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간극
묵혈엽 뒤에 서 있던 사제가 입을 벌리며 하품을 했다.
재미도 감동도 없는 저 느릿느릿한 수련을 바라본 지도 벌써 한참이 되었기 때문이다.
새벽 어스름도 걷히고 이젠 사방이 환하게 밝아올 정도였으니 그가 하품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제는 슬그머니 주위를 돌아보았다.
저런 모습을 보려고 대형이 여기까지 온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나타난 것도 아니다.
게다가 어디부터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저 검무는 도무지 마칠 줄을 모른다.
‘하아암.’
사제는 다시 하품을 했다.
‘대형은 대체 언제 돌아갈…….’
차마 재촉은 못하고 묵혈엽을 돌아보던 그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묵혈엽이 그 큰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눈만이 아니다. 팔짱을 끼고 있던 묵혈엽은 어느새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큰 손등과 굵은 팔에 핏줄이 툭툭 튀어나올 정도로 말이다.
“대, 대형…….”
놀란 사제가 자신도 모르게 묵혈엽을 불렀다.
그러나 묵혈엽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묵혈엽의 커다란 두 눈은 지금 자신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못 박혀 있었다.
우드득.
묵혈엽이 이를 갈았다.
‘젠장.’
후우웅.
무검의 칼날이 그의 눈앞에서 허공을 갈랐다.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묵혈엽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검이 자신을 향해 똑같이 휘둘러졌다면, 자신은 결코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젠장.’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극히 단순한 그 검로를 묵혈엽은 막을 자신이 없었다.
뻔히 보면서도 막지 못하고, 이미 알고 있음에도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검로.
단 한 걸음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은 운명과도 같은 간극.
‘나는…….’
무인으로서 살아온 묵혈엽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절대적인 간극이 지금 자신과 운현 사이에 그 무자비한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으드득.
묵혈엽은 인상을 구기며 이를 갈았다.
‘……저 검을 막지 못한다.’
그것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마주한, 패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인의 처절한 자기 인식이었다.
***
“내용이 문제가 아니었어.”
제갈연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은 한 획.
그 속에서 제갈연은 자신을 향해 날을 세운 검의 자취를 보았다.
첫 장에선 그리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뒷장으로 갈수록, 마치 시간에 쫓긴 듯 글씨를 흘려 썼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오는 한 자루 검의 자취가 있었다.
“허어.”
제갈연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랬군. 그래서…….”
그의 답안지를 보며 왜 기분이 나빴는지, 어째서 위기감을 느꼈는지 이제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절대로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벽.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그 압도적인 격차.
그리고 결코 다다르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
아주 오래전, 가주인 자신의 부친과 검을 마주했을 때 느낀 바로 그 감정을 제갈연은 오늘 다시 한번 마주한 것이다.
그것도 고작 종이에 쓰인 서체를 통해서 말이다.
슥.
제갈연은 습관적으로 찻잔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만 허탈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저 붓이 지나간 흔적에 불과할 뿐인데도…….’
그런데도 자신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만일 눈앞에 검성의 후계자가 서 있다면 자신은 그를 대적할 수 있을까?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 제갈연의 검은 과연 그를 막을 수 있을까?
아니, 움직일 수나 있을까?
제갈연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차마 떠올릴 수조차 없어서였다.
짹, 짹.
창밖에서 새들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집무실 밖은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지만, 제갈연의 마음은 여전히 새벽 안개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
짹, 짹.
아침이 밝았다.
묵혈엽의 사제는 흘깃 대형 묵혈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묵혈엽은 입술을 강하게 깨문 채 미동조차 없었다.
커다란 묵혈엽의 두 눈 역시, ‘신승 혹은 검성의 숨겨진 자식’이 펼치는 수련에 못 박힌 채다.
‘어떻게 된 거지?’
사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묵혈엽의 모습은 확실히 이상했다.
그들이 몇 번인가 조심스레 불러보았지만 묵혈엽은 대답조차 없었다.
평소 묵혈엽의 성격을 아는 사제들은 더 이상 묵혈엽을 자극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묵혈엽의 모습이 사뭇 예사롭지 않다.
‘아무래도 원인은 저건데…….’
사제는 고개를 돌려 ‘신승 혹은 검성의 숨겨진 자식’이 펼치는 수련을 바라보았다.
묵혈엽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분명 저 수련 때문이리라.
하지만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확인한 것처럼 말이다.
슥.
사제는 옆에 있는 다른 사형제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역시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후우.”
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락.
끊임없이 이어지던 검무가 멈췄다.
수련이 끝난 것이다.
사제는 속으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후우.”
깊은 탄식 같은 소리에 사제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대형 묵혈엽이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대형.”
사제가 조심스레 묵혈엽을 불렀다.
그러나 묵혈엽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심각하던 묵혈엽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 것은 사제들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운현 역시 가볍게 숨을 골랐다.
