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무림맹 지부 확장
빠득.
당설련의 붉은 입술 사이로 들린 거북한 소리는 영호준의 착각이 아니었다.
“어……, 그건 좀 과도한 억측 같소만.”
영호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승께서 무림맹의 주축이심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무림맹이 그분만의 것은 아니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우리야말로 무림맹의 정당한 후계자라 할 수…….”
“바로 그런 안일한 판단이.”
당설련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영호준의 말을 잘랐다.
“오늘 같은 사태를 불러온 거예요.”
달칵.
당설련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빛나는 눈동자로 영호준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래요. 무림맹은 바로 우리 것이에요. 그런데 그런 우리 앞에 신승이 또 다른 사람을 데려왔어요. 검성의 후계자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숨겨 놓은 자식을요.”
“으음.”
영호준은 신음을 흘렸다.
검성의 이름은 천지를 울린다. 그 후계자에 대해 신승이 나서서 확인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겨질 만큼.
그런데 만일 신승이 그 검성의 후계자를 무림맹의 주인으로 세우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무림맹을 세우고 정사대전을 끝낸 신승 불영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호 무림 곳곳에 살아 있다.
거대 문파의 원로나 수장 들은 과연 신승 불영의 결정을 끝까지 거부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그 결정을 받아들이는 대신 다른 이득을 취하려 들까?
그러므로 영호준은 당설련의 말을 그저 억측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순순히 납득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허나 그렇게 말하면 우리 또한 신승의 자식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신승께서 목숨을 걸고 일으키신 무림맹이 바로 우리들이니…….”
“그래서 증오한다고 말한 거예요.”
당설련의 눈빛은 단호했다.
“아버지라 알고, 그렇게 존중하던 이가 어느 날 갑자기 배다른 자식을 데려와서는 모든 것을 물려주려고 하는 셈이니 말예요.”
그건 너무나도 정확한 비유였다.
영호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래도 나는 역시 소저의 말이 지나친 억측이라 생각하오.”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당설련은 빙긋 웃었다.
“이제 무림맹은 둘로 갈라지게 될 테니까요. 신승의 뜻을 받아들이는 자와 반대하는 자로 말예요. 당신이 어느 쪽에 서게 될지, 아주 궁금한걸요?”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소저는 어쩔 작정이요?”
“나 말인가요?”
그녀의 반문에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지금 이야기로는 지금 당장이라도 서기부로 달려가서 그의 멱살을 잡을 것 같소만.”
당설련은 빙긋 웃었다.
“그런 천박한 짓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결국 비슷한 걸까요?”
“비슷하다면…….”
“확인해야겠지요.”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당설련이 말했다.
“그가 과연 검성의 후계자로서 어울리는 사람인지, 그리고 신승의 뜻을 이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말예요.”
영호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확인한단 말이오?”
“방법이야…….”
당설련은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많아요.”
영호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이상한 계략을 꾸미는 거라면…….”
당설련의 눈썹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를 어떻게 보는 거예요?”
진심으로 불쾌해 하는 그녀에게 영호준은 즉시 사과했다.
“아, 미안하오. 나는…….”
“상대를 계략으로 파멸시키는 건 나도 좋아하지만, 지금 확인해야 할 건 상대의 지략이 아니잖아요.”
영호준은 어색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역시나 그녀는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이다.
독과 암기, 그리고 잔혹한 독심으로 유명한 당문 말이다.
“기대해도 좋아요.”
당설련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에게 걸맞은 상대를 준비했으니까요. 검성의 후계자이자 신승의 뜻을 이을 자가 자신을 증명하기엔 더할 나위 없지요.”
영호준은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검성과 신승의 이름이 나온 이상 그에 비견될 상대는 그리 많지 않다.
바로 환우오천존이라 불리는 또 다른 세 사람이다.
“설마…….”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요.”
당설련은 영호준의 말을 끊었다.
바스락.
자리에서 일어난 당설련은 영호준을 내려다보았다.
“분위기에 취해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말았군요. 아, 그리고.”
빙긋 웃으며 당설련은 말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라도, 찻잔에 입도 대지 않는 건 너무한 것 아닌가요?”
영호준의 앞에 놓인 찻잔은 처음 그대로였다.
그저 향만을 음미했을 뿐, 영호준은 단 한 번도 차를 마시지 않았다.
“그건 나도 알지만 약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특히 당문의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오.”
