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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14화 (114/530)
  • 114화. 불청객

    무림맹의 이른 새벽.

    언제나처럼 빈터에 도착한 운현은 혹시나 누가 있을까 싶어 주변을 살폈다.

    최근 몇 달간 매일같이 드나들던 곳이지만 운현은 처음 왔을 때처럼 꼼꼼하게 사방을 살폈다.

    ‘휴우, 아무도 없구나.’

    자기 혼자뿐임을 확인한 운현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적하던 이곳에 갑작스레 손님들이 찾아온 것이 불과 며칠 전이다.

    혹시라도 그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질까 봐 운현은 내심 불안했다.

    간신히 얻은 이 작은 피난처마저 잃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을 듯했다. 운현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후우우.”

    주변을 확인한 운현은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친근한 목검 한 자루가 운현의 마음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호흡이 채 지나기도 전이었다.

    슥.

    운현은 천천히 손을 내밀어 보이지 않는 검 한 자루를 그러쥐었다.

    웅.

    부드러운 긴장감이 온몸 가득히 퍼져나갔다.

    도도하게 흐르는 커다란 물결에 몸을 맡긴 듯한 부유감이 운현을 감싸 안았다.

    그 거대한 흐름에 운현은 자신의 마음을 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운현의 손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무검의 검무는 오늘도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운현이 문득 심상치 않은 예기를 느낀 것은 수련이 한창이던 어느 한순간이었다.

    가늘지만 강하게 피부를 자극해 오는 듯한 날카로운 기운.

    이전에 묵혈엽이 찾아왔을 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 기운에 운현은 즉시 수련을 멈췄다.

    탁.

    물 흐르듯 흐르던 검이 멈추고 구름 위를 노니던 운현의 발이 멈췄다.

    “왜 멈추었느냐?”

    묵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운현의 귀를 울렸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낯선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했다.

    ‘응?’

    그는 화려한 옷을 입은 중후한 인상의 사내였다.

    기름을 발라 빗어 넘긴 검은 머리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비단옷, 뒷짐을 지고 유유자적하게 서 있는 그 모습은 마치 황족이나 고관대작이 산책을 나온 듯했다.

    “어디, 마저 해 보려무나.”

    그는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운현은 오히려 긴장하고 있었다.

    상대는 결코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다.

    언뜻 중년인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처럼, 그의 미소 역시 결코 호의가 아님을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무림맹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외웠지만 저런 사람은 결단코 없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기세가 결코 검성이나 신승에 뒤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그 날카로운 기세가 운현의 피부를 저릿저릿하게 만들고 있을 정도였다.

    “왜? 하기 싫으냐?”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운현은 말했다.

    상대의 진의나 정체를 알 수 없다고 하여 무례하게 대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보잘것없는 재주라 대인께 결례가 될까 두렵습니다.”

    “허허허.”

    그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나를 아느냐?”

    “모릅니다.”

    “그럼 어찌 나를 대인이라 칭하느냐?”

    묻는 그의 눈동자는 사뭇 빛나고 있었다.

    기뻐하고 있으면서도 운현의 진의를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그 날카로운 기세 속에서 운현은 담담하게 답했다.

    “기운이 범상치 않으심을 보고 알았습니다.”

    “하하하.”

    그는 큰 소리로 웃었다.

    “기운이 범상치 않다라. 그러니까 네가 나를 평가했다는 것이로구나.”

    운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트집이자 노골적인 왜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저 트집으로 끝나지 않았다.

    후우욱.

    어마어마한 기세가 운현을 향해 쏟아졌다.

    ‘윽.’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런 운현을 향해 그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감히 너 따위가 나를 평가하다니,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

    유치한 시비였지만 이미 상관없었다.

    운현을 향해 쏟아지는 그의 기세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 자체를 의미 없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운현에게는 아니었다.

    “봄이 오면 천하 만물이 깨어나듯, 하늘의 징조는 모든 만물이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하늘은 결코 그것을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운현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이 당연한 이치거늘 어째서 대인께서는 화를 내는 것입니까?”

    훅.

    살갗을 찌르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운현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큭, 큭큭큭.”

    그것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노골적인 웃음이었다.

    하지만 운현은 이것이 그의 본성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혀를 잘 놀리는구나. 제법 배짱도 있고.”

    그는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사뭇 섬뜩해서 운현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상책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 또한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운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상대가 운현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야.”

    아니나 다를까? 그가 운현에게 말했다.

    “노부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

    그건 이미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운현은 정중하게 답했다.

    “맡은 바 소임이 있어 이곳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흥.”

    그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너를 데려간다고 하면 그 누가 감히 입을 열겠느냐? 너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그것은 논점을 벗어난 대답이었다.

    “신의는 다른 사람 이전에 자기 자신과 한 약속입니다.”

    운현은 그 점을 지적했다.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는다 해도 저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상대의 눈살이 와락 일그러졌다.

    대인 같던 풍모는 이미 사라지고 그는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깟 신의 때문에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그는 이미 귀를 닫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운현이 무어라 말하건 그는 자신의 결정을 바꾸지 않으리라.

    “대인께서 무어라 하시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은 말했다.

    “저는 제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것은 유형의 기운이 되어 폭풍처럼 주변에 휘몰아쳤다.

    콰과과곽.

    “네까짓 게 감히.”

    으드득.

    이를 갈며 그가 말했다.

    “나 염중부의 말을 무시해?”

