차이가 있다면 이검학은 알고 행하고 너는 모르고 행한다는 것뿐이다. 헐헐헐.”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도 없었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저는 이미 무림인인 것입니까?”

    “왜? 너는 문사라며?”

    “하지만 대사님의 말씀대로라면…….”

    “허어, 그놈 참. 쓸데없는 생각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신승은 말했다.

    “이놈아, 하늘과 땅 가운데 오직 사람뿐이니라.”

    그 나지막한 목소리는 운현의 귀를 크게 울렸다.

    신승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헛된 말들에 미혹되지 말고 사람으로서 어찌 살 것인가부터 궁리해라. 이 말에 휩쓸리고 저 말에 흔들려서야 어찌 피곤한 삶이 아니겠느냐?”

    턱.

    신승의 주름진 손이 운현의 어깨에 얹혔다.

    “자신의 마음을 지켜라. 자신의 것이 없는 사람은 남의 것도 받아들일 줄 모르니까. 그리고 잘 생각하거라. 네가 이제부터 어떤 길을 걷고 싶은지, 그리고 어떻게 걸어가야 할 것인지 말이다.”

    툭툭.

    힘을 내라는 듯 신승은 운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런데 이제부터 너도 뭔가 좀 들고 다녀야 하지 않겠느냐?”

    “네?”

    갑작스러운 말에 운현이 반문했다. 하지만 신승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 말했잖느냐? 염중부의 집착은 집요하다고. ‘그 검’이라도 내주랴?”

    운현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 검, 낙일 탓에 이 고생인데 그걸 떡하니 들고 다니라니?

    스스로 소문의 주인공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꼴이니 귀찮은 일이 안 생길 리가 없다.

    “허, 그놈 참 이상한 고집은……. 그럼 네 녀석 말대로 목검이라도 하나 들고 다니던가.”

    알아서 하라는 듯 신승이 말했다.

    “어쨌거나 잘해 봐라. 아니면 잠시 이곳을 떠나 있는 것도 좋을 듯하고…….”

    저벅.

    신승은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어디 가십니까?”

    운현의 말에 신승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답했다.

    “집에 간다. 왜? 더 할 말 있냐?”

    “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운현 자신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된 것 없이 그대로다.

    뭔가 여전히 억울한데, 그렇다고 신승을 붙들 명분도 용건도 없다.

    “또 보자.”

    신승은 가볍게 손을 흔든 후 발소리도 없이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빈터는 다시금 본래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되찾았다.

    철혈사왕 염중부의 날카로운 살기도, 폭풍 같던 신승의 기세도 꿈만 같았다.

    하지만 그 흔적만은 분명해서, 빈터에는 이곳저곳 날카로운 상흔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후우.”

    운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엄청난 일을 겪고 놀라운 비밀을 들었지만 운현의 마음은 오히려 고요했다.

    다만 신승이 남기고 간 말이 화두처럼 그의 마음을 떠돌 뿐이었다.

    “사람으로서 어찌 살 것인가…….”

    지난 세월 동안 운현이 읽은 수많은 책들이 바로 그것을 말했다.

    어려운 문장과 난해한 해석들 역시 그를 말하고 있었다.

    만일 ‘사람이 어찌 살아야 하는가를 논하라’ 했다면 운현은 이 자리에서 수십 장의 답안지를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운현이 들은 신승의 말은,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대답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으로서…….”

    운현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환한 아침 햇살 아래 무림맹의 건물들이 밝아오고 있었다.

    늘 보아 오던 모습이었지만 오늘 아침만은 어쩐지 사뭇 달라 보이는 것을 운현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무림맹의 아침이 또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

    무림맹의 지부 확장이 공식 의결되고 무림맹은 대단히 분주해졌다.

    새로운 지부의 설치와 권한 확대를 위한 조치들이 잇달아 발표되더니, 곧이어 각 지부의 책임자와 무사들, 그리고 서기들도 확정되었다.

    오래 기다리던 신입 서기들은 다들 기뻐했지만 발령받은 지부에 따라서 조금씩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운현을 비롯한 안수재, 조두식, 편어두는 그중 희(喜)쪽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항주에 남아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축하하오. 조 형.”

    “아이구. 항주에 남아 있는 게 무슨 축하받을 일이겠소? 괜히 술값이나 비싸고…….”

    조두식은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다른 서기들은 부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평소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조두식은 여러 서기들과 인사를 나눈 후 운현이 있는 쪽으로 왔다.

    “조 형도 항주요?”

