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화산지약
투덜거리듯 신승이 말했다.
“그놈들이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내가 왜 일일이 그놈들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단 말이냐? 속건 속이건 다 제 놈들이 감당할 업보지.”
그렇게 말한 신승은 웃기 시작했다.
“클클클, 하지만 그리도 거만하던 것들이 허둥지둥하는 꼴을 보자니 속이 다 시원하더구나. 흐흐흐.”
신승이라는 명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웃음이었지만 운현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검성의 후계자라니.’
난감하기가 이를 데 없는 말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스스로 사라질 일이라 여겼는데 강호 무림에 이미 소문이 가득하다고 한다.
검성에게도 미안하고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운 일이며,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을 속인 셈이 되었으니 면목이 없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아니라고 말해 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얼굴을 구기고 있던 운현은 문득 신승에게 물었다.
“혹시 그 소문을 낸 사람도…….”
“어허!”
신승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누굴 모함하려고! 난 절대 아니다.”
하지만 운현은 믿을 수가 없었다.
검성이 그런 말을 하고 다닐 것 같지는 않으니 의심스러운 사람은 신승뿐이다.
하지만 신승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정 불만이면 북해에 가서 따져 보든가.”
‘북해!’
운현은 아차 싶었다.
검성이 낙일검을 운현에게 넘겨준 것을 아는 사람은 또 있다.
바로 북해의 소궁주와 그녀의 일행들이다.
‘낙일의 주인’이라며 운현을 칭하던 소궁주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지 않은가?
“클클클, 거봐라.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여자 문제는 늘 확실히 해야 한다고 말이다.”
신승은 고소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런 말은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신승은 그것 보라는 듯 운현을 놀렸다.
“세상에 남녀 간의 문제만큼 복잡한 게 없느니라. 하긴 그걸 확실히 할 수 있는 남자가 있기는 할까 싶다만……. 아마 부처님도 못 하실걸?”
신성모독에 가까운 말을 태연히 늘어놓는 신승의 목소리조차 운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 생각하던 북해 소궁주의 일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아니 오히려 더욱 커지고 있다는 것이 운현을 난감하게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운현의 난감한 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신승이 문득 말했다.
“그리도 마음에 걸리면 내가 다시 대표자들에게 전해 주랴? 너는 검성의 후계자가 아니라고 말이다.”
“……아니, 됐습니다.”
운현은 사양했다.
신승이 끼어들어서 안 꼬인 일이 없다.
차라리 가만히 있어 주는 것이 가장 나을 것이다.
“싫으면 말고.”
신승은 기분이 상한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아서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신승을 바라보던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대사님.”
“왜?”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불구하고 운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사님께선 제게 무엇을 바라시는 것입니까?”
“바라긴 뭘…….”
퉁명스레 대답하던 신승의 목소리가 멈췄다.
신승을 바라보는 운현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운현이 당한 모든 문제의 시작은 바로 신승이다.
소문은 북해의 소궁주가 원인이라지만 신승은 그 소문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무림맹은 물론이고 어쩌면 강호 무림 전체가 신승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신승에게 묻지 않으면 어느 누구에게 물으랴?
운현을 바라보던 신승은 나지막이 한숨을 흘렸다.
“네가 그리 물으니 나도 제대로 대답해 주어야겠지. 일말의 책임도 있고…….”
중얼거리던 신승이 운현을 향해 말했다.
“너는 환우오천존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느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는 환우오천존의 명호만은 운현도 알고 있었다.
“일성(一聖), 일승(一僧), 일왕(一王), 일선(一仙), 그리고 일은(一隱). 정사대전 당시 강호 무림에는 오존이라 손꼽히는 다섯 명의 고수들이 있었다.”
신승은 눈동자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한 사람이 정사대전을 좌우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에 따라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정사대전에 참여하지 않았지. 그것은 바로 화산지약 때문이다.”
“화산지약…….”
