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103화 (103/530)

103화. 무림맹 서기 모집 시험

무림맹 공개 비무장은 아침부터 사람들로 가득했다.

평소와 달리 문사 차림의 서생들로 가득한 비무장에는 운현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후우.”

운현은 모여든 사람들을 돌아보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이번에 붙기는 틀렸나 보군.”

오랜 창룡전 학사 생활은 경전이나 고서, 사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치열하게 공부한 것이 있으니 설마 완전히 잊어버리기야 했을까마는, 그래도 다시 한번 훑어보기라도 해야 기억도 나는 것이다.

그런데 운현에게 주어진 시간은 사흘, 사실상 이틀뿐이었다. 게다가 아직 책도 다 구하지 못한 형편이다.

그러니 주위를 가득 메운 수많은 경쟁자들을 보며 한숨부터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하하. 그래서 무공이니, 문파니 하는 것들을 공부했다는 거요?”

훤칠하게 차려입은 문사복 차림의 사내가 커다란 소리로 말했다.

다른 서생이 기가 죽은 듯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그래도 일단 무림맹 시험이니까…….”

그의 말은 당연했다. 하지만 훤칠한 사내는 혀를 찼다.

“쯧쯧, 그런 잡서 따위를 읽다니. 당신은 선비로서 자존심도 없소?”

그 말에 운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사내는 사뭇 오만하게 말했다.

“무릇 선비란 붓을 한번 놀려도 명문장이 흘러나와야 하고, 시 한 수를 읊더라도 옛 성현의 큰 뜻을 담아야 하오. 어찌 우리가 돈을 위해 칼이나 휘두르는 자들과 같이 행동하겠소?”

‘그러면 애초에 이곳에 오질 말아야지.’

그렇다면 학처럼 고고하게 이슬을 먹으며 속세를 떠나 살 일이다.

왜 이곳에 와서 자신은 아닌 척 오만과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단 말인가?

운현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딱히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차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쯧. 조용히나 할 것이지…….”

“그러게 말이오.”

갑자기 옆에서 들린 맞장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시오.”

옆에 앉은 사람은 꽤 건장한 체구를 가진 문사였다. 그는 운현을 바라보며 인사를 했다.

“나는 강소성에서 온 안수재라고 하오.”

“아, 저는 운현이라고 합니다.”

운현도 얼결에 자신을 소개했다.

“에이, 말 놓으시오. 댁도 그리 어려 보이지 않는데…….”

안수재는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그런데 형씨는 많이 준비했소?”

“저는 별로…….”

“하하, 그리 겸양할 것 없소.”

안수재는 운현을 보며 웃었다.

“나는 워낙 돌머리라서 어찌 될지 모르겠소. 회시는 고사하고 향시도 통과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오.”

머리를 긁는 그에게 운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며칠 전에야 이 시험 얘기를 들은지라 준비를 거의 못 했습니다.”

“어이쿠, 저런.”

안수재가 안됐다는 표정을 짓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씨도 그랬습니까?”

운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도 어젯밤까지 술을 마시느라 글은 한 자도 못 봤지 뭡니까? 아, 저는 강서성에서 온 조두식이라고 합니다.”

그는 고개를 꾸뻑 숙였다.

자신의 말대로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좀 취직을 해 볼까 해서 온 것인데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나는 힘들겠습니다.”

조두식의 말에 안수재가 힘내라는 듯 한마디 했다.

“아닙니다. 다들 무림맹 서기 시험이라고 우습게 보는 모양이니 아직 포기하기는 이릅니다. 실력도 없는 놈들이 남을 우습게 여기는 법이거든요.”

안수재는 아까 큰 소리를 내던 자들을 향해 ‘퉤’ 하고 침을 뱉기까지 했다.

“그야 그렇긴 합니다만……, 저 사람은 믿는 게 있다더군요.”

조두식이 슬쩍 주변을 살피고는 말했다.

“무림맹에 아는 사람이 있다던데요? 돈도 좀 썼다는 것 같고……. 그러니 저렇게 큰소리를 치는 겁니다.”

