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철혈사왕
‘엇!’
운현은 크게 놀랐다.
그저 한 발을 내디뎠을 뿐인데, 한순간 신승의 모습이 완벽하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금강부동보!”
염중부가 원한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신승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찰나였지만 염중부의 붉은 채찍이 헛되이 허공을 가르기엔 충분했다.
어느새 신승은 본래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이익!”
염중부는 이를 갈며 사편을 휘둘렀다.
취리리릭.
붉은 채찍은 허공에서 궤적을 틀어 다시 신승을 향해 짓쳐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신승의 금강지가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투투퉁.
파파팡.
마치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붉은 뱀은 그 주인의 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휘리릭.
염중부가 뒷짐을 지고 사편이 모습을 감췄다.
“왜? 이제 그만하려고?”
신승이 넉살좋게 말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좀 더 인사를 나눠도 상관없다만.”
“흥.”
염중부가 눈살을 찌푸렸다.
“화산지약이 깨졌으니 네놈과 나눌 인사 같은 건 없다.”
“화산지약이 깨져?”
신승은 주름진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어떻게? 아, 혹시 독선이 드디어 죽었나? 아이고 저런…….”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신승은 혀를 찼다.
“평소에 아무것이나 주워 먹지 말랬더니 결국 독초를 집어먹고 탈이 났나 보구만, 쯧쯧.”
한손으로 합장하며 불호까지 외는 신승의 모습에 염중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가 독선이 죽었다더냐!”
염중부의 일갈에 신승은 고개를 갸웃했다.
“독선이 아니라고? 그 친구가 아니면 아직 죽을 사람이 없는데? 그럼 어째서 화산지약이 깨졌다는 건가? 아, 혹시 자네가…….”
“저놈 말이다!”
염중부는 운현을 크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기 검성의 후계자라는 놈이 있거늘 네가 계속 헛소리를 할 참이냐?”
완연히 흐트러진 염중부의 모습을 보며 운현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염중부 정도의 사람이 이토록 간단히 흐트러지는 것을 보면 이미 수차례 신승에게 당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지금의 이 과민한 반응은 아마도 그 탓이리라.
“검성의 후계자?”
난생처음 듣는다는 듯 신승은 눈살을 찌푸렸다.
신승은 운현을 한번 돌아보고는 다시 염중부에게 물었다.
“누가?”
으득.
뻔뻔한 신승의 표정에 염중부가 이를 갈았다.
“저놈이, 검성의 후계자가, 아니란 말이냐?”
이를 갈며 염중부가 말했다.
원한과 분노가 줄기줄기 서려 있는 그의 표정은 운현조차 섬뜩할 정도였다.
그러나 신승은 눈썹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당연히 아니지.”
염중부가 움찔했다.
그러나 신승은 여전히 태연자약, 너무나도 당당했다.
염중부는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다시 물었다.
“네가 그를 확인해 주었다 들었다. 네 이름을 걸고서라도 아니란 말이냐?”
“헐헐.”
신승은 웃음을 흘렸다.
“이 땡중의 허명이야 걸라면 언제든지 걸겠네만, 과연 자네에게 그게 의미가 있겠나?”
염중부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당연히 없다. 신승이 무슨 대단한 이름이라고 네 말을 믿으란 말이냐?”
노골적인 조롱의 말투였다.
그러나 신승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헌데 그리도 신중한 자네가 강호의 소문은 어찌 그리 쉽사리 믿었는가? 헐헐헐.”
염중부는 다시 발끈했다.
“헛소리! 나 염중부는 천하의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런가? 그럼 이거 낭패로군.”
신승은 짐짓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는 내 말도, 강호의 소문도 믿지 않을 테니 이검학이 화산지약을 어겼는지 어찌 확인할 셈인가?”
염중부는 스스로 모순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사실이 있어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이를테면 불가지론(不可知論)에 이른 셈이다.
그리고 지켜보던 운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조금 전 ‘신승이 확인해 준 것이 사실인가’라는 염중부의 질문은 어느새 완전히 잊혀졌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대단히 자연스럽고 능청스러워서, 신승을 말싸움에서 이길 사람이 세상에 과연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렇다면.”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본인에게 묻는 것이 제일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염중부도, 신승도 운현을 돌아보았다.
운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비록 잘 알지는 못하나 검성이시라면 결코 허언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일은 그분께 묻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요.”
그것은 염중부를 도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신승을 방해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의 이 논쟁이 쓸데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져서였다.
검성의 일을 본인 외에 다른 이들이 떠드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건 그렇군.”
의외로 신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염중부는 운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치 숨은 진의라도 파악하겠다는 듯.
“어떠냐? 이 아이의 말이 옳지 않냐?”
신승의 말에도 염중부는 인상을 찌푸린 채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알았다.”
염중부의 말에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이른 것이었다.
“허나.”
염중부는 운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놈도 나와 같이 가야겠다.”
“네?”
당연한 반문이었지만 염중부는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증거도 없이 남을 추궁할 수는 없다. 그러니 널 데려가서 이검학과 대면시켜야 할 것 아니냐?”
염중부의 표정에 가득한 것은 분명한 악의였다.
그는 조금 전까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운현과 신승을 추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던 그 순간이었다.
