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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105화 (105/530)
  • 105화. 자신의 분수

    무림맹 서기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숫자는 꽤 많았다.

    그리고 합격자들은 무림맹에서 합숙하며 훈련을 받았다.

    생소한 강호의 예절은 물론 무림맹의 조직과 주요 업무에 대해서도 교육을 받았고, 말로만 듣던 무림맹의 위상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입 서기들에게 무림맹의 위세란 것은 남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문사이지 무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에이, 젠장.”

    커다란 체격과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진 안수재가 투덜거렸다.

    그는 강의 시간이 끝나자마자 서슴없이 불편한 속내를 드러냈다.

    “업무 분담의 효율성이니 뭐니 하지만 결국 무사들 뒤치다꺼리나 하라는 거 아뇨? 내 참 더러워서…….”

    “그럼 남의 돈 받기가 그리 쉬운 줄 아십니까?”

    편어두가 옆에서 한마디 했다.

    “상단에 가 보십시오. 이보다 더 더러운 일도 허다합니다. 뒤치다꺼리라지만 불법적인 것도 아니니 그냥 하라는 대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안수재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옆에서 조두식도 한마디 했다.

    “맞소. 무림에서도 거대 문파들의 횡포는 공공연한 일이라고 들었소. 솔직히 관직에 나간다 한들 그런 일이 없겠소?”

    운현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조두식이 웃는 얼굴로 안수재를 달래듯 말했다.

    “좋게 생각합시다. 우리가 뒤치다꺼리는 하지만 책임은 무인들이 질 테니 말이오.”

    그러나 안수재는 불편한 얼굴을 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내가 말이오, 머리는 나빠서 공부는 잘 못했지만 이거 하나는 알고 있소.”

    안수재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아닌 걸 아니라고 말도 못 하면 결국 아무것도 못 하고 한 세상 끝난다고 말이오. 그냥 다 좋게 좋게 하다가 대체 뭐가 되겠소?”

    ‘아.’

    운현은 문득 안수재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돌머리라지만 안수재는 기개가 있는 사람이다.

    만일 붓 대신 검을 쥐었다면, 그야말로 진정 무인다운 무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자, 그만합시다. 누가 그걸 모르겠소?”

    조두식이 안수재를 말렸다.

    안수재는 아직 할 말을 다 못 한 듯했지만 조두식의 만류에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운현은 문득 장강에서 만난 장경규를 떠올렸다.

    ‘세 사람이 길을 가도 그중에 스승이 있다더니.’

    장경규는 장사치로 나섰지만 긴 안목을 갖고 있었다.

    안수재는 머리가 나쁘다지만 기개를 가지고 있다.

    조두식 또한, 항상 먼저 나서서 사람들 사이를 중재한다.

    모두가 운현으로선 처음 만나는 유형의 사람들이었다.

    ‘세상에는 내가 배워야 할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

    천하는 넓고 사람은 많다.

    그중에서 자신은 어떠한 사람인가? 어떠한 신념과 뜻을 가지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난데없지만 운현은 잠시 상념에 잠겨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생각에 잠겼을까?

    “어이, 운 형.”

    갑자기 옆에서 조두식이 운현을 툭 쳤다. 운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왜 그러십니까, 조 형?”

    운현의 반문에 오히려 조두식이 어이없다는 표정이 된다.

    “왜 그러냐니……. 지금 앞에서 운 형을 애타게 찾고 있지 않소?”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신입 서기들이 모여 있는 전각 앞쪽, 그곳에서 누군가가 목을 빼고 주위를 둘러보며 운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운현! 신입 서기 운현은 어디 있나?”

    “아, 접니다!”

    운현은 지체 없이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

    “이곳 무림맹은 용담호혈이다.”

    중년의 관지부가 진지하게 말했다.

    앞에 선 젊은 청년, 변기량 역시 더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겁먹으면 안 돼.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못 하거든.”

    관지부는 청년 변기량에게 물었다.

    “내가 우리 일이 뭐라고 말했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입니다!”