그 말에 안수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보니 더 나쁜 놈이었군. 저런 놈은 처음부터 아예 시험을 못 보게 해야…….”

이야기가 성토 분위기로 흐르는 듯하자 운현이 나서서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무림맹에서는 늘 이런 식으로 서기를 뽑습니까?”

안수재와 조두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올시다. 나도 잘…….”

“모르셨습니까?”

이번에 끼어든 사람은 앞쪽에 있던 사람이다.

말끔한 문사 차림의 그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호북성에서 온 편어두라고 합니다. 제가 듣자하니 이번 서기 모집은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라 하더군요.”

편어두의 말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간단히 말하면 무림맹이 지금보다 조직을 크게 강화하느라 문사들이 많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이제는 각 성에 무림맹 지부도 둔다고 하더군요.”

“무림맹 지부요?”

“뭐,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앞으로 무림맹이 각 문파들의 일마저 간섭할 모양입니다. 말로는 관리 감독이라는데, 아무래도 문파들이 달가워하지는 않겠지요.”

“어이구, 형씨는 이쪽에 아주 빠삭하신가 보오.”

안수재의 말에 편어두는 머리를 긁었다.

“예전에 상단에서 일을 좀 보았는데, 오히려 그쪽이 무림이나 관(官)에 대한 소문은 더 빠르더군요. 저도 그래서 알았습니다.”

“상단이라면 그쪽이 벌이가 더 낫지 않소? 왜 무림맹으로…….”

조두식의 말에 편어두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상단 나름입니다. 작은 상단은 큰 상단들 눈치 보느라 가져다 바치는 것도 많고, 멀쩡한 거래처도 뺏기기 일쑤고……. 정말 더러워서 못 해 먹겠더군요.”

운현은 상계나 무림의 사정이 황궁의 계파 싸움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뭐, 어쨌든 여기 있는 분들이라도 다 합격해 봅시다.”

다들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는 게 다들 참 힘들군.’

누구나 사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서로 돕기도 하는 것이다.

운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남의 사정이 나쁜 것을 보고 안도하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잠시 위안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쾡.

한 줄기 징 소리에 소란스럽던 비무장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무림맹 서기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고, 책임자로 보이는 이가 기다란 두루마리 여럿을 들고 천천히 입장했다.

“먼저, 무림맹 서기 모집에 응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오.”

그는 사뭇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무림맹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사람들은 혹은 지루해하며, 혹은 눈을 빛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이제 문제를 발표하겠소!”

시험관의 목소리와 함께 징 소리가 비무장에 울려 퍼졌다.

시험관은 앞으로 나가 자신이 들고 온 두루마리 중 하나를 걸었다.

무림맹 서기 시험의 첫 문제였다.

촤르륵.

그가 손을 놓자 두루마리가 펴지며 문제가 발표되었다.

그 순간 비무장은 탄식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허어! 이럴 수가…….”

“아이구야.”

곳곳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 서기 시험의 첫 문제는 ‘각종 무공의 기본형과 그 의미에 대해 논하라’였기 때문이다.

***

무림맹의 서기 모집 시험은 점차 그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무공에 연관된 첫 문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고 나가 버렸지만, 그래도 두 번째 문제부터는 옛 문장이나 시에 대한 문제들이 출제되었다.

사실 문제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옛 문장이나 시라 해도 이미 알려진 유명한 것들이었고, 글을 읽은 문사라면 어렵지 않게 논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처음 나온 문제가 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때문일까?

시험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채 반도 되지 못했다.

안수재, 조두식, 편어두, 그리고 운현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떻소, 잘들 보셨소?”

시험이 끝나고 시험지를 밀봉하자마자 안수재가 말했다.

“그럭저럭 써서 내긴 했습니다만 첫 문제가 워낙…….”

편어두가 아쉬운 듯 말하고, 조두식도 고개를 저었다.

“아이구, 나는 머리가 띵해서 무슨 말을 썼는지도 모르겠소. 어떻게 대강 끄적거리긴 했는데…….”

“형씨는 어땠소?”

안수재가 넌지시 운현에게 물었다.