    안수재가 물었다. 조두식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먼 오지로나 가지 않으면 다행이려니 했는데……. 안 형도 항주입니까?”

    안수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것 같소. 운 형이나 편 형이야 열심히 했으니 그렇다 쳐도 나 같은 사람은 뭘 보고 이곳에 남아 있으라고 했는지 모르겠소.”

    공교롭게도 네 사람은 전부 항주 무림맹에 남아 있게 되었다.

    같은 서기라지만 지부와 무림맹의 차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니 항주에 남아 있게 된 서기들의 얼굴엔 자부심이, 다른 서기들의 표정엔 질시와 선망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잘됐군요. 낯선 지부로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거저 주는 떡은 꼭 뒤가 좋지 않아서…….”

    부정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안수재의 말에 조두식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화제를 바꾸려는 듯 조두식이 편어두에게 물었다.

    “편 형, 혹시 남궁세가의 일에 대해 아는 것 있소?”

    “남궁세가요?”

    편어두가 고개를 갸웃한다.

    “안휘성 지부로 가는 친구가 남궁세가 문제로 바쁘게 생겼다고 울상이길래 말이오. 혹시 들은 것 있소?”

    “아, 그거…….”

    새로운 소식에 관해서라면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편어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에서 이번에 장강 수채 하나를 치는 이야기일 겁니다.”

    “수채 말이오?”

    “네. 아마, 무심파던가 하는 수채 건일 겁니다.”

    “무심파라고요?”

    운현이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운 형도 아는 곳이오?”

    조두식이 묻자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 잘 아는 건 아닙니다만…….”

    장강을 오르는 배에서 마주쳤던 수적들이 바로 무심파였다.

    운현은 편어두에게 물었다.

    “편 형, 혹시 호암상단도 연관이 있습니까?”

    그 말에 편어두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맞아요. 운 형도 알고 있었군요.”

    “두 사람만 알지 말고 자세히 좀 말해 주시오.”

    조두식의 재촉에 편어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호암상단의 배가 무심파의 습격 때문에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호암상단의 뒤를 봐주는 남궁세가가 무심파를 손봐 주려는 거지요.”

    “남궁세가라면 수채 따윈 한 방 아니오?”

    조두식의 말에 편어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 한 방이긴 하지만 남궁세가가 움직이면 장강에 이권이 얽혀 있는 다른 문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잖아도 서로 견제하는 판국인데.”

    “수채 하나 치는데 그렇게까지 눈치를 본단 말이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조두식이 물었다.

    “그야…….”

    “수채 하나지만 수채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대답은 안수재가 했다.

    조두식과 편어두가 쳐다보자 안수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남궁세가에서 수채를 토벌하면 당연히 장강에서 남궁세가의 위상이 올라가지 않겠소? 다른 문파들도 그걸 아니까 그동안 견제를 해 왔던 걸 테고. 이제야 나서는 걸 보니 이번 지부 확장을 계기로 뭔가 거래나 합의를 한 것 아니겠소.”

    거침없는 안수재의 말에 조두식은 감탄했다.

    “어떻게 그리 잘 아시오? 혹시 이미 알고 있었소?”

    편어두나 운현도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정작 안수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힘 있는 놈들이 하는 짓은 어디나 다 똑같은 것 아니겠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서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부터 자신들이 그 ‘힘 있는 놈들’을 모시며 살아야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안수재는 여전히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채, 갑자기 조용해진 세 사람을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

    “채주님.”

    부채주 장삼채의 목소리에 부채를 펄럭이던 채주 이무심이 고개를 돌렸다.

    “어찌하여 본좌를 부르느냐?”

    느릿하고 느끼한 채주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장삼채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눈살을 찡그렸다.

    ‘쯧.’

    이무심의 말이며 행동은 여전히 적응이 쉽지 않았다.

    목소리나 행동거지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법명 ‘무심’ 앞에 성을 붙이는 괴상한 방식은 물론이고, 승려라면서 요란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차라리 사교의 교주에 더 가까웠다.

    평생 수적으로 살아왔던 장삼채로서는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매복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오오, 그러하냐?”

    번들번들한 머리를 빛내며 이무심은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제 너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느냐?”

    장삼채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 채주님.”

    “왜에?”

    “이 작전으로 되겠습니까? 저는 아무래도…….”

    장삼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주위에 사람이 없다 한들 채주의 뜻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허허허, 그것은 네가 걱정할 것이 아니니라.”

    이무심은 넓은 아량을 보이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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