    지체 없는 대답에 관지부는 미소를 지었다.

    “옳다.”

    사실은 조금 달랐다.

    지객당은 무림맹의 손님을 맞이하는 부서다.

    하지만 관지부는 지객당의 책임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접촉점이다. 즉, 우리는 의사소통 전문가라 할 수 있지.”

    그 말에 젊은 청년 변기량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절대 주눅이 들어선 안 된다. 그러면 처음부터 실패하고 시작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야.”

    관지부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변기량의 대답은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어, 하지만 다들 위명이 쟁쟁한 대협분들이신데…….”

    변기량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어떻게 주눅이 안 듭니까요?”

    “이런 답답한 놈 같으니.”

    관지부는 혀를 찼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처음부터 밀리는 거다. 사람은 말이지, 기세라는 게 있는 거야.”

    사뭇 열정적으로 관지부는 말을 이었다.

    “호랑이가 어떻게 토끼를 잡아먹는 줄 알아? 그냥 노려보면 토끼가 꼼짝도 못 해. 그게 바로 기 싸움이라는 거야. 거기서 밀리면 안 된다고.”

    “하, 하지만 무림인들은 인상이 너무 무서워서…….”

    ‘어이구. 이런 바보 같은 자식.’

    목을 움추린 변기량을 보며 관지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름은 기량인데 어찌 그리 기량이 부족하냐? 이름이 아깝다.’

    “그러니까 요령이란 게 있다잖냐.”

    관지부의 말에 변기량은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게 뭔데요?”

    “바로 눈이다.”

    관지부는 단호하게 말했다.

    “상대를 쳐다볼 때 한 쪽 눈만 쳐다봐라. 네 눈 둘로 상대방 눈 하나만 보면 되니까 이 대 일이잖아. 그럼 한결 쉬울 거 아냐. 안 그래?”

    관지부가 두 손가락으로 자신과 변기량의 눈을 가리켜가며 설명했지만 변기량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 그럴까요?”

    “그래.”

    관지부는 킁 하고 콧바람을 내뿜었다.

    “너는 내가 하는 걸 잘 보고 배워라. 이 관지부 님이 검성의 후계자를 어찌 다루는지 똑똑히 잘 봐 두란 말이다. 알았냐?”

    “네.”

    대답하는 변기량의 입술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쳇! 어차피 자기도 잔뜩 긴장한 주제에…….’

    지금부터 관지부와 변기량이 맞이할 상대는 바로 검성의 후계자였다.

    젊은 변기량은 물론 중년의 관지부조차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밖에서 시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덜커덩.

    관지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안으로 모셔라.”

    달칵.

    문이 열리고 문사 차림의 청년, 운현이 나타났다.

    관지부는 즉시 허리를 숙였다.

    사락.

    “오랜만에 뵙습니다, 운 대인.”

    지극히 공손한 그 예에 운현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예를 거두십시오. 저는 이제 신입 서기에 불과할 뿐인데…….”

    “허허허.”

    관지부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직책이야 어떻든 제가 어찌 운 대인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선 여기 앉으시지요.”

    관지부가 권한 자리는 상석이었다.

    운현이 탁자에 앉자 관지부는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차를 드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운현의 대답에 관지부는 즉시 시녀에게 차를 가져오도록 했다.

    그러면서 짐짓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변기량을 슬쩍 쳐다보았다.

    관지부의 눈빛은 마치 ‘내가 얼마나 능숙하게 검성의 후계자를 대하는지 보았느냐?’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를 대하는 변기량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눈을 보기는커녕 알아서 숙이고 들어가는데 무슨 기 싸움이야? 에이.’

    하지만 관지부는 그 무언의 항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시 후, 운현은 지객당에서 자신을 부른 이유를 듣게 되었다.

    “……하여, 검성의 후계자분을 대함에 있어 미비한 점이 있나 알고자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희가 찾아뵈어야 함이 마땅하나…….”

    달칵.

    운현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관지부는 즉시 말을 멈췄다.

