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13화 (113/530)

113화. 기각

무림맹 대의사청.

거대 문파의 대표자들이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번 회의의 가장 큰 안건은 지난번 결정한 무림맹 지부 확장이었다.

이미 대표자들이 합의했지만 최종안에 대한 각 문파의 공식 승인이 이제야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 대표자 회의는 이전과 달리 논쟁도, 격렬한 이해 충돌도 일어나지 않는 다분히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이로써 무림맹의 지부 확장안이 공식 승인되었습니다.”

제갈연은 사뭇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음은 대표자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 무림맹은 단순한 문파 협의체를 넘어 강호 무림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 조직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천하제일맹의 탄생이다.’

제갈연이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미 무림맹에 맞설 세력은 강호 무림에 없다.

여기에 더해 무림맹의 지부가 천하 각처에 자리를 잡는다면 무림맹은 강호 무림과 연관된 거의 모든 이권에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된다.

말 그대로 강호 무림을 한 손에 쥔 천하제일맹이 탄생되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내부 경쟁은 계속되겠지만.’

황실에 암투가 끊이지 않는 것은 그곳에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무림맹에 부와 권력, 명예가 쏟아져 들어오면 내부 경쟁은 더욱 치열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제갈연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기는 것은 우리 제갈세가가 될 것이다.’

무림맹이 천하를 아우른다면 그 무림맹은 바로 제갈세가가 좌우하게 될 것이다.

제갈연은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대의사청에 앉아 있는 다른 대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다음 안건은.”

감회에서 깨어난 제갈연은 탁자에 놓인 다음 안건을 흘깃 쳐다보았다.

순간 제갈연의 눈빛이 살짝 굳어졌지만, 생각에 잠겨 있던 대부분의 대표자들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당문이 발의한 ‘후계자’의 처분에 대한 것입니다.”

‘검성’이라는 단어를 생략한 것은 검성의 이름이 가지는 무게감을 배제하기 위한 의도였다.

제갈연은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결의에 앞서 의견이 있으신 분은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사락.

하얀 손이 올라갔다.

당문의 눈꽃, 당설련이었다.

“먼저 말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당설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매력적인 눈빛으로 대표자들을 향해 말했다.

“제 뜻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아요.”

낭랑한 당설련의 목소리는 넓은 대의사청에 울려 퍼졌다.

“‘그’가 맹에 들어온 지도 이미 여러 날이 지났어요. 그동안 그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는 분은 없겠지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당설련은 잠깐 말을 끊었다.

그리고 요염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어요.”

‘그건 억지로군.’

제갈연은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신입 서기로 들어온 사람에게 서기의 직무 외에 무엇을 더 바란단 말인가?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

그러나 그는 서기이기 이전에 ‘검성의 후계자’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 역시 옳았다.

서기와 ‘검성의 후계자’는 분명 다르니까.

“오늘, 우리 무림맹은 명실공히 천하를 아우르는 거대 조직이 되었어요. 이제 강호 무림에는 오직 무림맹의 깃발만이 나부끼게 되겠지요.”

당설련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 새로운 무림맹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예컨대 쓸모없고 오래된 자들은 쳐 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제갈연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지금 검성의 후계자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신승을 쫓아내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대표자분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겠어요.”

가볍게 예를 표하고 당설련은 자리에 앉았다.

사락.

자리에 앉은 당설련은 미소 지었다.

자신의 말에 대표자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보았다.

‘좋아. 이 정도면…….’

새로운 무림맹, 그리고 오래되고 쓸모없는 자들.

그 둘을 대비시킨 것은 제법 효과적이었다.

아마도 대표자들 대부분이 당설련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으리라.

‘노려볼 만하겠어.’

사실 그녀조차 오늘 이 안건이 통과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신승은 여전히 건재하고 대표자들은 당문의 진의를 의심하고 있다.

그러니 대표자들이 이 안건에 동의할 확률은 매우 낮았다.

‘하지만.’

당설련이 노리는 것은 그 이후다.

‘눈이 쌓이다 보면 큰 가지라도 부러지는 법이니까.’

검성의 후계자가 축출되지는 않는다 해도 신승에 대한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분위기는 확실히 형성된다.

신승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이런 일들이 계속 쌓이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신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것도 가능하리라.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눈이라도 계속해서 쌓이면 오래된 거목조차 쓰러뜨리는 법이니까.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당설련은 생각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되는걸?’

검성의 후계자와 신승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쏟아질 것을 당설련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슥.

커다란 손이 올라갔다.

흑도회의 대표자 열혈도 묵혈엽이었다.

“그런 문제를.”

묵혈엽은 제갈연의 말을 기다리지 않은 채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굳이 우리가 먼저 건드릴 필요가 있겠소?”

‘뭐?’

당설련의 고운 눈썹이 꿈틀 일그러졌다.

묵혈엽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지금도 아무 문제는 없소. 그러니 나는 이대로 지난번 합의를 유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오.”

흑도회는 무림맹 내 사파의 중심 문파 중 하나다.

정파로 알려진 검성, 그리고 그 후계자에 대해 누구보다 적대감을 느껴야 할 그가 이대로 그냥 넘어가자고 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이지?’

당설련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묵혈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묵혈엽은 커다란 몸을 의자에 기대고 팔짱까지 낀 채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다른 사파 문파들에게 보내는 분명한 의사 표현이기도 했다.

사파 문파들 사이에서 잠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러나 더 이상 발언을 요청하는 대표자는 없었다.

당설련이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동의합니다.”

