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확인
운현에 대한 뒷조사가 평범한 수준에서 멈춘 것은 ‘불가근 불가원’ 원칙을 정했기 때문이다.
제갈연은 새삼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신분 내력은 그다지 특이한 것이 없지만…….”
운현은 일찍 부모를 여위었다.
친척이라고는 광주에서 작은 상단을 이끌고 있다는 숙부뿐이고, 출신 서원 역시 공식적인 기록 외에는 특별한 점이 없다.
하지만 수상한 것은 바로 황궁에서 지낸 십여 년이 넘는 기간이다.
“대체 여기서 뭘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황궁은 제아무리 무림맹이라 해도 결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운현이라는 이름은 수많은 과거 급제자의 명단 중 하나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래도 장원이라니, 위장이라면 너무 티가 나는군.”
제갈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시의 장원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분을 위장하려면 차라리 중간쯤 박혀 있는 이름을 사칭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학사로서 황궁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십수 년간 그 어떤 공식 기록에도 기록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바삭.
제갈연은 마지막 서류를 들었다.
그곳에는 신입 서기 선발 시험에서 운현이 적어 낸 답안이 필사되어 있었다.
“음.”
운현이 작성한 무공 기본형에 관한 서술을 읽으며 제갈연은 문득 그의 무공에 대한 정보가 이것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뭐, 어쨌건 검을 쓰기는 할 것 같고…….”
검성의 후계자이니 검을 쓸 것이다.
사실 가장 확실한 것은 그와 검을 나눠 보는 것이지만 함부로 비무를 신청할 수는 없다.
상대는 검성의 후계자이자 신승의 확인을 받은 자다.
그에게 비무를 신청하는 순간 전 강호 무림의 주목을 받을 것이 뻔하고, 그 결과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문파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될 테니까.
“답안이야 훌륭한데…….”
제갈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예전에도 느꼈던 것이지만 답안은 훌륭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기본형에 대한 것이다.
아무리 검성의 후계자가 썼다고 해도 기본형이 무슨 절세 비급으로 둔갑할 리는 없다.
‘너무 기본형에만 충실하게 써서 그런가?’
깨달음이 깊어지고 내공이 중후해지면 기초적인 초식으로도 상승의 검법을 꺾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초적인 초식을 글로 옮겨 놓는다면 기존의 것들과 그다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펼쳐 내는 사람이 잘해서 그런 것이지 초식 자체가 엄청난 것은 아니니까.
톡, 톡.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제갈연은 문득 목이 말랐다.
습관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찻주전자는 어느새 비어 있었다.
제갈연은 바깥을 향해 말했다.
“밖에 누가 있나?”
사락.
“부르셨습니까?”
문이 열리고 제갈가의 젊은 무사 한 명이 예를 표했다.
“시비에게 차를 들이라 이르게. 그리고 서기부에 가서 신입 서기 운현에 대한 서류를 받아오고.”
젊은 무사의 얼굴에 의아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것이라면 일전에 이미…….”
“그것 말고.”
제갈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작성한 답안의 원본을 가져오게.”
“원본 말입니까?”
“그래.”
제갈연은 입이 마른 듯 살짝 혀로 입술을 축인 후 말했다.
“어쩌면 다른 누군가가 벌써……. 아니, 그렇지는 않겠군. 어쨌든 다녀오게.”
“네.”
젊은 무사는 절도 있게 예를 표한 후 집무실을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제갈연은 또 다른 아쉬움을 느꼈다.
‘직계라면 좋았을 것을.’
젊은 무사는 제갈세가의 방계에 속한 자였다.
총명하고 실력도 있으니 앞날이 밝다 할 수 있었지만 결코 세가의 핵심 중직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니까.’
사실 진짜 문제는 핏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제갈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판단보다는 가문의 결정이 우선이다. 그래서 제갈연은 그를 중용하면서도 결코 기밀 사항은 알려 주지 않았다.
지금도 그 젊은 무사는 운현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운현이 누구이며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지 말이다.
