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검흔(劍痕)
묵혈엽이 반문하자 사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소문입니다.”
“무슨 소문인데?”
“어, 그게…….”
사제는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신승이 속가 시절에 낳은 자식이 무림맹에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누군가는 검성의 자식이라고도 하고…….”
묵혈엽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이 이런 식으로 왜곡되어 소문으로 돌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그 자식이 신승을 뵈러 새벽마다 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린다는 소문입니다.”
말하던 사제는 조소를 머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무림맹에 있다 보면 별 괴상한……. 왜 그러십니까?”
사제는 말을 멈추고 묵혈엽을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험상궂은 묵혈엽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묵혈엽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설마 수련은 핑계고, 신승과 내통을 하고 있었던 건가?’
운현의 최근 동향을 모르는 대표자는 없다.
그것을 알기에 묵혈엽도 이 자리에 온 것이다.
검성의 후계자가 매일 새벽 수련을 한다는 바로 이곳에 말이다.
그런데 수련은 단지 핑계였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그래도 기개가 있는 놈이라 생각했더니…….’
무림맹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수련을 한다는 말에 잠시 가졌던 한 조각의 호감조차 사라지는 듯했다.
검성을 향한, 문파와 은원을 초월한 묵혈엽의 경의와 함께 말이다.
“가 보자.”
진짜 수련을 하는지는 직접 보면 알 일이다.
묵혈엽은 빈터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그의 행동은 사뭇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
***
묵혈엽과 그 사제들은 곧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어스름 속에서 누군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 진짜 있…….”
놀란 표정으로 말하던 사제는 묵혈엽이 노려보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턱.
묵혈엽은 더 이상 가까이 가지 않고 멈춰 섰다.
그리고 아예 팔짱을 낀 채 본격적인 관찰을 시작했다.
그저 지켜보는 것이지만, 묵혈엽의 커다란 체격과 굵은 팔뚝 그리고 큼직한 눈매는 누구라도 주눅이 들 정도였다.
사제들은 묵혈엽의 눈치를 살피며 새벽 어스름 사이로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을 살폈다.
그가 바로 소문의 ‘신승, 혹은 검성의 숨겨진 자식’이 분명했다.
사락, 탁.
그런 중에도 저 멀리 보이는 누군가는 여전히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는데, 그 모습이 사뭇 부드럽고 유연해서 언뜻 보면 춤이라도 연습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묵혈엽과 그의 사제들은 곧 그 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저거, 검법이군요.”
뒤에 서 있던 사제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제의 말처럼 그것은 분명 검법이었다.
검 없이 검법을 수련하는 건 사제들도 한 번쯤은 거쳐 온 수련법이다.
“그런데 좀…….”
말하던 사제가 눈살을 찌푸리고 옆에 있던 다른 사제가 말을 받았다.
“박력이 없는데요? 초식이 너무 부드러운 거 같습니다.”
그 말에 묵혈엽이 사제를 돌아보았다.
“초식이 보이냐?”
사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도 안 보이겠습니까?”
묵혈엽에겐 미치지 못하지만 두 사제 역시 뛰어난 무재(武才)다.
수련도 할 만큼 했고 경지 또한 그리 낮지 않으니, 검을 안 들었다고 검로를 못 보진 않는 것이다.
사제는 ‘신승 혹은 검성의 숨겨진 자식’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무 느립니다. 신법도 지나치게 단순한 것 같고……. 초보 같은데요?”
묵혈엽은 피식 웃었다.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면 상승의 경지에 들지 못한다.”
사제들을 내려다보며 묵혈엽은 엄한 어조로 말했다.
“무인의 승부가 어디 초식만으로 결정되더냐? 초식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 같은 검로라 해도 그 결과는 전혀 다른 법이다.”
사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같은 검법, 같은 초식인데도 스승과 대형의 검은 자신들과 너무나 다르지 않던가?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라. 그것을 볼 수 있게 되면, 너희도 손짓 하나만 보고서도 진짜 고수를 구별할 수 있게 될 거다.”
굳은 목소리로 묵혈엽은 말했다.
“그걸 모르면 뻔히 보이는데도 피하지 못하고,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으니까.”
사제들은 묵묵히 대형의 말을 되새겼다.
뻔히 보이는데도 피하지 못하고 알면서도 당하게 된다는 말의 뜻을 그들 역시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한 걸음에 불과한 것 같지만 결코 넘을 수 없는 절대적인 간극.
그것이 바로 진짜 고수와 그렇지 않은 자들을 가르는 벽이었다.
쉬익, 탁.
새벽 어스름 사이로 보이는 누군가의 수련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묵혈엽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동작은 부드럽지만 제법 기세가 있군.’
고수의 자취는 숨길 수 없다.
사제들은 박력이 없고 너무 부드럽다고 말했지만 묵혈엽은 알 수 있었다.
검성의 후계자, 신입 서기 운현이 펼치는 검의 기세는 깊은 물과 같았다.
조용하고 느리지만 커다란 강물처럼 결코 멈추지 않고 자신의 길을 따라 흐르고 있는 것이다.
저런 깊이와 무게는 하루 이틀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묵혈엽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찬가지야.’
태생적으로 묵혈엽은 저런 기세를 싫어했다.
차라리 불같이 타오르고 폭풍처럼 몰아칠지언정, 저런 느릿느릿하고 부드러운 기세는 묵혈엽의 성정과 절대 맞지 않는다.