“오존은 정사대전에 직접 연관되는 것을 꺼렸다. 개인적인 성향 탓도 있었지만, 그들이 서로 부딪히게 되면 어느 쪽이든 큰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지.”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우오천존은 강호 무림의 최고수다.
그들이 서로 부딪히면 그 결과는 서로에게 파멸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누가 이기고 지건 간에 말이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문제였다. 그대로 있다가는 어떤 식으로든 정사대전에 얽힐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내가 은밀히 제안했다. 오존이 공멸을 피하는 방법을 말이다.”
“그것이 화산지약입니까?”
“그래.”
신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첫째, 오존과 그가 속한 세력은 결코 서로 적대하지 않는다. 둘째, 절대 후계를 키우지 않는다. 그리고 셋째, 화산지약을 어긴 자는 반드시 징계한다.”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는 오존의 맹약치고는 어딘가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다.”
신승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오존이 각자 자신의 길을 가되, 서로 건드리지도 말고 자극하지도 말자는 뜻이지. 후계를 키우지 못하게 한 것은 혹시 모를 누군가 한 사람의 독주를 막자는 의도고. 혼자서는 다른 넷을 상대할 수 없겠지만 제자가 생긴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도 있거든. 마침 다들 사문에 얽매여 있지 않기도 했었고…….”
별것 아닌 듯 말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운현은 짐작할 수 있었다.
사승 관계나 사문이야말로 무인들이 더없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 아닌가?
“하지만 이 화산지약에는 속임수가 하나 깔려 있었지.”
신승이 빙긋 웃었다.
“속임수요?”
“당시 오존은 정사대전에 말려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모든 공식적인 관계를 끊은 상태였다. 당문의 독선은 문주의 자리를 물려주고 아예 가문을 나왔고, 나도 소림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이미 선언한 상태였으니까. 아, 물론 공식적으로만 말이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은원과 인연은 결코 쉽게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천하에서 가장 강한 오존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설령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정사대전에서 거리를 둘 명분은 충분히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산에서 다섯 명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던 바로 그때 말이다.”
신승은 짐짓 목소리를 낮췄다.
“강호에서는 이미 나의 이름으로 무림맹의 창설을 선언하고 있었다. 모든 문파에 정사대전의 즉각적인 중지와 무림맹의 참가를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적극적인 적대 행동을 할 것을 선포한 것이지. 다시 말하면 무림맹에 속하지 않은 강호의 모든 문파를 적으로 돌린 것이다.”
운현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설마…….”
“클클클.”
신승은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를 제외한 다른 네 명은 이제 어느 문파에도 관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무림맹은 맹에 속하지 않은 어떠한 문파도 적으로 규정하고 있으니까.”
운현은 신승의 말뜻을 금방 알아들었다.
만일 오존 중 누군가가 무림맹에 속하지 않은 다른 문파에 관여하는 순간 그는 무림맹, 즉 신승 불영 대사와 적대하는 것이 되고 결국 화산지약을 어긴 셈이 된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림맹에 들어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무림맹, 곧 신승 아래로 들어가는 것을 그들의 자존심이 용납할리 없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선택의 가능성이 전부 사라진 셈이다.
“그건 좀…….”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신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얄팍한 속임수다. 하지만 나로서는 건곤일척의 도박이기도 했다. 그렇게 화산지약은 성립되었고 나를 제외한 네 사람은 사실상 공식적인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 화산지약이 버티고 있으니 말이야. 클클클.”
“속은 것을 안 다른 분들이 가만히 있으셨습니까?”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지.”
신승은 철혈사왕 염중부가 사라진 쪽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오존의 자존심은 하늘보다 높다. 속은 것을 알았다 하여 즉시로 말을 바꿀 수는 없지. 차라리 이를 갈고 폐관수련에 들어가다면 몰라도.”
오존의 말은 무겁다.