“그건 곤란한데.”
신승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염중부가 옳거니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는데 신승의 말이 이어졌다.
“이놈은 내 거다.”
염중부와 운현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뭐?”
“내 사람이라고.”
태연한 신승의 대답에 염중부는 당황했다.
“그게 무슨…….”
“이놈은 무림맹 서기다. 서기 모집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했고 훈련까지 마친 무림맹의 사람이란 말이다. 그러니 네가 이놈을 강제로 끌고 가면.”
신승은 씨익 웃고는 말했다.
“화산지약을 정면으로 깨는 짓이 될걸?”
운현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염중부는 달랐다.
눈에 띄게 움찔하던 그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운현을 돌아보았다.
“네가 여전히 무림맹 서기더냐?”
그것은 조금 이상한 질문이었다.
운현이 무림맹의 서기냐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서기인가를 묻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현은 반문 대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염중부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쯧.”
그는 혀를 찼다.
“독선이 떠난 당가 따위, 어차피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염중부는 몸을 돌렸다.
“왜, 벌써 가려고? 온 김에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지?”
“그따위 신선놀음에는 취미가 없다.”
거칠게 쏘아붙인 염중부가 문득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추고 운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너.”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염중부가 말했다.
“또 보게 될 것이다.”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염중부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탓.
염중부는 가볍게 발을 구르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놀랐느냐?”
운현은 몸을 돌려 신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운현은 꼼짝없이 염중부에게 끌려갈 뻔했다.
백보신권으로 쌍두독아에서 구해 준 것도 물론이다.
어차피 그때의 쌍두독아에 살의는 없었다 해도 말이다.
“인사는 필요 없다. 어차피 내 책임이기도 하니까.”
신승은 염중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담담하지만 많은 회한이 담긴 그 눈빛에 운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철혈사왕 염중부다.”
운현의 안색이 변했다.
철혈사왕이라는 명호는 운현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검성, 신승과 함께 천하에서 가장 강한 다섯, 환우오천존으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 사람이…….’
운현은 놀라우면서도 조금 실망스러웠다.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이 그런 성정을 가졌다는 것이 사뭇 기대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가 철혈사왕입니까?”
“그래.”
담담한 목소리로 신승이 말했다.
“누구보다 잔혹하고 더없이 냉정하다는 철혈사왕 염중부가 바로 그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데 주저함이 없고 손해 보는 것을 광적으로 싫어하면서도 한편으론 늘 대협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지.”
신승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는 이검학을 지독히도 미워한다. 마땅히 자신이 받아야 할 찬사를 빼앗아 갔다고 여기는 게지. 하지만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오직 자신만이 모르고 있으니…….”
신승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결코 손해 보지 않으려는 그 성격이 그의 족쇄다. 그가 조금만 우직했더라면 아마도 많은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었겠지만, 한 치도 손해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것들을 잃고 사는 셈이지. 모두가 지나고 나면 자취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이거늘……. 쯧쯧.”
혀를 차던 신승은 운현을 돌아보았다.
“그가 이렇게 물러가는 것은 결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의 집착 또한 보통 집요한 것이 아니니, 너도 앞으로 그를 만나거든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게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잊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까 대사님께서 무언가 확인해 주셨다고 그가 말하던데 말입니다.”
“응? 아까? 그랬었나? 아이고, 늙으니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해서…….”
신승은 갑자기 엄살을 부렸다.
폭풍 같은 기세를 뿜어내던 게 방금 전인데, 지금은 거동도 힘든 노인처럼 등까지 구부정하다.
그러나 운현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네.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운현이 물었다.
“또 저 모르게 뭔가를 하신 겁니까?”
“하긴 뭘 해.”
신승은 퉁명스레 말했다.
“대표자 놈들이 사람을 보내서 하도 귀찮게 하길래 그냥 알려 줬다. 나는 그것밖에 안 했어.”
운현은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무어라 하기도 전에 신승이 버럭 화를 냈다.
“아니 그럼 어쩌란 말이냐? 갑자기 네가 검성의 후계자라는 소문이 강호 무림에 자자하다는데, 그게 누구냐고 무림맹이 난리가 났단 말이다.”
‘헉.’
운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에서 자신을 검성의 후계자로 착각하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몇 사람의 착각이나 어림짐작일 뿐이라고 여겼다.
북해빙궁의 소궁주나 무림맹 지객당의 변기량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소문이 강호 무림에 파다하다니?
“그 소문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얼마나 날 들들 볶는지, 가만히 있다가는 제명에 못 죽게 생겼더라. 그래서 알려 줬다. 그게 잘못이냐?”
억울하다는 신승의 항변에 운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제가 검성의 후계자라고 말씀하셨단 말입니까?”
“그런 말은 안 했다.”
신승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소문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묻기에 그냥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라고만 말했을 뿐이지.”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곧 운현이 검성의 후계자라고 인정한 셈 아닌가?
하지만 신승은 당당했다.
“그래도 소문의 주인공이 너라는 건 사실 아니냐? 그러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난 거짓말은 못 하거든.”
확실히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진실을 절반만 말한다면 그건 사실상 상대를 속이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면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도 말씀해 주셨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운현의 항변은 정당했다. 그러나 신승에겐 아니었다.
“내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