    아니나 다를까?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신입 서기일 뿐입니다. 검성께서 인정하셨다하나…….”

    운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 뜻과는 무관합니다. 그러니 제게 특별한 배려를 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하지만 듣던 관지부는 안색이 변했다.

    혹 자신이 무언가 운현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냉랭한 반응이 나오랴?

    “저기, 운 대인. 제가 혹시 무언가 실례를 했다면…….”

    “저를 대인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아니, 그럼 무어라고…….”

    “그냥 서기라고 불러 주시면 족합니다.”

    단호한 운현의 말에 관지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젠장.’

    관지부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검성의 후계자가 멀쩡한 사람일 리가 있나? 이 사람도 역시 정상이 아니구만.’

    평생을 검에 미쳐 산 사람이 정상일 리가 없다.

    더구나 검성이 인정할 정도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관지부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운 서기님. 그러시지 말고…….”

    그때였다.

    뒤에서 보고 있던 변기량이 난데없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운 서기님. 자신의 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갑작스러운 변기량의 말에 관지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상황을 잘 모르다니? 어찌 검성의 후계자에게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아니, 아까는 무림인이 무서워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보겠다는 녀석이 대체 어떻게.’

    관지부는 당황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가르쳐 준 요령 때문이리라 생각하며 관지부는 즉시 무마를 시도했다.

    “하하하, 운 서기님. 이놈이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니…….”

    그러나 변기량의 입을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

    “검성께서는 천하제일검이라 불리는 분입니다. 그 후계자로 인정받았다는 건 즉 다음 천하제일검이 될 분이라는 뜻입니다.”

    변기량은 운현을 향해 거침없이 말했다.

    “스스로 겸손하심은 대단히 좋으나 책임을 외면하시면 안 되지요. 앞으로 강호 무림을 짊어지고 가실 분께서 자꾸 서기라고 우기시면, 저희 같은 사람은 대인을 어찌 대해야 한단 말입니까?”

    ‘죽었다.’

    관지부는 사색이 되었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검성의 후계자에게 저런 무례한 언사라니, 당장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게 된 것이다.

    ‘내가 평생 위험을 잘 넘겨왔다고 자신했더니, 사람 하나 잘못 받아 목이 날아가는구나.’

    무림인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소위 고수라 불릴수록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검성의 후계자가 어찌 이런 무례를 감내할 것인가?

    관지부는 비극을 예감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관지부가 생각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운현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말씀하시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운현은 변기량과 관지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저는 무림의 일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하하, 하하하…….”

    관지부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내용은 상관없었다. 설령 무슨 말을 했더라도 관지부는 동의했을 것이다.

    그러나 운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록 서기일 뿐이지만 이 일을 선택함에 있어 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었고, 스스로 돌아보아 항상 성심을 다해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이 일이 하찮다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그야 물론입니다.”

    관지부는 고개를 조아렸다.

    문제는 서기직이 하찮은가 아닌가가 아니다.

    그리고 운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검성께 인정을 받았다 하시지만 이것은 그저 그분의 격려에 불과할 뿐, 결코 제가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검성은 거대한 산이다. 운현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마음에서 검을 지우라’는 검성의 충고 역시, 운현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기약하자는 뜻이 아니었던가?

    “강호에는 기인과 이사가 많다 하였습니다. 당장 이곳 무림맹만 해도 신승과 검성께서 계시지요. 저는 제 분수를 알고 있으니 그냥 이대로도 만족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남들이 바라는 대로 제 삶을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닌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아닌 것이지요.”

    마지막 그 말은 동료 서기인 안수재의 말을 떠올린 때문이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라고 말했던 그의 기개가 여전히 운현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강에서 만났던, 부끄러움 없이 상인의 길을 택한 장경규의 기억 역시 운현의 뜻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분수에 넘는 과분한 자리는, 어차피 스스로를 욕되게 할 뿐이니까요.”

    회한이 담긴 목소리로 운현은 조용히 말을 맺었다.

    관지부와 변기량은 운현이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렇게 그들의 짧고도 긴 대화는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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