아무리 속았다 해도 즉시 말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검성 이검학이 나와 뜻을 같이했고 일은(一隱)이 동의했다. 그러면 화산지약은 이미 성립된 거나 마찬가지지. 반대하는 두 사람을 셋이서 제압하면 될 것 아니냐?”
운현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그래, 힘의 논리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강호 무림이다.”
화산지약은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었다.
단지 마지막 쐐기와 명분이었을 뿐, 모든 일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신승 불영 대사의 뜻에 의해서 말이다.
“허나 만일 내가 천하의 주인인 양 행세했다면 그들도 가만히 있진 않았을 게다.”
신승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이 잠자코 있었던 것은 내가 정사대전을 끝낸다는 대의를 철저하게 앞세웠기 때문이다. 결코 정파나 사파에 기울지 않고 말이다.”
정파인 소림 출신이면서도 신승은 모든 문파를 포용했다.
사파로 매도되던 신흥 문파들은 물론, 진짜 사파라도 무림맹의 문은 열려 있었다.
그것이 오늘날 무림맹이 과거의 정파와 사파를 모두 아우르는 이유이기도 했다.
“정사대전이 종결된 후에 나는 와룡헌으로 물러나 사실상 은거를 해 버렸지. 그래서 그들이 지금껏 가만히 있었던 게야.”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니 철혈사왕 염중부가 신승이나 검성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무림맹이 정사대전을 끝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존 중 넷이 물러나면서 이미 힘의 균형이 깨어진 데다, 오랜 정사대전으로 인해 다들 피폐해진 상황이었으니까.”
신승이 무림맹을 창설하고 다른 넷이 물러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대세는 정해진 셈이었다.
설령 받아들일 수 없는 문파가 있었다 해도 싸움을 계속할 여력 자체가 없다.
그러니 정사대전은 무림맹의 뜻대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허나 무림맹으로 인해 흘린 피 또한 작은 것은 아니었지.”
신승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리며 말했다.
“비록 대의를 가지고 있었다 해도 말이다.”
운현은 그 목소리에서 자신이 모르는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랫동안 이어진 정사대전을 끝내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은원을 중요하게 여기는 강호 무림에서, 치열하게 반목하던 문파들이 한자리에 앉는 것이 어찌 쉬우랴?
신승 불영 대사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무림맹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사대전은, 아마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 강호 무림을 둘로 가르고 있었을 테고 말이다.
“정사대전은 무림맹에 의해 끝났다. 하지만 무림맹 역시 많이 달라졌어. 나도 살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고…….”
조용히 불호를 외던 신승은 문득 한쪽 눈살을 찌푸리며 운현을 향했다.
“그래서 몸도 영 예전 같지 않고 하길래 네 손이라도 잠시 빌릴까 했더니만, 그걸 가지고 새파랗게 젊은 놈이 노인네한테 삿대질을 해 가며 따져? 너는 책도 많이 읽었다더니 예의 범절은 쏙 빼놓고 읽었더냐? 엉?”
“제, 제가 언제 삿대질을…….”
갑작스러운 질책에 운현이 항의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그 검도 그래. 힘없는 노인네들 대신해서 그깟 검 하나쯤 받아주면 어때서! 다 네 녀석 잘되라고 한 일이거늘, 그걸 가지고 또 소문을 내었느니 말았느니 하며 따지고 들어? 에라이 나쁜 놈아!”
“죄, 죄송합니다.”
힘없는 노인네도 아니고 그깟 검 하나도 아니지만 일단 운현은 사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승의 말을 전부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허나 그래도 저는…….”
“바라는 거 없다.”
“네?”
의아한 표정의 운현에게 신승이 말했다.
“네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었더냐? 너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다.”
온화한 눈빛으로 신승은 말을 이었다.
“너는 그저 그대로만 있으면 된다.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그런 심검을 얻었는지도 묻지 않겠다. 네 자리라고 생각되면 머물고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 떠나라. 너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