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09화 (109/530)

109화. 당설련의 제안

“이상이 최종안입니다. 이견이 있으십니까?”

무림맹 대의사청에서 제갈세가의 대표자 제갈연이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대표자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모두들 불만스러운 표정들이었지만 제갈연은 알고 있었다.

정말 불만이 있다면 저들이 이렇게 침묵을 지킬 리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무림맹 지부 확장은 최종안으로 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갈연의 선언으로 지난 몇 달간 지지부진 끌어 온 안건이 결정되었다.

사실 초안과 그리 다를 게 없었지만, 그사이 벌어진 논쟁과 줄다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른 안건이 있으십니까?”

제갈연이 대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림맹 대표자 회의에서 정해진 의장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제갈세가의 대표자가 회의를 이끌었다.

그것은 신승 시절부터 이어 온 관습이기도 했지만 다른 누가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림맹의 대표자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모두가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럼 이만 끝내기로…….”

“한 가지 제안이 있어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대의사청에 울려 퍼졌다.

제갈연은 목소리의 주인인 당설련을 향해 눈을 들었다.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검성의 후계자, 아니 검성의 후계자로 알려진 자를 무림맹에서 축출할 것을 건의합니다.”

당설련의 말투는 너무나 당당해서 한순간 제갈연이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축출이라 하셨소?”

“네.”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당설련은 말했다.

“그를 서기직에서 파직하고 쫓아내는 것이지요. 무림맹 밖으로 말예요.”

대의사청에 정적이 감돌았다.

대표자들은 당설련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고, 몇 사람은 나지막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합의가 된 것으로 압니다만.”

제갈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검성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 곧 가까이 하지도 멀리 하지도 않기로 이미 결정되었다.

이후 한 달 정도 시간이 지났다지만 상황이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새삼스레 다시 그를 거론하는 당문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당설련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쓸데도 없는 사람을 무림맹에 둘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특히 방금 정해진 지부 확장 최종안에 따르면.”

바스락.

무림맹 지부 확장 최종안을 넘기며 당설련이 말을 이었다.

“공교롭게도 서기가 몇 명 남게 되는군요.”

제갈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서기가 몇명 남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대표자 회의에서 다룰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앞에 말한 내용이다.

‘쓸데없는 사람이라니, 혹시 당문에서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낸 것일까?’

제갈연은 잠시 고민했다.

‘……아니면 그저 신승을 흔들어 보려는 것인지도.’

신승이 확인한 검성의 후계자를 축출한다는 건 신승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다.

당설련의 제안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아냈기 때문인지, 아니면 무림맹 대표자 회의를 이용하여 신승을 흔들어 보려는 의도인지 제갈연은 확신할 수 없었다.

스윽.

제갈연은 다른 대표자들을 살펴보았다.

그들 역시 제갈연의 생각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하긴 그렇겠지. 상대가 다름 아닌 신승이니…….’

제갈연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수십 년간 무림맹을 지켜 온 이름, 신승 불영 대사.

그 이름은 무림맹의 기둥이자 동시에 무림맹에 드리운 두터운 장막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언젠가 그 장막을 거둬 버리고 자신들의 천하를 이루고 싶은 갈망은, 어느 문파에게나 동일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신승을 축출하거나 적대할 필요는 없었다.

‘세월이 지나 세대가 바뀌면 자연히 그리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신승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와룡헌에 숨었으나 그의 이름은 오히려 신화가 되어갔다.

그리고 대표자들이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사이 검성의 후계자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신승과 검성의 후광을 동시에 두르고서 말이다.

‘신승의 확인을 받은 검성의 후계자라…….’

운현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제갈연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신승의 명성과 싸우는 것은 마치 안개와 다투는 것 같아서 실체가 없다.

그러나 신승이 확인해 준 검성의 후계자, 운현이라면 다르다.

‘그가 정말 쓸데없는 사람이라면, 아니 단지 신승과 검성의 후광을 두른 후기지수 정도의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신성불가침에 가까운 신승의 이름에 흠집을 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무림맹의 세대교체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모든 거대 문파들, 대표자들이 한결같이 바라는 그들의 세상 말이다.

“으음.”

제갈연은 자신도 모르게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연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신승이 그처럼 허술하게 일을 처리했을까?’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신승이 확인한 검성의 후계자가 과연 ‘쓸데없는 사람’일까?

당문은 과연 무언가 확실한 것을 잡은 것일까, 아니면 이번에도 계략으로 다른 대표자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하던 제갈연은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대의사청이 말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제갈연조차 생각에 잠겨있으니, 다른 대표자들이야 오죽하랴?

신승을 뒤흔들 수 있다는 유혹과 당문의 암계일지 모른다는 의심 속에서 모두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당설련은 자신의 제안이 가져온 결과를 음미하듯 가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우.”

제갈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막 무어라 말하려 했을 때였다.

“당문의 제안에 대해 유보를 요청하오.”

묵직한 목소리가 제갈연보다 앞서 튀어나왔다. 말한 사람은 흑도회의 대표자 묵혈엽이었다.