어쨌거나 ‘아무것도 아닌 놈’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묵혈엽은 검성의 후계자, 신입 서기 운현이 그리는 무검의 검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제갈세가의 대표자 제갈연의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이른 새벽에 집무실에 나온 제갈연은 어젯밤에 보지 못했던 서류가 자신의 책상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스락.
책상에 놓인 것은 서류 뭉치 하나와 짤막한 서신이었다.
어제 일을 명했던 젊은 무사가 밤사이 경과 보고를 한 것이다.
‘서류 보관소를 밤새도록 뒤진 모양이군.’
제갈연이 명한 일은 신입 서기 운현의 답안 원본을 가져오는 일이다.
이미 한 달 넘게 지났고, 누구도 중요하다 여기지 않은 것인지라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 처박혀 있었을 서류 뭉치를 밤새도록 찾아 이렇게 가져온 젊은 무사의 일처리는 제갈연을 흡족하게 했다.
게다가 젊은 무사는 운현의 것만 아니라 상위 세 명의 답안도 함께 가져다 놓았다.
슥.
제갈연은 자리에 앉았다.
시녀가 미리 준비해 놓은 향긋한 차를 음미하며 제갈연은 서류 뭉치를 책상에 차례로 늘어놓았다.
“우선은…….”
먼저 확인할 것은 필사된 내용이 원본과 같은가 하는 것이다.
제갈연은 천천히 운현의 답안을 살펴보았다.
바스락.
차 한 잔이 식을 동안 제갈연은 운현의 답안을 읽었다.
그러나 대강 살펴본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다름이 없었다.
굳이 알게 된 것을 꼽자면 운현의 서체 정도다.
“명필이라고는 못 해도 제법 달필이군.”
문사들의 필체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물론 서체의 좋고 나쁜 정도는 있지만, 수십 년간 책을 읽고 글을 써 온 흔적만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제갈연은, 적어도 운현이 문사였다는 것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서기 시험에 합격했겠지.’
그것도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말하자면 장원으로 말이다.
제갈연은 문득 기분이 나빠졌다.
‘음. 왜 이러지?’
사락.
운현의 답안지를 내려놓은 제갈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격무의 후유증이라 생각하며 찻잔에 손을 뻗던 그는 차가 식은 것을 알아차리고 새로 잔을 채웠다.
부드러운 차향을 음미하며 제갈연은 창가로 다가갔다.
아직 새벽 어스름이 가시지 않은 무림맹의 모습을 바라보며 제갈연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그렇게 있자니 불쾌감이 사라졌다.
제갈연은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놓인 답안을 바라보았다.
‘문사라는 것도 사실인 듯하고, 심사 과정에서 특별한 외압도 없었던 것 같고…….’
그러나 그건 이미 알려져 있던 것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운현의 답안지에서 새롭게 찾아낸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제갈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왜 자꾸 신경이 쓰이지?’
별것 없으니 치우면 끝이다.
그러나 무언가 놓쳤다는 막연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알지 못할 불쾌감이 다시금 제갈연을 자극하고 있었다.
‘으음.’
젊은 무사의 일처리는 깔끔했다.
차도 평소 자신이 즐기던 것이었고 운현의 답안에도 이상한 점은 없다.
그런데 왜 이토록 기분이 나쁜 것일까?
‘아니, 이건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문득 제갈연은 깨달았다.
그건 일종의 위기감이었다.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는 막연한 충동이 자꾸만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제갈연은 굳은 표정으로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운현의 답안을 다시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바스락.
제갈연은 운현의 답안을 한 자 한 자 철저하게 살폈다.
혹시나 싶어 불빛에 비춰 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운현의 답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후우.”
바스락.
한숨을 쉬며 제갈연은 답안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이대로 치워 버리고 잊을까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위기감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것을 간과했다고 제갈연의 본능이 소리치고 있었다.
그것도 아까보다 더 큰 충동으로 말이다.
‘……피곤하군.’
문득 떠올린 생각에 제갈연은 피식 웃었다.
이제 막 업무를 시작한 새벽부터 피곤하다니, 우습지도 않았다.
근래 이어진 회의로 쌓였던 피로가 이제 몰려드는가 생각하며 제갈연은 찻잔을 들어 올려 입술로 가져갔다.
바로 그때였다.
무심코 던진 시선이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답안에 가 닿는 순간, 제갈연은 하마터면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웃!’
탁.
급하게 내려놓은 잔에서 찻물이 튀었지만 제갈연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놀란 눈으로 급히 답안을 집어 올렸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발견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이게…….”
바삭.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며 답안지가 소리를 냈다.
그러나 제갈연은 부릅뜬 눈으로 답안지를 뚫어질 듯 쳐다보다가 급하게 다른 답안지를 찾았다.
바스락, 바삭.
제갈연은 자신이 발견한 것이 다른 문장에도 있는지 찾아보았다.
답안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제갈연의 얼굴은 더욱 더 창백하게 변해 갔다.
“맙소사. 이건…….”
한 줄기 탄식이 기어이 제갈연의 입에서 흘러나오고야 말았다.
마침내 자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것 앞에서 제갈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거, 검흔(劍痕).”
수십 년간 책을 읽고 글을 써 온 문사의 필체를 숨길 수 없듯, 극의에 이른 무인의 손놀림도 결코 숨길 수 없다.
단정하고 빽빽한 운현의 답안.
그곳에서 제갈연이 발견한 것은 바로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는 한 자루의 검이었다.
오직 극의에 달한 고수의 손짓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날카로운 흔적.
바로 그 검흔이, 깊이 베인 상처처럼 묵빛 서체 위에 도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