달그락.
따뜻한 차가 나오고 제갈연은 고풍스러운 찻잔을 들어 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검성의 후계자라…….’
지금도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신승을 흔드는 것은 결코 섣불리 시도할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당문의 손에 놀아날 위험까지 고려하면 이대로 유지하는 것이 제일 현명한 선택이다.
슥.
제갈연은 슬쩍 시선을 돌려 또 다른 서류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가려 있지만 그 서류에는 최근 운현의 행적에 대한 보고가 적혀 있었다.
신입 서기 훈련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있는 것과 새벽마다 와룡헌 뒤편 빈터에서 수련을 하는 것도 말이다.
‘새벽마다 수련이라니, 무림맹은 안중에도 없다는 건가?’
수련은 문파의 기밀이자, 함부로 훔쳐보다가는 목숨을 빼앗겨도 할 말이 없는 금기다.
그런데 운현은 각 파의 대표자들이 있는 무림맹에서 새벽마다 수련을 한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곳이라 해도 참으로 대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언제든 덤벼 보라며 도발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도발에 걸려들 사람은 없겠지만. 아니지, 혹시…….’
어쩌면 도발이 아니라 운현 역시 검성처럼 검에 미쳐 있는, 강호 무림의 금기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부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욱 문제다.
검성과 같은 부류라면 결코 적당히라는 걸 모를 테니, 뒷일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상대의 목숨을 거둘지도 모른다.
검성이 북해에서 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신승의 후원을 받는 것도 분명하고.’
제갈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운현이 수련을 하는 곳은 와룡헌 뒤편의 빈터다.
무림맹 대표자들도 감히 범접할 엄두를 못 내는 그곳을 허락한다는 건 신승이 운현에게 파격적인 배려를 해 준다는 증거다.
“흐음.”
제갈연은 찻잔을 든 채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쩐지 오늘따라 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제갈연은 수하가 가져올 운현의 답안 원본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제갈연은 운현의 답안 원본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럴 만도 했다.
신입 서기 시험이 끝난 지 이미 한 달 이상 지난 데다,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들이라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제갈연의 업무는 다음 날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새벽, 어둠 속에 잠긴 무림맹 건물들 사이로 발길을 옮기는 몇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가장 앞선 건장한 체격의 사내는 힘차게 발을 옮기고 있었지만, 뒤따르는 다른 두 사람은 마지못한 듯 발걸음이 축축 처지기만 했다.
“대형.”
뒤따르는 두 사람 중 한 명이 불렀지만 건장한 체격의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대혀엉.”
늘어지는 목소리에 앞서가던 사내가 드디어 걸음을 멈췄다.
“이놈들, 대체 어젯밤에 뭘 했기에 이처럼 빌빌대는 거냐? 어서 따라오지 못해?”
인상을 쓰는 그는 바로 흑도회의 대표자 묵혈엽이었다.
거친 인상과 달리 묵혈엽은 인망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
수하들을 아랫사람 이전에 자신의 사형제로 대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었지만 흑도회 조직이 커진 지금은 사뭇 찾아보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소수의 제자들이 형제애로 뭉쳐 있던 문파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으니까.
“아이고 대형. 꼭두새벽부터 사람을 깨워 놓고 그게 무슨 소립니까? 차라리 밤을 새면 모를까, 한참 자는데 억지로 일어나면 더 피곤한 법이란 말입니다.”
뒤따르던 사내는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역시 투덜거리곤 있었지만 묵혈엽에 대해서는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성질도 화났을 때 콱 쏟아 내야지, 성질내다가 말면 더 부글부글 끓지 않습니까?”
그것은 열혈도라 불리는 묵혈엽에게는 공감할 수밖에 없는 비유였다.
“그거야 그렇지만…….”
열혈도 묵혈엽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길지 않았다.
“어쨌든 시끄럽다. 빨리 따라오기나 해.”
묵혈엽은 몸을 휙 돌리고는 다시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숨을 쉬며 뒤따르던 사내들 중 또 다른 사내가 물었다.
