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동정호의 이별
“운 오라버니! 빨리 오르세요!”
커다란 상선 위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과 이서연이 고개를 들자 이서연이 뱃전에서 몸을 내밀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게다가 상선의 뱃사람들도 재촉하듯 운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벌써 떠나려나 보오.”
운현은 일아영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건강하시오, 아영 소저. 그리고 이 공자와의 혼약이 잘 해결되어 정말 다행이오. 부디 행복하시오.”
무언가 말하려던 일아영은 혼약 얘기에 그만 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탁탁탁.
운현은 급히 걸음을 옮겨 상선에 올랐다.
뱃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함께 새가 날개를 펴듯 하나 둘 커다란 돛이 오르고, 거대한 상선은 큰 물의 흐름에 그 육중한 몸을 싣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아영은 고개를 들었다.
운현은 뱃전에 기대어 일아영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았던 그 미소를 여전히 지우지 않은 채로.
일아영은 반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꾹.
“우, 운 숙부!”
벌써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는 운현을 향해 일아영은 외쳤다.
처음엔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녀는 곧 온힘을 다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운 숙부!”
혹 바람과 물소리에 묻힐세라, 일아영은 소리를 높였다.
“꼭 돌아오세요! 꼭요! 운 숙부!”
촤아아아.
일아영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커다란 상선은 물길을 따라 떠나고 있었다.
작아진 운현의 모습은 그가 들었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일아영은 초조한 마음에 다시 소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멀어진 운현이 세차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행여 알아차리지 못할까, 팔이 떨어질 정도로 힘차게 손을 젓는 그의 모습이 말이다.
“운 숙부…….”
일아영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지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반짝였다.
운현이 무어라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바람에 묻혀 일아영에게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저렇게 바보 같을까?’
정말이지 꼴불견이라고 일아영은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숨기는 것도, 속내도 없이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과 어머니에게 무언가 해 주려던 사람.
‘……미안해요.’
쳐다보는 일아영의 뺨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야 운현의 진심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운현에게 자신이 준 것은 날카로운 말과 경계의 시선뿐이었다.
그것이 지금 일아영에게는 너무나도 후회스러웠다.
“미안해요, 운 숙부. 그러니까……, 꼭 돌아오세요. 꼭…….”
일아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쏴아아.
바람이 불었다.
동정호의 물결은 운현이 탄 커다란 상선을 멀리 실어 가고 있었지만, 일아영은 그 배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아직도 그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 오는 반지를 쥔 채, 일아영은 부디 운현에게 같은 미소를 돌려줄 수 있기를, 그럴 기회가 허락되기를 간절히 빌었다.
***
“그가 악양을 떠났습니다.”
빙혼의 목소리에 소궁주의 손길이 멈칫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달칵.
찻잔을 든 소궁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행선지는요?”
빙혼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소궁주의 질문에 답했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항주의 무림맹으로 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돌아가는군요.”
소궁주는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가 악양에서 한 일들에 대한 조사는 끝났나요?”
“네.”
빙혼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그는 호암상단의 총수인 이호암과 그의 영애 이서연, 그리고 그들의 먼 친척인 이의신과 접촉했습니다. 그가 악양에서 묵었던 저택에 대해서는 조사를 진행 중입니다.”
“호암상단과 접촉한 의도는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빙혼의 대답에 소궁주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설영대의 활동이 조금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군요.”
빙혼은 고개를 숙였다.
“허나 소궁주께서 그에 대한 경계를 검성에 준하여 유지하라 하셨기에 상황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감시를 눈치챈 것 같은 징후는 없었나요?”
“그가 주변을 경계한 일이 두 번 있었습니다.”
소궁주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두 번이라…….”
그녀는 잠시 차의 향기를 음미하는 듯 찻잔을 들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무림맹의 상황은 어떻죠?”
빙혼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검성의 후계자에 대한 회의가 한차례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문파에서 연락을 받은 무림맹 대표자들이 일대 격론을 벌였으나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신승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소궁주는 찻잔을 들어 살짝 차를 음미했다. 그리고 조용히 내려놓았다.
탁.
“아쉽게도 그 혼란은 곧 끝나겠군요. 후계자가 귀환하게 될 테니까요.”
또르륵.
빈 찻잔을 빙설이 채웠다. 은은한 차의 향기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장강수로채 연합의 움직임은요?”
이번에도 빙혼의 대답은 주저 없이 나왔다.
“신생 수채들을 중심으로 연합에 힘을 싣자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소궁주는 생각에 잠겼다.
빙혼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힘을 모은다 해도 무림맹의 상대가 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특히 장강을 중심으로 무림맹에 포위당한 것 같은 지금의 형국에서는…….”
“글쎄요?”
소궁주가 사뭇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빙혼이 즉시 입을 다물고, 소궁주는 탁자에 남은 찻물에 손가락을 대고 옆으로 스윽 선을 그렸다.
“장강이 포위당한 형세가 될지, 아니면 적을 둘로 나눈 형국이 될지는…….”
탁자 위에 길게 그려진 찻물이 서로 모여들며 드문드문 끊어져 나갔다.
소궁주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고 봐야 아는 일이죠.”
빙혼은 침묵했다. 그리고 소궁주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
스륵.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소궁주는 빙혼을 돌아보았다.
“암천무제의 움직임은?”
빙혼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흔적을 찾고 있으나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요?”
소궁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모습을 감추다니, 그쪽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걸까요?”
빙혼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궁주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려 입술에 가져다 댔다.