당설련은 조소를 머금었다.
당문이라면 무조건 독을 의심하는 건 이미 익숙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영호준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사락.
당설련은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를 영호준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아, 물론…….”
영호준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소저가 나만을 위해 손수 준비해 준다면 설령 그것이 극독이라 해도 기꺼이 마시겠소만.”
당설련의 붉은 입술이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날은, 평생 오지 않아요.”
사박, 사박.
당설련은 걸음을 옮겨 전각을 떠났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도 영호준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석양이 항주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광경을 바라보며, 영호준은 가만히 당설련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
무림맹이 신입 서기를 선발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 한 달 동안, 신입 서기로 들어온 이들에게 주어진 일은 바로 낯선 용어와 이름 들을 외우는 일이었다.
물론 대부분 문사 출신인 이들에게 외우는 것 자체는 힘든 일이 아니다.
문제는 외워야 할 것들이 대단히 많았다는 점에 있었다.
“꼭 외워야 하는 건 아니다.”
선임 서기는 격무로 지쳐 보이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자존심에 죽고 사는 이들이다. 게다가 무림맹에 출입할 정도라면 그 명성과 자부심 또한 대단하지. 무림맹 서기라면서 그런 이들을 몰라본다면,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나도 누굴 원망할 수는 없을걸?”
무심한 듯한 그 말에 신입 서기들은 표정은 일제히 일그러졌다.
‘목이 달아난다’는 표현이 그저 수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의 명성이란 게 별것 아닐 때도 있지.”
한숨을 쉬며 선임 서기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은 되지 못해. 그걸 판단하는 건 칼 든 사람들이지, 우리 같은 서기들은 아니거든.”
말하자면 명확한 기준도 없는 데다 항변할 곳도 없다는 의미다.
신입 서기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문사였던 때와 크게 달라졌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학문을 하는 선비라 하여 자존심을 높이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그렇다고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야.”
선임 서기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무림맹 서기라는 이름만으로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너희를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 내가 무림맹 수석 서기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아내를 만나진 못했겠지.”
강호 무림에서 무림맹의 이름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지간한 중소 문파는 물론이고 각 성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세가라도 무림맹이라면 무조건 몸을 사린다.
그러니 어찌 보면 서기들은 무림맹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는 셈이었다.
“그러니 다들 열심히 외우도록.”
담담한 선임 서기의 말은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신입 서기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두터운 책자를 보며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외모를 설명한 용모파기조차 부실한, 그 끝없는 이름과 별호 들을 외우는 건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파 오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으아, 이거 죽겠구만.”
쉬는 시간이 되자 덩치 큰 안수재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예전에 과거를 준비하던 때도 이렇게 공부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진짜 죽을 지경인 사람은 바로 나요, 안 형.”
옆에 있던 조두식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도무지 돌아가 줘야 말이지. 지끈지끈하니 아주 죽을 맛이라오.”
“저녁마다 술을 그리 마셔 대니 머리가 안 아플 수가 있소?”
말끔하게 차려입은 편어두가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조두식은 넉살 좋게 말했다.
“어허, 모르시는 말씀. 그나마 마셔 주니 이 정도라도 돌아가는 거요. 그 얘기 못 들으셨소? 신승은 만취한 상태에서도 아홉 명과 구면쟁론을 했다지 않소? 그게 다 술의 힘이오, 술의 힘.”
신승 불영 대사가 괴승으로 불리던 시절, 그는 승려답지 않은 기행으로 유명했다.
그중 하나가 만취한 상태에서 아홉 명의 사람들과 벌인 구면쟁론이다.
신승 불영 대사는 한자리에서 아홉 명의 사람들과 한꺼번에 각각 아홉 개의 다른 주제를 가지고 논쟁을 했는데, 한 번도 논쟁의 주제를 놓치거나 착각한 적이 없었고 다음 날 새벽이 밝아올 무렵에는 아홉 명에게서 전부 항복 선언을 받아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다시 술을 찾았다고 하니 그가 괴승이라 불린 이유를 알 만했다.
“그거야 신승 같은 분들의 이야기 아니오? 우리 같은 사람은 어쨌든 열심히 해야…….”
“오호라, 그래서 편 형은 밤새도록 공부를 하는구려.”
조두식의 말에 편어두의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밤을 새워 공부를 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련만, 편어두는 황급히 변명을 했다.