“그런데 대형. 대체 이 새벽에 와룡헌에는 왜 가시는 겁니까?”
묵혈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자 두 사내는 나름대로 추측을 시작했다.
“혹시 와룡헌에 몰래 숨어 들어갈 생각은 아니시겠죠?”
“설마 그럴 리가. 와룡헌에 무슨 절세미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대형이 담을 넘겠어?”
“모르지요. 그사이 대형 취향이 변했을지도.”
침묵을 지키던 묵혈엽도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탁.
묵혈엽은 발걸음을 멈추고 사제들을 향해 인상을 썼다.
“계속 그렇게 떠들 거냐?”
뒤따르던 사내들이 찔끔했다.
하지만 입은 다물지 않았다.
“그럼 와룡헌에는 왜 가시는 겁니까?”
묵혈엽은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사형제들의 뒷말이 끊이지 않을 것 같기에,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부딪히러 간다. 너희는 보기만 해.”
두 사형제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묵혈엽의 성격상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다.
“신승입니까?”
“아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묵혈엽은 눈살을 찌푸렸다.
“보면 안다.”
두 사형제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일단 신승이 아니라니 안심이 되지만, 대체 누가 이토록 사형의 관심을 끌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기…….”
“소위 정파라 하는 것들은 지금쯤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묵혈엽은 조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허나 무인은 자신의 칼로 말하는 법이다. 상대를 알고자 한다면 직접 부딪히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묵혈엽은 사뭇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그야 그렇습니다만.”
두 사형제는 묵혈엽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래서 상대는 누구입니까?”
“으음.”
묵혈엽은 말문이 막혔다.
상대가 신입 서기라고 말하면 사제들이 믿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검성의 후계자라는 것은 대표자 급에만 알려진 기밀 사항이다.
침묵하던 묵혈엽은 결국 말없이 몸을 홱 돌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사제들에게 자신의 싸움을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그들에겐 큰 경험이 될 테니까.
“대형이 왜 저러시지?”
하지만 그 의도를 모르는 사제들은 대답 없는 묵혈엽의 행동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사제들은 서로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하고 묵혈엽의 뒤를 따랐다.
덕분에 그들은 묵혈엽이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감히 검성의 후계를 자처한 주제에 정말로 별것 아니라면…….”
검성은 굳이 따지자면 정파로 분류된다.
그러나 검성을 경외하는 무인들은 정사를 막론하고 어디에나 있었다.
그의 절대적인 강함은 모든 무인들의 꿈이자 동경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묵혈엽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검성 때문에 문파의 이익을 희생하지는 않겠지만, 자격 없는 자가 검성의 이름을 더럽힌다면 그 누구보다 먼저 분노할 사람이 바로 묵혈엽이었다.
“다음 회의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오늘 박살을 내 주고 말겠다.”
왠지 재수 없게 생겼을 것 같은, 아직 보지도 못한 검성의 후계자를 떠올리며 묵혈엽은 주먹을 불끈 거머쥐었다.
흑도회의 열혈도 묵혈엽이야말로 뼛속까지 무인인 사내였다.
묵혈엽과 그 사제들은 곧 와룡헌에 도착했다.
사제들에겐 다행히도, 묵혈엽은 와룡헌으로 들어가지 않고 뒤편으로 향했다.
멀찍이 와룡헌을 끼고 돌자 그들의 눈앞에 무림맹답지 않은 사뭇 한산한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도 이런 데가 있었군요?”
묵혈엽을 따라온 사제 중 한 명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너는 여기 처음이냐?”
묵혈엽의 물음에 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같은 사람들은 어디 이 근처에나 올 수 있겠습니까? 바로 지척에 와룡헌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의 말에 묵혈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이곳에 와 보긴 처음이니까.”
와룡헌이라면 모를까, 이곳에 올 이유 자체가 없다.
묵혈엽이 슬쩍 주변을 돌아보는데 다른 사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누가 새벽마다 왔다 갔다 한다던데…….”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