찻잔에서 입술을 떼며 그녀는 사뭇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한 조각 찻잎이 거친 물을 이토록 부드럽게 하다니…….”
소궁주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세상일은 알 수가 없는 것이로군요.”
그 말에 대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빙혼은 그녀의 말이 정말 찻잎에 대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지금까지 보고한 내용에 대한 것이었는지 가만히 되새기고 있었다.
검을 든 한 문사의 모습이 빙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
장강을 따라 내려가는 뱃길은 거슬러 오를 때와 달리 사뭇 빨랐다.
운현에 대한 대접 또한 천지 차이여서, 과분한 대우에 적응이 잘 안 될 정도였다.
가장 큰 것은 바로 호암상단의 영애, 이서연의 존재였다.
그녀는 언제나 웃음으로 운현 옆에 있었다.
아름다운 미녀와 장강을 항해하는 여정이 싫을 리 없겠지만 운현은 오히려 빨리 도착하기를 바랐다.
무림맹 서기 시험이 언제인지 모르는데다가, 친근한 이서연의 태도가 오히려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시험에 대해서 이서연에게 물어보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오라버니, 그럼 나중에 또 뵙겠어요.”
상선을 내린 운현에게 이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운현은 제법 익숙해진 호칭으로 그녀에게 답했다.
“고맙소, 서연 누이. 누이도 조심해서 가시오.”
이서연은 운현의 인사에 방긋 웃었다.
운현은 손을 흔들어 보이며 배에서 멀어졌고, 이서연은 끝까지 운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운현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서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사락.
이서연은 옆에 서 있는 시녀에게 물었다.
“내가 너무 친근한 척한 걸까요?”
대단히 사적인 질문이었지만 이서연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시녀이자 수행원인 여인은 즉시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지나치게 몸을 사렸던 걸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여인의 말은 옳았다.
장강을 흘러내리는 여정 중에 이서연은 운현에게 매우 다정하게 대했다. 그러나 결코 품위를 잃지는 않았다.
그 절묘하게 밀고 당기는 모습은 옆에서 보던 여인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아가씨는 대단히 매력적이었습니다. 누구라도 빠져들 만큼요.”
“훗.”
극찬이었지만 이서연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연애 경험은 없지 않나요?”
여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이서연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을 때는 그리도 쉽더니 정작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고자 하니 이처럼 어렵군요.”
그녀의 호감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언제나 많았다.
그러므로 이서연에게 누군가와 친해지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이제까지는 말이다.
“내가 이런 쪽을 전혀 모른다는 게 지금처럼 아쉬울 줄은 몰랐네요.”
한탄 섞인 이서연의 말을 들으며 여인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전혀 모르는 게 이 정도라면 앞으로 이서연이 어떻게 변할 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사락.
이서연은 운현이 사라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릇 투자란 연애와 같아서 많은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시더니…….”
그것은 부친 이호암이 해 준 말이었다.
쏴아아.
강바람이 이서연의 긴 머리를 부드럽게 휘날렸다.
이서연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과연 그렇군요.”
***
운현은 항주에 들어섰다.
오랜만에 보는 서호의 은은한 아름다움은 채 감상할 겨를도 없이, 운현은 그 길로 즉시 무림맹으로 향했다.
무림맹에 도착한 운현은 방문(榜文)이 붙어 있는지부터 살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방문이 붙어 있는 곳에도 서기를 모집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어허.”
운현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지나갔나?’
혹시나 싶은 마음에 다른 방문을 뒤적거리는데 무림맹을 지키던 무사 한 명이 운현에게 말했다.
“이봐! 거기 무슨 일인가?”
무사의 눈빛은 사뭇 살벌했다. 하지만 운현은 오히려 반색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도움이 필요했던 참에 말을 걸어주니 반가운 것이다.
“혹시 무림맹 서기 모집이 이미 지나갔소?”
너무나 자연스러운 운현의 반응에 무사가 오히려 주춤했다.
“서기 모집이라면 거기 붙어 있을 거요.”
무사의 목소리는 한풀 꺾여 있었다. 말투도 어느새 변했다.
“하지만 여기는 아무것도…….”
고개를 갸웃하는 운현에게 무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밑에 깔려 있는 경우도 많으니 잘 보시오.”
그 말을 끝으로 무사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무사는 어쩐지 기 싸움에서 밀린 듯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금의위들의 눈빛을 일상으로 대하던 운현에겐 평범한 대화에 불과했다.
“아! 여기 있군.”
무사의 말대로였다.
운현은 다른 것에 가려 보이지 않던 오래된 방문을 발견했다.
“어디 보자.”
운현은 방문을 빠르게 읽어갔다.
의례히 붙어 있는 문장들을 넘기자 드디어 운현이 궁금해하는 내용이 나왔다.
“장소는 무림맹 공개 비무장이고……. 야외로군. 비라도 오면 큰일이겠는걸? 그리고 날짜가…….”
밝아진 얼굴의 운현이 기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휴, 아직 안 지났군. 어디 보자 이 날짜라면…….”
잠시 남은 날짜를 헤아려 보려던 운현의 안색이 순간 굳어졌다.
“이런.”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헤아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사흘 남았다고?”
시험을 준비함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시간이다.
사실상 응시하는 사람들의 능력이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만큼, 결국은 얼마나 시간을 들였느냐가 결과를 좌우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 운현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사흘, 그것도 시험보는 날을 제외하면 사실상 단 이틀뿐이다.
운현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