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불가근 불가원
검성의 후계자를 신승이 확인해 주었다는 건 사뭇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저 알려 주었다는 뜻을 넘어, 경우에 따라서는 후견인이 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죄송하오나 빈승 역시 그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진허는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
“신승께서는 소림의 어른이시기 이전에 무림맹의 기둥이십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것을 어찌 우리가 알겠습니까?”
그 말은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신승은 와룡헌에 칩거한 채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소림조차도 그를 쉽게 만날 수는 없다.
비밀리에 만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고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군요.”
낭랑한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검성의 후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정파의 제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말예요.”
“그렇소!”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건장한 체격의 사내, 흑도회 대표 묵혈엽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 일에 염려와 분노를 금할 수 없소. 이런 중대한 문제가 어찌 정파들 사이에서만 나돈단 말이오?”
검성의 후계자에 대한 문제는 무당이 제일 먼저 제기했고 화산과 소림이 연관되어 지목되었다.
검성의 후계자라는 엄청난 문제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즉시 이 문제에 대한 감찰을 요구하는 바요!”
“잠깐 진정해 보십시오.”
학자 같은 풍모의 중년인이 말을 꺼냈다.
멋들어진 수염을 기른 그는 제갈세가의 대표자, 제갈연이었다.
“먼저 말씀드리지만 무림맹에는 더 이상 정파도, 사파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안건은 결코 일부 계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갈연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신승께서 검성의 후계자를 확인해 주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신단 말입니까?”
검성의 후계자를 신승이 확인해 주었다.
그것은 그저 신승이 검성의 후계자를 알고 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극단적인 경우긴 해도 검성의 후계자가 신승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흑도회 대표 묵혈엽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갈세가의 뜻은 무엇이오?”
“간단합니다.”
제갈연이 진지한 눈빛으로 답했다.
“바로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지요.”
대표자들은 그의 말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제갈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를 무림맹에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상호 불가침 협정이겠지요. 그와 우리가 아니라, 우리 서로 사이에 말예요.”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무림맹에 끌어들여 시야 안에 두되 누구도 먼저 건드리지는 않는다. 이것 아닌가요? 마치 신승을 대하는 것과 같이 말예요.”
제갈연은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역시 당설련 소저시군요.”
소저라는 말보다는 여협이 더 어울리는 그녀였지만, 제갈연은 당설련이 선호하는 호칭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제갈연은 다른 대표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신승께서 그러하듯 검성의 후계자 또한, 그가 어느 문파에 속하였든 무관하게 무림맹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눈을 빛내며 제갈연은 말을 이어 나갔다.
“또한 이후 후계자에 대해 사문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무림맹의 존속을 위협하는 행위로서 엄히 징계될 것입니다.”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대표자들은 내심 이해득실을 계산하며 다른 대표자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면 그는 맹에서 어떤 직위에 있게 되죠?”
말을 꺼낸 사람은 당설련이었다.
그건 대표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검성의 후계자에게 과연 어떠한 자리를 주어야 할까?
“그것은…….”
“그야 달라는 대로 주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제갈연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매화검 영호준이 끼어들었다.
영호준은 간단한 문제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는 검성의 후계자이며 이곳은 무림맹입니다. 힘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곳이 바로 강호 무림이니…….”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영호준이 말을 이었다.
“당연히 그가 원하는 대로 줄 수밖에요. 설령 그가 대표자의 자리를 원한다 해도 말입니다.”
대표자들의 안색이 일시에 변했다.
영호준은 가볍게 말했지만 대표자의 지위는 결코 그 권한이 작지 않았다.
모든 사안이 협의로 처리되는 무림맹에서 대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무림의 각종 대소사에 영향을 미치게 됨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일인문파(一人門派)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불가하오!”
혁련세가의 혁련필이 강하게 반발했다. 과거 정사대전에서 신진 세력으로 분류되었던 문파였다.
“아무리 그가 검성의 후계자라 해도 어찌…….”
“그러면.”
혁련필의 말을 끊고 영호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혁련세가는 검성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혁련필 대협께서 검성의 후계자를 이길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건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모욕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나 혁련필은 분노하지 않았다. 아니, 분노하지 못했다.
다른 문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바로 검성이기 때문이다.
검 한 자루로 북해를 평정한 절대자이자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이며, 그 무공이 하늘에 닿아 가히 천하제일검으로 손꼽기에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 사람.
검성을 적대하고자 하는 문파는 누구라도 멸문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니 지금 혁련필이 침묵하고 있다 해도 그것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흥.”
혁련필은 입을 악다물며 비웃음을 흘렸다.
“검성의 후계자가 검성은 아니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것이지.”
영호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대봐야만 알 정도라면 대표자로 오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영호준 대협의 말씀도 맞습니다만…….”
말을 꺼낸 사람은 무당의 청진 도사였다.
“그가 과연 맹에 들어오려고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검성의 후계자가 말입니다.”
검성이 문파나 무림맹 같은 조직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죽하면 그를 검에만 미친 사람이라고 할까?
그렇다면 그의 후계자가 그러지 말라는 법 또한 없다.
제갈세가의 제갈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허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달칵.
문득 바깥에서 들린 소리에 제갈연이 말을 끊고 돌아보았다.
“무슨 일인가?”
“와룡헌에 갔던 관지부입니다.”
밖에서 시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갈연은 다른 대표자들의 반응을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들라 이르게.”
