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07화 (107/530)
  • 107화. 증오

    “흘흘.”

    신승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 좋으냐? 그러면 나도 진작에 서기나 할 걸 그랬구나.”

    운현은 웃었다.

    그때 문득 신승이 말했다.

    “……와룡헌으로 들어오지 않겠느냐?”

    운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또 신승의 짓궂은 농담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하는 신승의 눈빛은 고요했다.

    운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금 상황에 만족합니다. 제가 스스로 택한 길이니까요.”

    “하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네가 이곳에 있을 일도 없었겠지.”

    그 말은 운현에겐 사뭇 의외였다.

    어조로 보아서는 무언가 신승이 책임을 크게 느끼는 것 같은데, 운현으로선 딱히 그럴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네가 북해와 얽힐 일도 없었을 테고.”

    운현은 그제야 신승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북해의 숨겨진 고수, 빙설과 비무를 하게 된 것은 신승 불영 대사 때문이다.

    신승이 그들에게 낙일의 주인은 운현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음.’

    따지고 보면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다. 아니, 그 당시엔 진짜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화를 내기만 할 일은 아니다.

    “……뭐, 괜찮습니다.”

    운현은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딱히 대사님의 탓만도 아닌 데다, 덕분에 저도 좋은 경험을 했으니까요.”

    자신에게 낙일을 떠맡긴 사람은 검성이다.

    오히려 신승은 놀라며 재차 검성에게 되묻기까지 했다.

    이후에 일어날 일을 운현에게 미리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빙설과 한 비무는, 운현에겐 정말로 잊지 못할 대단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다 끝난 일 아닙니까?”

    북해십이비의 한 사람이며 북해가 준비한 비장의 한 수라는 빙설이 패했다.

    그러니 운현의 생각으론 이 문제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흘흘, 과연 그럴까?”

    하지만 신승의 말은 운현의 생각에 불길함을 드리웠다.

    “왜, 왜 그러십니까?”

    운현의 물음에 신승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탓을 안 한다니 고맙긴 하다만 아직 끝난 일은 아니지. 꽃다운 아가씨의 은밀한 비밀을 들었으면 남자로서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느냐?”

    “헉!”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 그걸 어떻게…….”

    “클클클.”

    주름진 신승의 얼굴이 웃음이 번져 갔다.

    “설마 진짜로 그 아이가 이름을 말해 주었단 말이냐? 정말로?”

    운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말려들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크흠, 비밀이 꼭 이름이라고는…….”

    운현은 수습을 시도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야, 이거 큰일인데? 북해에서 이름은 절대 함부로 알려 주는 게 아니거든.”

    신승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잘하면 어여쁜 북해 신부를 맞겠구나. 잘못하면 그 아이의 칼에 죽을지도 모르지만.”

    운현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하지만 신승은 사뭇 재미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북해에 가려거든 언제든 말만 해라. 내 책임도 있으니 그 정도는 해 주마. 흘흘흘.”

    “됐습니다.”

    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신승의 웃음은 그치질 않고, 운현은 한숨만 내쉬었다.

    “아, 저기 혹시.”

    문득 운현이 신승에게 물었다.

    “무림맹에서 새벽에 조용히 수련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수련할 수 있는 곳?”

    “네. 조용한 빈터 같은 곳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운현의 말에 신승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수련이라면 비무대에서 하면 되지 않느냐? 여기저기 한둘이 아닌 것으로 아는데?”

    “저기 그게, 좀 눈치가 보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무림맹에 비무대는 많다. 그렇지만 서기가 차지하고 있다가는 당연히 말이 나올 것이라고 운현은 생각했다.

    게다가 문제는 또 있었다.

    본래 서기는 외부에 거처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돈을 아껴야 하는 운현은 무림맹에서 내주는 숙소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문제는 그 숙소가 무림맹 내에, 비록 구석이긴 하지만, 위치하고 있어서 수련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운현으로선 사뭇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 뭐라고 할 놈은 없을 것 같다만……. 어쨌든 알았다. 나중에 알려 주지.”

    “감사합니다.”

    운현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동안 수련을 제대로 못 해 나름 절박했기 때문이다.

    “흘흘, 이제야 고맙다고 하는구나. 어여쁜 북해의 아가씨보다 수련할 빈터가 더 좋더냐?”

    운현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무어라 대답해도 놀림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웃던 신승이 문득 말했다.

    “아까 들으니 늦으면 벌점인가 뭔가 먹인다던데, 이렇게 오래 있어도 되는 거냐?”

    운현은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주변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하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급한 와중에도 운현은 신승에게 예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허둥지둥 자리를 뜨는 운현의 뒷모습을 보며 신승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녀석, 그사이 눈빛이 아주 좋아졌구나. 나름 각오도 다진 것 같고. 그러니 그 녀석들에게 한 대 먹여 줄 수 있었던 것이겠지.”

    운현이 대표자의 지위를 사양한 것은 신승 역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정이 다른 대표자들을 얼마나 혼란스럽게 했는지도 말이다.

    “하지만 이놈아. 사람은 쉽게 변하느니라.”

    신승 불영 대사는 한숨을 쉬었다.

    “비록 지금은 네가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 해도, 무림맹이라는 괴물에 먹혀 버리지 않으려면 꽤나 조심해야 할 게다.”

    나지막이 불호를 외는 신승 불영 대사의 표정에는 깊은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멀어져 가는 운현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신승 불영 대사는, 운현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은 무림맹 내부의 한 전각 이 층에 앉아 있었다.

    본래 회의에 지친 대표자들을 위한 장소였던 이곳 비상각은, 사실 대의사청보다 더 자주 중요한 일들이 결정되곤 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대의사청의 외부와 항주의 풍경 역시, 오직 대표자급들에게만 허락된 광경이었다.