“왜, 왜 나만 가지고 그러시오? 운 형은 꼭두새벽부터 나가서 몰래 공부를 한다던데…….”
갑자기 날아든 화살에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운현이 깜짝 놀랐다.
요즘 운현은 신승이 알려 준 빈터에서 새벽마다 수련을 하고 있었다.
운현에게는 단조롭고 힘든 신입 서기 생활에서 유일한 위안이자,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일을 편어두가 알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새벽마다? 무슨 일 있소, 운 형?”
커다란 체격의 안수재가 즉시 운현에게 묻는다.
운현은 당황했다. 아마도 그것은 예전 황궁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 받았던 경험 때문이리라.
“아니, 그게…….”
운현은 더듬거렸다. 그러자 조두식이 웃는 얼굴로 중재에 나섰다.
“자, 자. 그렇게 추궁하듯이 물어보면 운 형이 놀라지 않소?”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으며 조두식은 운현에게 말했다.
“딱히 따지려는 건 아니오. 우리는 그저 무슨 사정이라도 있나 싶어서…….”
운현은 그제야 궁금한 사람이 덩치 큰 안수재만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말하는 조두식은 물론, 이런 일에 유독 민감한 편어두도 운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새벽마다 나가는 건 이미 모두에게 알려진 일인 듯 했다.
“아, 저기 그게…….”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피어 올렸다.
“별것 아니오. 그저 생각도 좀 정리할 겸 산책 삼아……. 하, 하하.”
딱히 숨기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구태여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대로 말한다 해도 돌아올 반응이란 게 뻔했기 때문이다.
‘검도 없이 수련이라니, 틀림없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테지.’
대부분의 문사들은 무슨 일에든 대강 넘어가는 법이 없다.
검술 수련을 한다고 하면 틀림없이 이것저것 물어볼 터이고, 결국엔 사적인 이야기까지 하게 될 것이다.
운현이 이들을 친근히 여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그런 이야기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다면 자칫 수련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 가장 염려스러웠다.
당장 운현이 새벽에 나가는 것조차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 매사에 무심한 안수재는 제외였지만 말이다.
“아, 그런 거였구려.”
조두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납득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일단 넘어가자는 의미였다.
“그나저나 훈련 기간도 다 끝나 가는데 정식 배치는 언제 된답니까?”
무림맹 지부 확장을 위해 선발된 신입 서기들은 공식적으로 여전히 대기 상태였다.
누가 어느 지부로 갈지, 혹은 어느 부서에서 일하게 될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그거라면 벌써 다 끝났답니다.”
편어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상단에서 일했다던 그는 언제나 소문에 밝았다.
“벌써 끝났다고요?”
“나는 어디랍니까?”
안수재와 조두식이 즉시 반응을 보인다.
편어두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모르오. 그냥 대강 정해졌다는 이야기만 들었소.”
조두식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군. 정해졌으면 빨리 보내기나 할 것이지, 왜 이런 쓸데없는 일이나 시키는 건지.”
조두식은 앞에 놓인 서책들을 두드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사실 신입 서기들 모두가 느끼는 바였다.
선배 서기들은 오히려 지금이 좋은 때라고 하지만, 훈련이란 누구에게든 지루하고 힘든 법이니 말이다.
“뭐, 밥그릇 싸움 아니겠소?”
대답은 덩치 큰 안수재가 했다.
편어두가 눈살을 찌푸리고, 조두식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밥그릇 싸움이라니?”
“힘 있는 놈들이 꾸물대는 이유는 결국 하나요. 자기네끼리 밥그릇 싸움 하느라 결정을 못 하고 있는 거지. 그깟 지부 확장, 무림맹이 힘이 없어서 미루고 있겠소?”
안수재는 단호하게 말했다.
스스로는 향시도 통과 못 한 돌머리라지만 그는 가끔 핵심을 찌르는 말을 하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조두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무림맹 지부 확장이란 게 많은 문파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일일 테니…….”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다가 결국 못 이기는 척 합의가 될 거요. 덕분에 우리만 고생하게 될 거고. 위의 놈들 하는 짓거리는 결국 다 비슷하다니까?”
투덜거리는 안수재의 말투에 무림맹에 대한 경의는 전혀 없었다.
옆에서 귀를 기울이던 다른 신입 서기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편어두 역시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하지만 안수재는 아랑곳없었다.
운현도 무어라 할 말이 없어서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 와중에 오직 조두식만이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억지로 웃는 낯을 해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