“후우.”
수련을 마친 상쾌함이 온몸에 차올랐다.
하지만 그 기분 좋은 느낌을 음미할 사이도 없이, 운현은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 가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운현을 고민하게 하는 상황은 불청객들 때문이었다.
‘저 사람은 분명히 흑도회 대표자인 열혈검 묵혈엽 대협이고.’
처음 보지만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그간 열심히 외워 둔 것들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다른 두 사람은 흑도회 무인들 같은데.’
무복이 비슷하니 아마 같은 흑도회일 것이다.
그들이 온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수련에 심취해 모든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수련이 끝나고 나니 참으로 어색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기껏 아무도 안 오는 곳을 부탁했더니…….’
아무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신승이 장담했던 곳이다.
그런데 불청객이 이렇듯 버젓이 세 명이나 찾아왔지 않은가?
‘아니, 세 명이 아니라…….’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운현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도 느끼긴 했으나 이것이 사람의 기척인 줄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운현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묵혈엽과 그 일행을 향했다.
‘예를 표하는 것이 모든 관계의 시작이지.’
선현의 현명한 말씀을 떠올리며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흑도회 대표자 묵혈엽과 그의 일행들을 향해.
슥.
묵혈엽의 사제는 수련을 마친 운현이 자신들을 향해 예를 표하는 것을 보았다.
그냥 무시하려던 사제들은 깜짝 놀랐다.
스륵.
자신들의 대형이자 흑도회의 무림맹 대표자인 묵혈엽이 그 예에 정중하게 답례를 한 것이다.
‘어?’
사제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묵혈엽은 예를 마치더니 사제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해?”
묵혈엽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인사 안 하냐?”
“아, 네.”
사제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대형의 명이다.
그들은 즉시 운현을 향해 손을 모으고 예를 표했다.
예기치 못한 인사에 운현 역시 조금 당황했지만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놀랍네.’
운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흑도회 대표자 묵혈엽이라면 거친 성격에 급한 성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운현이 보았던 책에서도 특별히 주의하라는 경고가 달려 있었을 정도였다.
‘생각보다 좋은 사람인 것 같군.’
역시 사람은 겉보기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운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예를 마쳤다.
하지만 그 이상 무엇이 있지는 않았다.
묵혈엽은 여전히 말이 없고, 인사를 마친 사제들은 묵혈엽의 눈치만 보고 있다.
운현은 혹시나 그가 무언가 말하지 않을까 싶어 잠시 기다렸다.
만일 왜 여기서 수련을 하냐고 묻는다면 신승의 이름이라도 팔 작정이었다.
하지만 묵혈엽은 그저 그대로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없었고 운현을 부르지도 않았다.
‘……가도 되나?’
운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수련도 마쳤으니 어서 돌아가야 했다.
운현은 이만 떠나겠다는 뜻으로 다시 한번 묵혈엽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묵혈엽 일행도 조금 엉성하기는 하지만 또 답례를 한다.
운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아.’
운현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지켜보던 시선은 묵혈엽과 그의 두 사제들만이 아니다.
모습을 감추었지만 내내 운현을 지켜보던 누군가의 시선 역시 있었다.
슥.
운현은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잠시 기다렸지만 그 누군가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는 이에게 예를 표할 필요는 없겠지.’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운현도 그저 무시할 뿐이다.
저벅, 저벅.
운현은 빠른 걸음으로 빈터를 떠났다.
묵혈엽은 운현이 사라질 때 까지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운현이 사라지자 묵혈엽은 깊은 탄식을 흘렸다.
“후우.”
묵혈엽의 긴장이 풀린 듯하자 사제들이 즉시 물었다.
“대형, 괜찮으십니까?”
“아니 왜 갑자기 말도 없으시고…….”
그러나 묵혈엽은 대답 대신 사제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희는……. 아니, 아니다.”
사제들의 반응을 보건대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묵혈엽이 본 것을 그들도 보았다면 지금처럼 태연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대형, 더 기다릴까요?”
사제 한 사람이 조심스레 묻는다.
“뭐? 왜?”
묵혈엽이 눈살을 찌푸리자 사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누구랑 부딪히실 거라고 아까…….”
“쯧.”
혀를 차는 묵혈엽 덕분에 사제는 말문이 막혔다.
“됐다.”
밑도 끝도 없이 묵혈엽은 그렇게 말했다.
“……가자.”
저벅.
사제들이 무어라 할 틈도 없이 묵혈엽은 몸을 돌렸다.
어리둥절한 사제들이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대형의 변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빨리 안 와?”
벌써 저만큼 앞서간 묵혈엽의 재촉에 사제들은 급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제들을 바라보던 묵혈엽은 그들 뒤편에 보이는 공터의 모습에 짜증 섞인 목소리로 짧게 혀를 찼다.
“쳇.”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당분간은 이곳 근처에도 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묵혈엽은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