검성의 후계자에 대한 사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 답을 해 줄 사람은 오직 검성과 신승뿐이다.
그러니 무림맹 대표자들이 신승 불영 대사에게 질의를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는 신승이 답을 해 줄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달칵.
대의사청의 문이 열리고 관지부가 책 한 권을 소중히 감싼 채 들어섰다.
관지부는 대의사청에 앉은 이십여명의 대표자들을 향해 예를 표했다.
“어찌 되었나?”
누군가의 물음에 관지부는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지객당 관지부, 존경하옵는 대표자분들의 명을 받아 오늘 아침 감히 와룡헌을 방문하였습니다. 다행히 신승 불영 대사께서 미천한 소인을 물리치지 않으시기에…….”
관지부의 말이 하염없이 이어지자 제갈연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 되었나 묻지 않나?”
관지부는 찔끔하더니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 신승 불영 대사께서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대표자들의 눈이 둥그렇게 되었다.
덜컹.
“그게 누구인가?”
“어느 문파라던가?”
“그가 어디 있는지 말씀하셨나?”
대의사청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사방에서 질문이 쏟아지자 관지부는 허둥지둥 들고 온 책을 펴들었다.
파라락.
“그, 그러니까 성명은 운현이며 고향은 광동성의 광주입니다. 과거에 합격하여 황궁에서 십여 년간 학사 생활을 하던 중 관직을 내어놓고 낙향하여 현재 항주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대표자들은 당황했다.
그들도 묻기는 했지만 이렇게 술술 답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읽어 가던 관지부는 멈칫하더니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또한 얼마 전 무림맹 서기 모집 시험에 응시하여…….”
관지부는 꿀꺽 침을 삼켰다.
“하, 합격하였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잠시뿐, 대의사청은 삽시간에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 이놈! 감히 지금 누굴 능멸하고…….”
“진허 대사! 당신이 와룡헌에 좀 가 보시오. 대체 저놈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오?”
분위기가 삽시간에 험악해지자 관지부는 필사적으로 항변에 나섰다.
“아닙니다! 신승 불영 대사께서 분명히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관지부는 들고 있는 책을 대표자들에 펴 보이며 외쳤다.
“검성의 후계자는 바로 이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대표자들은 관지부가 내민 책을 바라보았다.
그 책은 일종의 무림맹 정례 보고서 같은 것이었다.
오직 각파의 대표자들과 신승 불영 대사에게만 전달되는 책이다.
“처음에 신승께서는 말없이 책을 펴서 저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걸 가지고 가서……, 여러분께 이렇게 알려 드리라 하셨습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관지부는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입니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관지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표자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괘, 괜찮겠지?’
그가 걱정하는 건 신승 불영 대사가 말했던, ‘이걸 짹짹거리는 녀석들에게 던져 주려무나’라고 말한 부분을 건너뛴 것이다.
그런 불경한 말을 어찌 대표자들에게 전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제갈연이 허탈한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검성의 후계자가 학사, 아니 낙향한 문사란 말인가? 게다가 이번 서기 모집 시험에 합격했고?”
“그, 그냥 합격이 아닙니다.”
관지부가 얼른 제갈연의 말에 덧붙였다.
“수석 합격입니다.”
“뭐?”
얼굴을 찌푸리는 제갈연의 반응에 관지부는 급히 책을 뒤적거렸다.
“에, 그러니까 고문(古文)과 옛 시, 그리고 상식을 묻는 시험에서는 대체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만, 무공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묻는 질문에서 그의 답안지가……, 만점을 받았습니다.”
관지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채점관들의 의견에 따르면 그는 열여덟 가지 무공의 기본적인 자세와 그 의미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수준이 채점관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건 대다수 대표자들에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들 역시 저 책을 받았지만 신입 서기의 시험 성적에 누가 관심을 두랴?
“결국 채점관들의 만장일치로 다른 응시자들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회의실은 조용했다.
“내가 문사들의 일에 대해선 잘 몰라서 그러는데…….”
흑도회의 묵혈엽이 눈살을 찡그리며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아까 분명 문사라 하지 않았소? 그런데 무공에 대해 저리 박식할 수도 있소?”
옆에 앉아 있던 공손세가의 대표자 공손창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공손세가도 학문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쉽지 않습니다. 아니, 절대 불가능하지요. 과거에 합격할 정도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과거에 합격하여 황실 학사를 지냈다는 말의 의미를 공손창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단언할 수 있었다.
무인이 검에 정진하듯 문사와 서생들도 과거 합격을 꿈꾸며 학문을 갈고닦는다.
감히 다른 곳에 한눈을 팔고서 이룰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다른 진실이 있다는 뜻이군요.”
당설련이 빙긋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진실?”
공손창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 다른 진실요.”
당설련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궁금하네요.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속이며 무림맹에 들어온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말예요.”
대표자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검성의 후계자는 이미 무림맹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서기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숨긴 채 말이다.
과연 그가 무엇을 노리고 이런 행동을 했단 말인가?
“아무래도 직접 들어 보는 수밖엔 없겠지요?”
낭랑한 당설련의 목소리에 대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당연하고 간단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 대답 또한 당연하고 간단한 것일까?
대표자들은 지금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한마디에 무림맹이, 강호 무림이 혼란 속으로 빠져들지도 모르니 말이다.
“저기, 그러면…….”
미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관지부가 대표자들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개인 이력 허위 기재로 합격을 취소할까요?”
대표자들의 눈살이 일제히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