    운현의 옷자락이 휘날리고 사방에 흙먼지가 일었다.

    스스로 염중부라 칭한 그는 운현을 향해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 생각하신다면.”

    운현은 염중부를 향해 말했다.

    “그런 것이겠지요.”

    그 말은 염중부의 분노를 단번에 폭발시킬 것 같았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후욱.

    폭풍처럼 몰아치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분노에 날뛸 것 같던 염중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운현을 보았다.

    마치 운현의 숨은 진의라도 탐색하는 것처럼.

    “……너는 누구냐?”

    염중부가 물었다.

    “무엇을 믿고 그리 오만한 것이냐? 혹시…….”

    눈살을 찌푸리는 그를 보며 운현은 내심 감탄했다.

    ‘설마 그 분노조차 진심이 아니었단 말인가?’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결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염중부의 말에 운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운현이냐?”

    운현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염중부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군. 네가 바로 운현이구나. 검성의 후계자, 운현!”

    염중부는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마치 운현의 숨은 약점이라도 폭로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닙니다.”

    운현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저는 검성의 후계자가 아닙니다.”

    “흥.”

    그러나 염중부는 더 이상 운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말장난은 필요 없다.”

    차가운 눈빛으로 염중부는 말했다.

    “나와 함께 가든가, 아니면…….”

    순간 운현은 흠칫했다.

    뒷짐을 진 염중부에게서 더없이 날카롭고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이곳에서 죽어라.”

    쉬익.

    염중부의 목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기운이 그의 등 뒤에서 쏟아져 나왔다.

    마치 섬뜩한 두 개의 독니처럼 그것은 운현을 향해 사정없이 짓쳐 들었다.

    ‘웃.’

    그 순간 운현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운현은 믿기로 결정했다.

    지금 자신을 향해 짓쳐 드는 또 다른 기운을.

    콰과곽.

    운현과 염중부의 사이, 그곳에 폭풍 같은 기세가 덮쳐들었다.

    콰아아아아.

    그것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운현과 염중부의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염중부의 기세조차 그 힘에 저항하지 못했다.

    날카로운 두 개의 독니 같던 염중부의 공세는, 거대한 파도처럼 휘몰아친 기세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파라라락.

    운현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흙먼지가 휘날렸다.

    폭풍에 휘말린 듯 펄럭거리던 옷자락이 찢어졌지만 운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백보신권!”

    염중부의 외침이 들렸다.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헐헐헐.”

    천연덕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사방을 휩쓸어가던 기세가 가라앉았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새벽부터 남의 집 뒤에서 시끄럽게 구나 했더니…….”

    낡아빠진 승복을 입은 신승 불영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염가, 바로 너였구나.”

    “흥.”

    염중부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가 긴장하고 있음은 운현도 알 수 있었다.

    “네가 나타날 줄 알았다.”

    촤락.

    염중부가 뒷짐을 펴는 것과 동시에 시뻘건 채찍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붉은 채찍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본능적인 혐오감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애꿎은 사람에게 쌍두독아를 날리더니 갑자기 사편은 왜 꺼내 들어? 뭐라도 잘못 먹었냐?”

    ‘쌍두독아?’

    운현은 쌍두독아가 자신을 향해 짓쳐들던 그 두 개의 기운이라는 것을 알았다.

    뱀 채찍이라는 뜻의 사편은 아마도 저 붉은 채찍을 일컫는 이름이리라.

    “잘못 먹은 것은 불영 바로 네놈이겠지.”

    염중부는 이를 갈며 말했다.

    “내가?”

    신승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딱히 잘못 먹을 만한 건 없는데?”

    “아니, 있다.”

    염중부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 기억나게 해 주마.”

    그 말과 동시에 염중부의 빈손이 슬쩍 움직였다.

    그리고 운현은 그의 손끝에서 엄청난 기운이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운현 자신을 향해 날아들던 이전의 기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것이었다.

    투두둥.

    활줄을 퉁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 줄기의 기운이 염중부의 손에서 터져 나왔다.

    방금 전 운현을 향해 쏘아졌던, 그러나 그보다 한층 더 강력한 기세를 머금은 쌍두독아였다.

    “끌끌, 자네의 그 급한 성격은…….”

    후웅

    신승의 몸이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신승을 향해 짓쳐들던 두 개의 기운은 곧 기이하게 방향을 틀며 각각 두 개로 분열되었다.

    “어째 아직도 변하질 않았누?”

    피피피핑.

    느긋한 신승의 목소리 속에 네 개의 작은 파공음이 섞여 나왔다.

    신승을 향해 덮쳐가던 네 개의 기운은 촛불 꺼지듯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훅.

    “그러는 네놈의 금강지 역시.”

    감탄하는 염중부의 목소리는 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느새 허공으로 떠오른 염중부의 손에서 붉은 채찍이 기이하게 꿈틀거렸다.

    “조금도 나아진 게 없구나!”

    쉬리릭.

    염중부의 붉은 채찍이 허공을 유영하며 신승을 향해 짓쳐 들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 기묘하게 꿈틀거리는 염중부의 붉은 뱀은 불규칙적인 궤적을 그리며 신승의 목덜미를 노리고 쏘아졌다.

    ‘앗!’

    운현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당장이라도 그 붉은 뱀이 신승의 목덜미를 깨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승은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슥.

    산책이라도 하듯 신승은 느긋하게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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