사무적인 목소리가 대의사청에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제갈세가의 대표자 제갈연이었다.

당설련은 놀라움을 숨기지 않은 채 제갈연을 노려보았다.

제갈연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중대한 시기에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므로 나는 지난 합의를 유지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불필요한 소란이라고 말했지만 제갈연의 생각은 그보다 더 단호했다.

‘그를 무림맹 밖으로 나가게 해선 절대 안 된다.’

제갈연은 굳은 표정으로 생각했다.

‘그건 감당 못 할 맹수를 들판에 풀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검성의 후계자가 무림맹에서 축출되면 어떻게 될까?

당장에야 신승의 권위에 흠집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다.

무림맹 소속이 아니게 된 ‘검성의 후계자’는 거대 문파들, 예를 들어 제갈세가에 찾아와 가주에게 공식적인 비무를 신청할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누구도 그 비무를 거절할 수 없다.

거절하는 순간 가주는 비겁자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고 제갈세가의 명성은 땅에 나뒹굴게 될 테니까.

그렇다고 비무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절대로 불가하다.

비록 제갈연의 가주에 대한 믿음은 굳건하지만, ‘검성의 후계자’를 상대로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 제갈세가가 아니더라도…….’

강호 무림에 내로라하는 문파들은 많다.

검성의 후계자가 이름난 문파의 문주나 가주들을 꺾고 이름을 얻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금방이다.

쓸 만한 모사 한 명만 더해지면 검성의 후계자는 즉시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검성’이라는 이름은 그만한 영향력을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만의 하나 신승까지 검성의 후계자에 가세한다면 무림맹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제갈연은 문득 몸을 떨었다.

‘그야말로 악몽이라 아니할 수 없군.’

최악의 악몽이다.

그러니 절대 그를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림맹의 핵심 요직에 둘 수도 없다.

‘불가근 불가원.’

그것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그리고 유일하게 가능성 있는 해결책이었다.

제갈연이 그렇게 자신의 뜻을 다지고 있는 동안, 당문의 눈꽃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득.

대세가 기울었음을, 아니 이미 결정되었음을 당설련은 알 수 있었다.

흑도회와 제갈세가가 저렇게 나오는데 신승에 대한 규탄이나 비판적인 말이 나올 수가 없다.

게다가 제갈연은 당설련의 제안이야말로 불필요한 소란이라고 역습을 가했다.

‘당했네.’

자신의 의도가 실패했음을 당설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대체 어떻게 저 두 사람이…….’

당설련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묵혈엽과 제갈연을 바라보았다.

이해득실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것이야 무림맹에선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러나 흑도회와 제갈세가가 의견을 같이 하는 건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당설련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 제갈연과 묵혈엽은 당설련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쯧.’

‘으음.’

묵혈엽은 속으로 혀를 차고 제갈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다음에 떠올린 내용은 똑같았다.

‘저들은 이미 알고 있었군.’

조금 전의 그 노골적인 반대는 결코 생각 없이 된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곧 서로가 ‘검성의 후계자’에 대한 진실에 다다랐음을 의미한다.

그 진실은 머지않아 다른 대표자들에게도 알려지게 될 것이다.

세상에 비밀은 없고, 무림맹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니까.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두는 게 유일한 해법이라니.’

제갈연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진실을 알게 된 다른 대표자들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가 서기로 있기 원한다면 서기로 두어야 한다.

비록 맹수를 품에 안은 셈이라지만 그렇다고 들에 풀어놓을 수는 없다.

나중에 그가 어떤 괴물이 되어 돌아올지 모르니까.

“그러면 당문의 제안은.”

당설련 쪽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 제갈연은 입을 열었다.

“이유가 없는 것으로 보아 기각하겠습니다.”

당설련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고 흑도회의 묵혈엽은 킁 하고 콧바람을 내뿜었다.

이로써 ‘그’를 축출하는 것도, 신승의 권위를 흔드는 시도도 무산되었다.

당설련이 패배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닐 테지.’

제갈연은 일그러진 당설련의 표정을 힐끗 쳐다보며 생각했다.

무림맹은 복마전이다.

비록 ‘그’의 검이 지극히 높다 해도 무림맹은 결코 그것만으로 헤쳐 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권력과 탐욕, 의심과 암계가 꿈틀거리는 이곳에서 검성의 후계자는 과연 어떤 모습이 되어 갈 것인가?

그것만은 제갈연조차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럼 이것으로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제갈연은 이의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서류를 챙겼다.

다른 대표자들 역시 무림맹 지부 설립 최종 승인안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지막에 잠깐 소란이 있었지만 이 회의의 핵심은 바로 무림맹의 변화였기 때문이다.

당설련은 불편한 안색으로 대표자들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내막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제갈세가와 흑도회는 검성의 후계자 운현을 건드리지 않기로 작정했다.

대체 무엇이 그런 결정을 하게 만든 것일까?

‘흥, 하지만 어차피…….’

예상과는 달라졌지만 상관없다.

당설련의 계획은 여전하고, 검성의 후계자는 곧 그녀의 시험을 맞닥뜨리게 될 테니까.

사락.

당설련은 서류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심코 고개를 들던 당설련의 고운 얼굴은 와락 일그러졌다.

매화검 영호준이 그녀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반할만한 매력적인 미소였지만 당설련의 찌푸린 눈썹은 펴질 줄을 몰랐다.

“흥.”

짧은 코웃음으로 영호준의 비아냥을 무시하고, 당설련은 빠르게 대의사청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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