‘유보’라 함은 다음 회의에서 논의하자는 뜻이다.

자신이 말하려던 것과 똑같은 제안에 제갈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대표자들을 돌아보았다.

“다른 의견이 있으십니까?”

다른 제안은 없었고 당설련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럼 당문의 제안은 다음 대표자 회의 때 논의하겠습니다.”

제갈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만 마치겠습니다.”

대부분의 대표자들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는 것을 확인한 후 제갈연은 지부 확장에 관한 최종안을 집어 들었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는 듯했다.

***

회의가 끝나고 대표자들은 하나 둘 대의사청을 떠났다.

그들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던 당문설화 당설련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한가한 모양이오? 늘 끝나자마자 자리를 뜨더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당설련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는 매화검께서도 오늘은 느긋하군요. 절대 마지막까지 남지 않던 분이 말예요.”

흐트러진 자세로 자리에 앉아 있던 매화검 영호준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아는지 되려 묻고 싶소만…….”

당설련은 피식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사락.

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대의사청을 떠나려 했다.

“정말 신승을 흔들어 보려는 거요?”

당설련이 발을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영호준을 바라보았다.

“매화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덜컹.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쎄?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하오. 다른 대표자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건 당연한 지적이었다. 그러나 당설련은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어요. 신승을 흔들 수 있을지 모른다는 유혹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니까.”

저벅, 저벅.

영호준은 서슴없이 당설련에게 다가왔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영호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문의 손에 놀아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 역시 가벼운 것은 아닐 텐데?”

잘생긴 영호준과 매력적인 당설련의 모습은 잘 어울리는 다정한 연인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에 담긴 기세는 사뭇 달랐다.

“그래요. 하지만 적어도 확인은 해 보려고 하겠지요.”

당설련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의 그 사랑스러운 서기님은 꽤나 귀찮게 될 테고 말예요.”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설련은 일전의 대화를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었다.

정작 ‘사랑에 빠진 것 같다’는 말은 그녀가 했지만 말이다.

“그것이 의미가 있소? 그저 귀찮게 될 정도라면…….”

“그리고 이 일로 인해 그가 좀 더 자신을 드러낸다면 그 또한 바라는 바지요.”

영호준의 말을 끊으며 당설련이 말을 이었다.

“애매하게 남아 계속 신경을 쓰게 만드는 것들은 질색이거든요. 이번 기회에 아예 무너져 준다면 더…….”

“하하하하.”

이번엔 영호준의 웃음이 당설련의 말을 끊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당설련에게 영호준은 웃으며 말했다.

“과연 그 서기님이 쉽게 무너질까? 나는 결코 아무에게나 반하지 않는다오.”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영호준은 말을 이었다.

“물론 무너진다면 그 나름대로 또 재미있겠지만.”

서기 운현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신승의 권위가 흔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결과 무림맹에 휘몰아칠 세대교체의 폭풍은 결코 ‘재미’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락.

영호준은 당설련에게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기대하겠소, 당문의 눈꽃.”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영호준은 말했다. 그리고 그대로 발을 옮겨 대의사청을 나섰다.

저벅, 저벅.

“기대해도 좋을 거예요.”

탁.

발을 멈춘 영호준이 고개를 돌렸다.

당설련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의 소중한 장난감을 망쳐 놓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자신이 있었으니까.”

사뭇 표독스러운 시선이었지만 영호준은 빙긋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저벅, 저벅.

영호준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당설련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매혹적인 눈동자에는 서슬 퍼런 독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

회의가 끝난 후, 제갈연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세가에 보고할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다.

무림맹 지부 확장에 대한 내용과 각 문파 대표자들의 반응,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득과 실을 기록하고 나서 그는 붓을 내려놓았다.

달칵.

찻잔을 든 제갈연은 잠시 숨을 돌렸다.

지부 확장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자 그는 자연스럽게 당설련의 제안을 떠올렸다.

‘역시.’

결론은 금방 나왔다.

‘이대로 놔두는 것이 좋아.’

그의 결론은 처음 제안한 대로 불가근 불가원이었다.

그쪽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데 구태여 이쪽에서 말썽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지금은 무림맹 내에서 제갈세가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이 중요한 시기였다.

제갈세가의 가주와 원로들의 뜻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말 신승을 흔들 수 있다면 다른 얘기지만…….’

확실히 그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하지만 제갈연은 여전히 당문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신승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비록 허허실실이 신승의 숱한 계책 중 하나라지만, 검성의 이름까지 걸린 일을 그리 허술하게 결정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제갈연은 중얼거렸다.

“확인해 보는 것 또한 나쁠 건 없지.”

슥.

제갈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에 정리해 둔 서류를 꺼냈다.

바로 신입 서기 운현에 대한 자료였다.

바스락.

제갈연은 천천히 서류를 읽었다.

대부분은 운현 자신이 적어낸 것과 간단한 사실관계를 확인한 정도였다.

‘역시 좀 더 파 보았어야 했나?’

제갈연은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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