    난간 너머의 풍경을 음미하던 당설련은 희고 고운 손을 뻗어 작은 종을 들어올렸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우아한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섰다.

    하지만 그는 당설련이 기대하던 시비가 아니라 화산의 매화검, 영호준이었다.

    “아, 당설련 소저.”

    영호준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당설련에게 다가갔다.

    잘생긴 청년의 매력적인 미소였지만 정작 당설련은 그다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당설련의 고운 눈썹은 살짝 일그러지고 있었다.

    “어쩐 일이지요? 영호준 대협. 제게 먼저 말을 거시다니 말이에요.”

    차가운 당설련의 목소리에도 영호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름다운 당문의 눈꽃께 인사를 건네는 것이 어찌 이상하단 말이오?”

    그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당설련은 여전히 불쾌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영호준은 서슴없이 그녀 앞자리에 마주 앉았다.

    뒤늦게 나타난 시비가 다가오자 영호준은 자연스럽게 차를 부탁하고, 당설련도 한숨을 쉬며 빈 찻잔을 채워 줄 것을 명했다.

    달칵.

    시비가 나가고, 영호준은 턱을 괴며 난간 너머를 바라보았다.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을 받은 영호준의 옆모습은 대가의 조각처럼 흠잡을 데 없었다.

    하지만 그의 겉모습에 현혹되기에는 너무 많은 사실을 당설련은 알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삶이란 참으로 놀랍지 않소?”

    영호준은 미소를 지으며 당설련을 돌아보았다.

    “그저 작은 것 하나가 변했을 뿐인데 이토록 세상이 달라 보이다니 말이오.”

    “흥. 설마 사랑에라도 빠졌나요?”

    달그락.

    시비가 차를 내오고 부드러운 향이 퍼졌다.

    당설련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잘됐군요. 이제야 항주의 밤거리가 좀 조용해질 테니까.”

    영호준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찻잔을 매만지며 향을 음미했다.

    “비슷할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상대가 남자인걸.”

    “더욱 축하드려요.”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당설련은 매력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항주의 불쌍한 여인들이 무사하게 되었으니까요.”

    “하하하,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오. 나는 미인을 사랑하거든.”

    말끝에 번지는 영호준의 은근한 눈빛은 누구라도 흔들릴 만 했다.

    하지만 당설련은 가벼운 코웃음으로 그 시선을 무시한 채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나도 소저께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영호준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왜 그에게 흥미를 보이지 않는지, 그것이 궁금한가요?”

    담담한 당설련의 말에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영호준도, 당설련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름 한번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바로 검성의 후계자 운현이다.

    “쯧쯧, 아무리 소저께서 총명하다 해도 상대가 할 말까지 해 버리면 재미가 없지 않소? 그래서야 연인에게 사랑의 밀어는 어떻게 들을 셈이오?”

    “상관없어요. 그리고 적어도 매화검이라는 명호를 가진 사람에게 듣고 싶지는 않군요.”

    당설련은 붉은 입술을 찻잔에 대고 차를 음미했다.

    그녀가 찻잔을 다시 내려놓을 때까지 영호준은 미소를 머금은 채 기다렸다.

    달칵.

    “그래서 어떻소? 왜 그에게 관심이 없는 거요?”

    검성의 후계자에 관한 이번 일에서 당설련은 결코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무림맹의 주요한 사안에 항상 존재감을 드러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당설련은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영호준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럼 관심이 있단 말이오?”

    “관심은 없어요.”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다만 증오가 있을 뿐이지요.”

    “증오?”

    영호준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증오라니……. 설마 예전에 차이기라도 했단 말이오?”

    당설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요.”

    “미안하오.”

    영호준은 즉시 사과했다.

    “하지만 소저를 보고 있으면 자꾸 장난을 치고 싶어져서 말이오. 예전에는 소저도 재미있다고…….”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영호준이 말했지만 그건 역효과였다.

    당설련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가는 것을 본 영호준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후우.”

    당문의 눈꽃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당신과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영호준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당설련의 성질을 더 건드릴 것이 뻔한지라 참았다.

    잠시 감정을 다스리던 당설련은 다시 찻잔을 들었다.

    “……문제의 본질은 단순해요.”

    담담한 목소리로 당설련은 말을 이었다.

    “검성의 후계자니, 서기니 하는 것은 사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눈동자를 빛내며 당설련은 말했다.

    “그가 신승의 확인을 받았다는 사실이에요.”

    영호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당설련은 피식 웃었다.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요?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찻잔을 내려놓고 당설련은 말을 이었다.

    “신승은 그를 확인해 주었어요. 지난 십여 년간 와룡헌을 벗어나지 않던 그가, 검성의 후계자를 위해 움직였다고요.”

    “하지만 그건…….”

    영호준은 반론하려 했다.

    검성의 후계자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는 강호 무림에서 지극히 크다.

    그러니 은거하다시피 하던 신승이라 해도 나설 수밖에 없지 않은가?

    특히 검성의 뜻을 아는 유일한 친우가 바로 신승이니 말이다.

    하지만 당설련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검성의 후계자는 당당히 무림맹에 들어섰지요. 대표자 지위 대신 서기를 택하는 요란한 행동으로 모두의 시선을 흐트러트리면서요.”

    그녀의 목소리엔 어느새 은은한 열기가 실려 있었다.

    “이래도 모르겠어요? 그는 신승이 우리 눈앞에 내세운 후계자예요. 검성이 아니라 신승의 후계자이자, 곧 무림맹을 이어받을 후계자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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