“다행히 제가 관심 있어 하던 분야라 어떻게 잘 써 내긴 했습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에이, 보니까 제일 많이 쓰시더만.”

안수재가 운현을 툭 쳤다.

“형씨는 보나마나 합격일 거요. 내 사심 없이 축하해 줄 터이니 술이라도 한잔 사시오.”

“어이구, 술 좋지요. 어디 합격주 한번 미리 좀 얻어먹어 봅시다.”

술이라는 소리에 조두식이 반색을 하고 나섰다.

어젯밤 늦게까지 마셨다면서도 아직 모자란 모양이다.

안수재는 편어두에게도 권했다.

“형씨도 같이 갑시다.”

“……에이. 그래, 갑시다. 시험도 끝났겠다, 술이라도 한번 마셔야지요.”

주저하던 편어두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합류했다.

난데없이 정해진 술자리였지만 운현은 이런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동병상련의 심정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날 운현과 세 사람의 서기 응시자들은 함께 항주의 주점에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며칠 후, 무림맹은 신입 서기 합격자를 발표했다.

약한 소리를 하던 조두식도, 돌머리라던 안수재도, 그리고 무림 사정에 환하던 편어두도 합격을 했다.

그리고 합격자을 알리는 방문의 가장 앞쪽에 운현의 이름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비록 장원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신입 서기 합격자 중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는 의미였다.

***

이른 아침의 와룡헌은 새들의 지저귐으로 가득했다.

그 시끄러운 새들의 노랫소리 속에서, 와룡헌의 주인 신승 불영은 아침부터 만면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헐, 이 녀석. 한번 실력을 보이라고 했더니만 정말 장원을 해 버렸군.”

불영은 읽고 있던 책 한 권을 탁자에 툭 던졌다.

그리고 지저귀는 새들을 향해 말했다.

“이놈들아. 너희들 배고픈 것만 생각하고 이 늙은 중 힘든 건 생각도 안 하냐? 좀 기다려라, 기다려.”

불영은 툴툴거리면서 한 손으로 곡식을 조금 쥐었다.

“그래, 어디 노인 공경도 모르고 제일 빽빽거리는 놈이 먹어 보거라.”

촤악.

불영은 손을 휘둘러 곡식을 뿌렸다.

삽시간에 모여드는 새들을 보며 불영은 웃음을 흘렸다.

“클클클. 그래그래, 많이 먹어라. 네놈들이 먹고 싸면 또 그게 어디선가 싹을 틔울 터.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이 다 자연의 섭리 아니겠느냐?”

새들을 상대로 설법이라도 하려는지 불영은 연신 중얼거리며 곡식을 던졌다.

그러다 문득,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쯧. 시끄러운 놈들이 또 오는구만. 똥 냄새도 고약한 놈들이 또 무슨 일로 짹짹거리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불영은 이미 그들의 목적을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와룡헌 입구에 몇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불영은 새들에게 하는 양,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어서 오거라. 네놈들이 좋아하는 걸 줄 터이니 말이다.”

슥.

불영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탁자 위에 던져 둔 책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연신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클클클.”

***

신승 불영이 방문자를 맞이하던 그때, 무림맹 대의사청에서는 격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사대전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끝났지만 그 상처만은 아직 아물지 않아서, 무림맹 대표자 회의는 언제나 두 무리의 대립으로 치닫기 마련이었다.

스스로 정파라 자부해 온 거대 문파들과 사파라 매도되어 온 신진 세력들, 그리고 일부 정사 중간의 문파들.

이들은 서로 협력하며, 때로는 서로를 견제하며 치열한 격론을 이어 가고 있었다.

“화산은 이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무당의 청진 도사가 굳은 얼굴로 말하자 매화검 영호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런 이야기는 들었으나 화산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영호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보다 소림에 묻는 것이 빠르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진허 대사.”

소림의 대표자 진허는 눈을 반쯤 감고 있다가 조용히 불호를 외웠다.

그 모습을 보며 영호준은 물었다.

“신승께서 검성의 후계자를 확인해 주셨다던데, 그것이 무슨 뜻이지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